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먼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너에게 보여주겠어

너와 날 가르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너는 자유롭게 나의 몸과 마음을 휘저어

가시에 찔린 듯 깜짝 놀라 너는 뒤로 물러나

아픈 손을 살펴보자 그만 울음을 터뜨려

너의 손이 허무에 잘려 나간 것을 알게 되

우린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어딘지 모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너와 나의 몸은 절대 영도 무중력 속을 헤맨다

작은 우주 먼지로 다시 태어나

서로의 몸과 마음의 경계 없이 사랑을 하게 된다

울 것 없다

덤불을 그렸다
피오르 너머 해지는 풍경을 그렸다
나무를 그리다가 글자를 썼다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닌 글자를 썼다
내일은 글자를 쓰다가 나무를 그릴 것이다
누가 날 이리로 데리고 왔지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일처럼 낯익다
있는 그대로 사는 생물처럼
나도 있는 그대로 있어서
있는 그대로 살아갈 뿐
나머지는 그저 중얼거림이다
사람들은 중얼거림으로 죽고 산다

산도 가끔 중얼거린다
눈이 덮이고 눈이 녹고
물이 흐르고 물이 마르고
그러면 돌이 구르고
우르르
산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할 때 나는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리는 빗소리에 놀라지 않는 것처럼
산이 깎이는 소리도 별 것 아니고
사람이 살며 내는 소리도 별 것 아니다
사람이 변할 때 내는 소리도 별 것 아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또한 죽을 때 내는 소리도
사실은 별 것 아니다

소리는 반짝임 같은 것
그러니 사람이 반짝인다고
울 것 없다

먹을 것을 내놓으라!

— 하고 여자가 소리쳤다. 그녀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축축한 느낌이었지만 커다란 식탁과 의자는 아주 단단하게 잘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커다란 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시차를 두고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 위로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것처럼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구멍으로부터 아주 드물게 빛이 새어 들어오기도 했는데,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그 빛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다만 무언가 밝은 빛의 출렁거림 사이로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넓은 방 안을 몇 번 메아리 치다 어딘가 뚫려있는 공간을 통해 새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방 바깥으로 기다란 복도가 이어져 있고 그 복도 끝에는 어딘가 다른 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확신했다. 아마도 그 계단 끝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있으리라.

이곳을 탈출하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먼저 묶여있는 사슬을 풀어야 했다. 그녀는 이미 이 어둡고 축축한 공간에 익숙해져 있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이곳에 가두었을까?’하는 의문으로 세월을 보내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마저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기억을 더듬어 이곳이 아닌 곳을 떠올려보려 해보아도 다른 기억은 없었다. 그녀는 매일 이렇게 어둠 속에 묶인 채 앉아 있다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조금 전의 비명과도 같은 그 말을 내뱉곤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까 그 소리를 내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소진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 자신의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것을 듣고 있었다. 아까의 그 목소리는 벽을 뚫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 지붕에까지 울려 퍼져 나가며 점차 의미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변해갔다. 비를 잔뜩 머금은 한여름 먹구름이 우르릉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바짝 마른 소나무가 바람에 온몸을 비틀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기차가 떠나간 뒤 한참 후에도 철길에 귀를 갖다 대면 어렴풋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가 멀어져감을 아쉬워하며 책상 위에 귀를 갖다 대고 엎드린 채 앉아 있었다.

그때 어디에선가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아마도 머리 위 빛이 새어 나오던 그 구멍에서 들어온 공기 같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역시나 밝은 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깨끗한 도자기 그릇과 은빛 포크나 나이프들이 부딪칠 때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아 소원이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벅찬 마음에 그녀는 빛을 행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눈이 부셔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빛으로부터 무언가 아름다운 형상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려고 한 손을 이마에 두고 빛을 조금씩 가려보려 했지만, 여전히 그 빛은 너무나 강했다. 빛 너머에서 내려온 그 형상은 처음엔 산처럼 거대한 모습이었다가, 다음엔 큰 바위들로, 나중엔 주먹 만 한 돌들로 쪼개어져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 육중한 돌무더기에 맞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여자는 더는 먹을 것을 달라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동안 그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아주 거대한 고구마 조각, 주먹만 한 밥알, 그리고 팔뚝만 한 밀가루 면들이 자신의 몸을 온통 휘감고 짓누르고 있는 꿈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잘 익은 고구마의 속살을 핥았고, 밀가루 면을 조금씩 씹어 먹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하고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라는 말은 남자가 박차고 일어서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뒤로 자빠진다. 일어선 남자는 뒤를 돌아 자신이 내뱉은 말들을 무심히 바라본다.

