"공공의 적?"
"응. 공공의 적."
"재미있었던것 같긴한데."
"아니, 영화얘기가 아니라. '공공의 적' 그것의 부재가 네가 게으른 이유이고, 아무것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는 이유라고. 네가 '정착 할 곳이 없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결국엔 붙잡고 싸워볼 만한 매력적인 적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평이나 마찬가지인게 아닐까. 우리의 인생에 갑자기 불가항력의 적이 나타난다고 생각해봐. '고난', 역경'이라는 것이 갑자기 화악- 하고 덮치는 것이지. 그 고난과 역경이 전 인류가 위협을 느끼고 있을만큼 강력한 것이라면, 아마 너는 더 큰 사명감을 가지고 덤벼들게 될꺼야. 그 것이 네가 찾고있는 절실함이 아닐까. 잘 생각해봐. 우리가 언제 단 한번이라도 '생'에 관해서 절대절명의 위기감 따위를 느껴본 적이 있어? 공복감 때문에 심각하게 절도를 고민해본적이라도 있냐는 말이야. 우리 스스로의 생존권에 대해서는 한번도 공감대를 형성해본적 없다는 얘기지. 오랫만에 친구와 만나서 과연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따위를 이야기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커피맛이 별로라고 불평하고 있거나, 저녁은 어디가서 먹으면 좋을까 따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시대적 위기'에 대한 향수까지를 느끼고 있는지도 몰라. 펑크나 사이키델릭이 그저 하나의 장르로서 스타일로만 명맥을 유지하는것도 그때문이지. 어설프게 '저항'이나 '투쟁'을 이야기하다가는 무시당하기 쉽상이니까.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말이야- 지나치게 평화로워."
"존레넌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이야기군.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가 다시 '이메이진'을 부르고 있다면, 두번째 암살기도는 아마도 니가 하겠지. 엇! 어쩌면 존레논과 오노요코의 침대시위는 '평화'가 아닌 '반평화'시위에 더 어울렸을지도 몰라. 좀 더 역설적인 뉘앙스로- 그래. 어쨌든 그렇다치고- 만약 내가 게으른 이유가 세상이 너무 평화롭기 때문이라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한 난 계속 게을러도 괜찮다- 뭐 그런 심보인거 아냐? 그런 발상은 정말 게으른 사람 아니고서는 생각해내기 힘들것 같은데- 아마 3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뻔뻔하게 게을러도 되겠다. 훗. 그런데 너 아무에게나 그 '평화배격론'을 주장하고 다니는건 아니겠지? 누가 들으면 널 당장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경지대로 추방해버리고 싶어할꺼야."
"평화배격? 젠장 지나친 확대해석이나 하고있다니.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너는 네가 게으름을 느끼고 있는 상황을 '아무것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해서'라고 분석했고, 너는 그 이유를 너 자신에게 '절실함이 부재'해서 라고 이해한것이지.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싸워볼만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는거야. 말하자면 너는 너 자신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나는 내 주변을 탓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그 차이를 알겠어?"
"싸워볼만한 적이 없다니, 당장 너랑 싸워보는게 좋을 것 같은데! 큭. 그러니까 나는 나 자신이 따분해서 게으르다고 여기는 것이고, 너는 세상이 따분해서 네가 게으를 수 밖에 없다는 얘기지?"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니 이야기지. 욘석."
"그래, 어쨌든- 그런데 난, 적이 없어서 세상이 따분하다는 것에는 동의할수가 없어. 네가 말하는 '절대절명의 위기감'이라는 것이 꼭 극단적인 상황들에서만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고통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권리가 있어. 행복이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는것 처럼, 고통도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해. 예를들어서- 음. 어제 담배연기 예찬론을 펼치던 너는 갑자기 오늘 폐암 진단을 받고 들어눕게 되었다고 치자."
"아까는 존레논을 부활시키더니, 이제는 날 무덤속으로 보내버리네-"
"아. 예를들자면. 그렇다고 치자고. 그리고 나는 오늘 애지중지하던 파워북을 책상에서 떨어뜨린 것이지. 그래서 조금 찌그러졌고, 그 안에 있던 데이터가 전부다 날아가버린거야. 자- 그런 너와 내가 만나면 어떤 상황들이 예상될까.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다가. 안좋은 소식을 듣게되고-"
"유감스럽게도, 네가 나에게 위로를 해주어야 하겠지."
"그래, 바로 그 전에-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암묵적으로 누구의 슬픔이 더 커다란지 경중을 따져보기 마련인데, 결과적으로 내가 데이터를 잃어버린 고난은 네가 암선고를 받은 역경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래서 내가 너에게 위로해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라 해도, '고통의 경중을 따지고 슬픔의 정도를 비교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는 부당하다는 이야기지. 결국 '고난'이나 '역경'은 어떤것이 더 절대적으로 슬프다 고통스럽다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내가 암에 걸려서 죽어가는데도, 너는 나보다 먼저 운명을 달리한 너의 데이터 따위를 애도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음. 너하고 좀 더 친하게 지내려면 너의 파워북따위와 경쟁해야 하는건가."
"흐. 신난다. 그게 아니라. 네 이야기에서처럼 '고상한 전 인류적 슬픔'이 있고 '진부한 삼류 신파조 슬픔'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신의 슬픔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전 인류적 슬픔'이라고 생각할 권리가>가 있다는거야. 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세상이 따분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있었나."
"아마, 너의 게으름에 대해서였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