‘아무래도’ 라는 낱말은 ‘아무리’와 ‘해도’라는 낱말들로 해체되었다. ‘아무리’라는 부사는 그 정도를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 없기에 애초에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스르륵 사라져 버렸고. ‘해도’는 ‘했는데도’와 ‘하는데도’, ‘할 것인데도’ 처럼 각자 다른 시간의 축으로 깨어져 희미하게 하소연하듯 사라져갔다.

하지만 ‘안 되겠어’라는 말은 웬일인지 침대 위에 그대로 남아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애초에 ‘아무래도’라는 변명은 필요치 않았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그에게 합당한 답을 요구하는 듯 보였다.

남자는 ‘안 되겠어’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푸른 빛이 감도는 창가로 가 창밖을 응시했다.

혼자 남은 ‘안 되겠어’는 생각했다. 남자는 도대체 무얼 믿고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그가 창밖에서 마주하고 있는 저 유약하고 착해빠진, ‘다 잘 될 거야’ 따위가 하는 말들이 감언이설일 뿐이라는 걸 정말 모른다는 것인가? 그걸 믿는다고? ‘안 되겠어’는 남자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워 다시 침대에 눕히고만 싶었다. 창밖의 풍경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다 허상일 뿐이라고, 언제나 변하고 언제고 사라질 것들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만이 현실적이고 나만이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해줄 수 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네가 옳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을 그에게 해 줄 작정이었다. “그래. 다 잘 될 거야.”

한편, 창가에 선 남자는 생각했다. ‘잘 될 거야라’던가 ‘안 되겠어’라던가 하는 말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 말들이야말로 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릴, 악惡이라고.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자기 삶이 더는 ‘말’로 사유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만취

“사랑… 사랑은… 사랑은 취하는 거랑 비슷해. 너무 뻔한 얘기인가… 취하면 취할수록 더 깊이… 깊은 독에 빠지는 거지. 그러니 너도 조심해! 아무랑 막 뽀뽀하고 다니면 큰일 난다! 아무튼 일단 그 사랑 독에 빠지게 되면 거기서 그냥 헤엄쳐서 밖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는 거야. 둘 중 하나야. 지금 우리처럼 계속 취해 있거나.. 아니 우리 둘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얘긴 아니고! 큭. 그게 아니면 그 술독을 팍! 하고 깨고 나오는 수밖에. 자아, 부수자아아!”

짠!

팍.

추룹.

크으으으!

“아무튼 계속 취해있다는 건, 그래 지금이랑 비슷해. 취한 상태에서는 깨어 있을 때의 네가 너에게 손을 쓸 수가 없지. 네가 취해 있다는 자각을 스스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애초에 우리처럼 진정한 로맨티트라면 취하면서 취할까 봐 걱정하지는 않지! 어이 야, 왜 잔이 아직 안비었냐.”

쨔안!

틱.

스르릅.

크으!

“취해 있다는 자각이 있을 리가 없지. 너는 지금 취했니? 손 이렇게 이렇게 해봐. 기분이 이상하지 않냐? 그런데 사랑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깨어날 때가 있어. 특히 우리같이 작업하는 사람들!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꿈속에서 꿈인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갑자기 몸서리치게 두려워지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거. 알지? 가위눌린다고 하잖아. 아니면 물속에서 갑자기 바닥에 땅이 닿지 않을 때,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때 느껴지는 공포. 그런 거랑 비슷한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어. 그런 마음이 들어도 계속! 계에—속! 그 안에 빠져 있어야.. 취해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사랑 밖에서 널 기다리고 있던 너 자신이 너를 흔들어 깨워도 무시해야 되는 거야! 다만 끊임없이 취하라! 라는 시 구절도 있잖아. 누가 한 말이더라… 말라르메던가 보들레르던가 아무튼, 그런 거야. 취함을 멈춰선 안 돼. 만취! 만취! 자, 한잔하실까요?”

짠.

쨍.

쯔읍.

캬!

“응? 사랑 밖에 있는 나가 누구냐고? 나가 누구냐면 글쎄, 원래의 나라고 하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나로 오해할 수 있으니 바꾸는 게 좋겠군. 뭐가 좋을까. 내가 만든 나라고 해야 할까. 그래 어쨌든 그래서 상대적으로 나라는 게 없는 사람들이 쉽게 사랑에 취할 수 있지. 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부터가 애초에 워낙 어려운 일인 데다가, 내가 나와 함께한다는 건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거든. 아무튼,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에잇, 뭐 한잔해!”

짠.

툭.

쪽.

크읔!

“그래 독!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다른 하나의 방법은 그 사랑이라는 술독을 깨부수는 건데 그 독이라는 게…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처음부터 빚어 만든.. 신성한 독이랄까. 아무튼 너—허무도 소중한 무엇이기에 그것을 깨어버린다는 건 정말 큰마음 먹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둘 사이의 신성에 대한 모독인 거지. 아마 그걸 깨부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라면, 그 신성함 따위는 이제 중요한 게 아닌 상태겠지만 말이야… 두 사람 사이의 생물학적 사랑의 결실이 아기라고 하면, 정신적으로 잉태하는 건 그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인지도 몰라… 사랑을 부순다는건 그래서 제 자식을 죽이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응? 뭐라고?…”

“그래서 선배는 그렇게 계속 취해 있을 건가요? 아니면 부수고 나가실 건가요?”

“아아… 으음… 뭐어… 마셔!”

노인

노인은 저마다 산처럼 거대한 정신을 이고 다닌다. 그들이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노인의 마음속에는 바다가 있다. 흐르고 부딪쳐 깎고 쌓는 일은 이미 다 지나온 뒤. 그들이 말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노인에게 드물게 내리는 감정. 그저 깊게 팬 마음의 계곡을 따라 졸졸 흐르다 차가운 바다로 흘러가 버린다. 노인이 잘 웃거나 울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사내는 노인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앞에 한 노인이 울고 있다. 노인은 쭈글쭈글한 손등으로 눈을 비빈다. 축 처진 눈꺼풀 아래가 젖어 있다. 사내의 손을 잡고 어둡고 차가운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조금 전까지 큰소리치던 사내는 노인의 눈물을 처음 본다. 사내는 노인의 눈이 그토록 작아졌는지 처음 안다. 노인의 손이 그토록 거칠었는지 처음 안다. 노인의 눈물이 그렇게 뜨거운지 처음 안다.

사내는 노인을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노인의 거대한 산은 무너지기도 한다. 노인의 바다는 다시 꺼진 바닥 아래로 쏟아져 폭포를 이루기도 한다. 노인의 계곡은 다시 흙으로 메워지기도 한다. 적은 비에도 금세 우르르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사내는 노인을 항상 생각하기로 한다.

흰 밤에

빛이 잘 통하는 암막 커튼을 젖히자 밤의 빛이 새 들어왔다. 창문에 코를 가져다 대니 밤의 뜨거운 기운을 머금은 말랑말랑한 유리의 질감이 느껴졌다. 창밖엔 환한 달이 검은빛으로 검은 구름을 밝게 물들여 놓았다. 동쪽 하늘엔 이제 막 달을 좇아 떠오른 그믐 해가 달의 검은 빛을 받아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눈부신 어둠이 좋아 나는 눈을 찡긋거리며 바다 건너 둥근 집들을 구경했다. 집집이 창문으로부터 온화한 흙빛이 새어 나와 구릉 전체가 검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지막이 솟아올라 잔잔하게 출렁이는 육지로부터 조금 내려오면 검고 단단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메마른 바닷가 항구에는 닻을 올린 배들이 영원히 머물기 위한 출항을 서두르며 멈춰 서 있었다. 육지로부터 습기를 머금고 불어온 바람에 높이 올린 돛이 맥없이 축 처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배를 타고 긴 정착을 떠날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잔잔한 섬 위에 세워졌다. 물살이 세지 않은 터에 서 있어 굳건하게 흔들리는 이 집을 나는 사랑했다. 비가 내려도 역삼각형으로 뚫린 지붕이 있어 빗물을 잘 새어들 수 있도록 설계된 안전한 집이었다. 나는 이 집에 머물며 늘 여행을 떠났다. 집에 머물지 않고, 집에서 집 안으로, 집 안에서 집 안의 나로, 집 안의 나로부터 나의 내면으로, 나의 내면으로부터 다시 나로, 나로부터 집의 내부로 끝없이 여행을 떠났다. 나는 집을 떠나지 않는 방랑자였다. 나는 어느 한 곳에 머물기만 하는 떠돌이의 삶을 경멸했다. 다시 커튼을 내리고 나는 다시 포근한 어둠 속에 들어선다. 나에게 집이란 언제나 낯선 이국 異國. 영원히 떠나고 싶은 조국 祖國이었다.

시인의 밤

시인이 밤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시인의 눈에 아무런 상도 맺히지 않는다

시인은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

바라봄을 멈출 수 없다

바라볼 수 없는 시인은 바라봄을 당한다

밤하늘이 시인을 바라본다

시인을 바라보며 시인이 아닌 모든 것들을 바라본다

밤하늘은 모든 것을 바라본다

밤하늘은 바라봄을 멈출 수 없다

바라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을 때

시인의 눈이 열린다

밤하늘이 시인으로 새어든다

밤하늘로 시인이 새어 나간다

밤은 밤으로 시인을 적시고 시인은 시를 쓴다

시인이 대낮의 세계를 바라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시인의 눈에 모든 사물이 들어와 맺힌다

시인은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

바라봄을 멈출 수 없다

대낮의 세계가 시인을 바라본다

시인을 바라보며 시인이 아닌 모든 것이 시인을 바라본다

세계는 오직 시인 만을 바라본다

세계는 바라봄을 멈출 수 없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시인의 눈이 닫힌다

시인은 시인의 눈 안쪽에서 메마르고

세상은 시인의 눈 바깥에서 마른다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

진통제

아프지 않을 겁니다.

아프지 않다뇨. 이미 아픈 걸요.

아뇨. 그래요 조금 아플 거예요.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요. 그건 알지만, 지금 아프다고요. 당신은 내 아픔을 몰라요.

모르긴요. 아픔을 낫게 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 아닌가요? 아픔을 낫도록 하기 위한 과정이니 조금 참으세요.

아프지 않기 위해 왔는데 지금 나를 아프게 하고 있잖소? 내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아팠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아픈 고통을 나에게 주고 있소.

지금 아프다는 건 치료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 아프시면 진통제를 놓아드리지요.

아니, 그 진통제는 지금 당신이 내게 주는 고통을 낫게 하기 위함 아니오?

치료를 위한 과정이 아프다고 하시면, 그 아픔을 경감시켜드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시죠. 진통제를 놔주세요. 아! 아야! 아니 진통제를 놔달라고 했지 누가 내 살을 뚫으라고 했습니까.

통증을 없애 드리기 위해서는 주사를 놔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파요! 아프다고요!

추방

그동안 어떻게 숨겨온 거죠?

뭘 말입니까?

당신의 기질 말이에요.

아무것도 숨긴 것 없습니다. 기질이라는 걸 선택하며 살아가십니까? 난 그저 살기 위해서 그때그때 필요한 행동을 한 것뿐입니다.

숨길 수밖에 없었겠지요. 남성적 기질이라는 건 배척당해 없어진 지 오래니까… 아주 조금만 드러내도 눈에 띄게 마련이지요.

아니 내가 어딜 봐서 남성적이란 말입니까? 이 성城의 도덕률을 나보다 더 잘 따른 사람이 있으면 지금 당장 이리로 데리고 와보시오!

그래요.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순순히 권력을 따르기만 하는 모습 속에서 당신의 남성적 기질을 읽어냈을 수도 있겠군요. 아주 위험해요.

그저 따라야 하는 것을 따랐을 뿐인데, 그게 남성성과 무슨 관련이란 말이오? 그래요… 맞아요… 이 성에 녹아들었죠. 그게 잘못이오? 내가 지켜오던 가치도 자존심도 다 버렸소! 오! 내가 미쳤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이겨내려는 패기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곳에 정착해보겠다고 남들 눈치나 살피며 살아왔다니.

계속해 보세요.

내가 청문회 자리에서는 당황해서 말을 못했지만… 내가 이 사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해 왔는지 당신은 알지 않소… 허허 참, 인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하는 표정이군! 그래, 다 잊어버렸는가 보군! 나도 이제 진력이 나는 것 같소. 어서 나를 보내주시오!

진정해요. 이제 조금 알겠어요. 당신이 왜 추방자 명단에 포함되었고 여기에 서 있는지를. 당신은 그동안 잘도 감춰 왔군요. 당신의 야망을. 당신은 야망이 있었군요.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아주 위험해요. 순응해 왔던 건 그저 문제를 일으켜 불편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과는 상관없는, 그저…

내가! 이 공동체를 위해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해 온 것을 모르십니까? 매사에 희희낙락 늑장 부리며 비효율적으로 처리하던 일들에 위계를 정하고 체계를 적립한 게 누굽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단기간에 많은 일이 진행되었을 것 같소? 아니요! 당신들은 그저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할 뿐… 게다가 나와 함께한 여성들 모두 나에게 고마워했다는 것을 당신도 알지 않소?

(웃으며) 자, 흥분하지 말아요. 당신이 가진 특별한 재능을 발휘해 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요. 복지회관 건립에도 당신의 공이 컸지요. 힘쓰는 일도 마다치 않고 도와준 것도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럼 대체 왜?!

그건 위원회의 결정이기 때문에 저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해요. 추방결의안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을 거예요. 왜 당신을 추방하기로 했냐고 물었죠. 당신은… 위험하니까요. 당신이 희생이라고 말하는… 하지만 자발적으로 행사한 여러 일들 때문에 우리 구성원들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당신은 더 많은 여성 구성원이 당신에게 기대고 도움을 요청하게 했어요. 또한 당신이 가진 재능을 펼친 것을 마치 대단한 희생인 것처럼 생각하죠. 그런 마음은 우리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어요. 지금도 당신은… 우리가 당신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아마도… 위원장에 추대되거나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거라 기대했겠죠?

내 순수한 선의를 그렇게 비꼬지 마시오! 나는 그런 감투 따위는 바라지 않았단 말이오! 그저…

그저 여성 동지들의 무한한 위로와 감사를… 기대했나요…? 그런 거군요! (웃음) 당신은 우리를 위해 희생할 필요 없어요. 우리를 책임져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고요. 우리가 지키고 있는 가치들을 재단하거나 개선해달라고 아무도 부탁한 적 없어요. 모두 당신이 원해서 한 일이에요. 자신이 이 사회에 대단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게 하기 위해서 그래야 했겠죠. 그래야 남자로서 명분이 선다고 생각했겠지요.

내가 뭘 바랐다고 그러는 거요?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수익을 내기는커녕 조합을 운영하는 것조차 힘들었을거요. 나는 일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하려는 방안을 제시했을 뿐이고, 그 덕분에 지난 분기에 사상 최고의 수익을 내지 않았느냐는 말이오! 내 덕분에!

내가… 내 덕분에… 보세요. 당신은 온통 당신의 공만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누구도 당신에게 더 큰 수익을 가져다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래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당신 때문에 우리가 조합을 운영하며 느꼈던 기쁨이 다 사라져버렸죠. 느리지만… 작고 소소한 기쁨이 넘치는… 더 아름답고 더 세밀한 가치들을 발견하고 추구해 나가는 기쁨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저 효율을 위해 모든 세부를 뭉뚱그려 못생긴 덩어리들을 만들어 낼 뿐이죠.

작고 소소한 기쁨 좋아하시네! 핫! 참! 누구 좋으라고 내가 그 고생을 했는지… 어서 이 문을 열어주시오! 추방당하느니 내 발로 나가고 말지!

여성성 女性城 의 문이 열린다.

남자는 광야로 추방된다.

금단의 열매

그 열매… 네가 먹었니?

네. 열매를 먹으면 행복해진다고 해서… 행복해지면 안 되나요?

행복은 안 된다. 사람은 모든 일에 덤덤해야 해.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왜 나쁘죠?

한 번 행복의 맛을 보면… 그 맛을 계속 느끼고 싶어 하니까. 행복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단다. 그러니 애초에 행복을 느끼지 않는 편이 낫지.

하지만 금단이는 그 열매를 먹는단 말예요. 저도 금단이처럼 늘 밝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싶어요.

금단이는 열매를 먹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야. 자기가 원할 때면 언제든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했던 것이지. 이제 네가 금단이의 열매를 따먹는 바람에 더는 행복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부러워할 것도 없다. 누구나 먹을 수 있다면 더이상 금단이 만의 열매도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저는 늘 쾌활하게 웃는 금단이가 좋은걸요. 금단이가 저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면, 저도 행복하지 않아요. 가서 사과하고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해야겠어요.

더는 먹지 않겠다고 해도 이제 소용없단다. 아까도 말했잖니, 금단이가 열매를 먹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고. 게다가 너는 오늘따라 행복해 보이는구나.

맞아요. 금단이가 열매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사실… 조금 기분이 좋기도 해요. 저에게 벌을 내리실 건가요?

아니다. 금단이도 더이상 행복하지 않게 되었고, 너의 행복도 곧 사라져 버릴 테니, 모두에게 잘된 일이야. 둘 다 행복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금단이는 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다른 나무를 심을 게 분명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면 또 혼자 먹으려 들 테지. 너는 또 그 열매를 먹지 못해 불행해 질 테고…

둘 다 행복하지 않은데 왜 잘된 일이라고 하시는 거죠? 둘 다 행복해야 잘된 일 아닌가요?

얘기했잖니, 행복에는 끝이 없다고. 누구 하나 더 큰 행복을 가진 사람이 있을 때, 불행이 생겨나는 것이란다. 그러니 둘 다 똑같이 불행하다면, 둘 다 행복한 것이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불행은 행복한 사람 때문에 생겨난다는 말씀이세요?

불행은… 행복이라는 말에서 생겨난단다

파드메

작품 설치를 끝마쳤다. 오픈 전까지 조명 설치에 대해 큐레이터와 의견이 맞지 않아 가슴을 졸였다. 작은 공간이지만 외국에서 하는 첫 개인전인 만큼 긴장을 많이 한 탓도 있겠다. 이제 몇 시간 뒤면 낯선 관객을 맞이할 공간. 오디오 앰프가 좋은 소리를 내려면 잠시 예열을 시켜줘야 하는 것처럼, 작품이 공간에 잘 스며들 시간을 주고자 잠시 자리를 비우기로 한다. 공간을 운영하고 또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들이 어린 탓인지, 전시 준비 기간 내내 나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긴장을 풀어주고자, 정식 오픈 전이지만, 맥주를 사 와서 함께 병을 부딪치며 며칠간 고생한 서로를 격려했다. 사실 알코올의 힘이 필요한 건 나였다. 외국인 관객들 앞에서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맥주를 들고 다른 전시장을 돌아보기로 한다. 이곳은 원래 예전에 붓을 만들던 공장이었지만, 지금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과 작은 갤러리들이 모여 복합예술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작년에 브루클린의 연필공장을 개조한 작가들의 공동 작업실을 들른 적이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유행인가 싶다. 내 전시공간이 있는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어디선가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가로 가보니, 웬 금발의 여자가 커다란 쓰레기통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공장 한쪽에 건물을 철거하고 난 벽돌과 폐목재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고 각종 플라스틱 튜브, 포장용지 같은 쓰레기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거꾸로 솟아 나온 여자는 커다란 플라스틱 뚜껑을 엉덩이로 튕겨내더니 그 위로 기어 올라가서는 파란 비닐포장지를 끌어안았다. 기록을 위해 위해 한쪽에서는 카메라로 작가의 움직임을 촬영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어제 보았던 내 전시장 옆방의 바지츠라는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픈 전날까지도 방이 비어있길래 궁금했는데, 인제 보니 작품은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쓰레기더미 위에서 쓰레기와 뒹굴며 미친 듯 웃고 얘기하는 저 사람이었다. 여자 주변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와중에 관객들은 조용했고 폐허 위 여자의 웃음소리와 비명만이 들려왔다. 여자는 커다란 들통 속에서 진흙을 퍼내어 온몸에 바르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는 자신의 셔츠 안으로 구겨 넣었다.

여자의 퍼포먼스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흔들리는 수조 위에 연결된 더러운 하수관 위로 올라가더니 마치 남성 위에 올라탄 여자처럼 허리를 움직이며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이 여성 작가의 곡예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나는 벌써 맥주를 세 병이나 들이켰다. 여자의 몸은 온통 더럽혀졌다. 비를 쫄딱 맞고서 진흙이 담겨있던 들통을 자기 머리 위로 뒤집어쓴 탓에 그녀의 금발 머리는 흑발로, 얼굴은 까만 흙으로 뒤덮였다. 숨을 헐떡거릴 때마다 그녀의 허연 눈동자와 선홍빛 잇몸, 흰 이가 검은 진흙 사이로 소름 끼치게 드러났다. 그녀가 입고 있던 분홍색 티셔츠는 짙은 회색으로 변해버린 채, 한쪽은 날카로운 플라스틱 조각에 찢겨 아슬하게 걸려있었다. 금방이라도 알몸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그녀의 행위를 이 층 창문 틈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비가 내리는 잿빛 하늘 아래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강 지어진 회색 공장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쓰레기 더미 위에서 플라스틱과 육체적 교감을 나누는 여자의 몸 이외에는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플라스틱 기름통과 한바탕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뒤 여자는, 이제 자동차 배기구를 끌어안고 대화를 나눈다. 마치 남자의 성기를 잡고 흔드는 것처럼 배수용 호스를 붙잡고 음란한 교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몸에서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여자의 흥분이 고조될 때마다 내 심장도 빠르게 뛴다. 나는 저 쓰레기에 감정을 이입하기라도 한 것인가?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 여자는 천천히 뒤쪽 담벼락으로 올라가더니 버려진 이불처럼 거꾸로 매달렸다.

사람들은 끝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여자가 성큼성큼 벽돌 더미를 밟고 내려와 큐레이터가 덮어주는 담요를 덮고 웃어 보이자, 그제야 커다란 박수 소리로 화답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소매를 잡아채는 느낌이 나 돌아보니 큐레이터가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취기가 적당히 오른 상태로 전시장으로 돌아갔다. 이 작은 도시에서 하는 전시에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올까 싶었는데, 건물 안은 젊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 전시장에도 발 디딜 틈 없이 관객이 들어 차 있었다. 놀란 내 얼굴을 본 큐레이터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어깨를 툭툭 쳤다. 다시 새 맥주를 따서 건배하고는 관객들 사이로 들어가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말이 자꾸만 꼬였다.

그때, 불과 한 시간 전, 쓰레기 더미 위를 뒹굴던 작가가 말끔한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금발에 곱슬머리도 단정하게 귀 뒤로 넘겨져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어릴 때 봤던 미국 영화의 여배우를 닮았다. 수수한 청바지에 여성스러운 파란 색 니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전쟁을 치르듯 구르던 모습과 대비되어 아름다워 보였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녀의 퍼포먼스를 지켜보며 느꼈던 감정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내가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는 얘기에, 작가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 작품에 대해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내 설명에 일일이 공감해 주며 자신의 감상을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소란스러운 전시장에서 빠져나와 조용한 곳에서 그녀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녀는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파드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맥주를 몇 병 더 마셨다. 큐레이터가 자기 아는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순간 관객들 속에서 파란색 니트를 입은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내 포기하고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이번엔 웬 오래된 타이어 공장으로 향했다. 커다란 사무실 같은 공간에 현란한 조명이 번쩍거리며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갤러리에서 온 외국인은 나를 알아보고 전시를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이었다. 낯선 외국의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속이니 취해버려도 괜찮을 것이다. 다행히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갈 큐레이터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했다. 낯선 사람들에게도 입장료도 받지 않고 파티를 즐기도록 허락해 준 이름도 모르는 외국인 덕에, 나는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식도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고, 구토감이 몰려왔지만 나는 다행히 정신을 잃지 않았다. 나는 파드메가 보고 싶었다. 그녀와 아까 그 쓰레기 더미 위를 뒹굴고 싶었다. 그녀의 파란색 스웨터를 벗기고 싶었다. 머리를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되자, 큐레이터에게 겨우 이제 돌아가자는 얘기를 하고는 염치없게도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와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꿈속에서 나는 쓰레기 더미 위에 쓰러져 있었다. 쓰레기로 된 몸이었으므로 다른 쓰레기와 구분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은박 포장지로 된 피부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창틀로 된 가슴뼈 안에는 엔진오일 때에 절어 검게 변한 피스톤으로 된 심장을 갖고 있었다. 녹슨 크랭크축으로 된 척추 아래에는 잘려나간 드럼통으로 된 골반이 붙어 있었다. 하수구용 플라스틱 배관으로 이어붙인 다리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머리는 모서리가 다 깨진 붉은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바스라지며 떨어져 나갔다. 내 앞에는 푸른 니트를 입은 파드메가 서서 쓰레기로 된 나를 애처롭게 쳐다본다. 나는 일어서는 것을 도와달라며 흐물거리는 스티로폼 팔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이제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기 시작한다. 내가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모양이다. 내가 너무 더러워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일까. 나는 전기 케이블로 된 왼손으로 은박지로 싸인 몸 곳곳을 문질렀다. 그러자 날카로운 전선 끝에 걸려 찢어진 피부가 하느작거렸다. 이번엔 얼굴을 닦으려 고개를 숙이다 그만 벽돌로 된 머리가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나는 너무 슬펐다. 파드메는 왜 이런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녀가 원망스러워 날카로운 선풍기 날개로 된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오른팔에 이어져 있던 전선이 내 허리를 휘감고 있었던 바람에 내 몸은 완전히 꺾여 버렸다. 나는 이제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슬퍼할 몸조차 잃어버려 절망하고 있던 내 플라스틱 배관 위로 파드메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녀는 떨어져 나간 내 플라스틱 정강이를 붙잡고 흐느껴 울었다. 부러진 칫솔로 된 내 갈비뼈를 붙잡고 나를 사랑한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유모차 손잡이로 만들어진 내 어깨뼈에 키스하고, 자동차 매트로 된 내 허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필라멘트가 끊어진 지 오래인 전구로 된 두 눈을 들어 겨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진흙과 엔진오일을 뒤집어쓴 웬 괴상한 여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녀는 파드메가 분명했으나, 쓰레기 같은 나를 위해 그녀 역시 쓰레기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나는 수도꼭지로 된 목으로 비명을 질렀다. 파드메는 그런 나를 위로하며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된 내 귀에 속삭였다.

“괜찮아, 슬퍼할 것 없어. 우리의 몸도 쓰고 나면 버려질 텐데 뭐. 그러니 조금 더럽혀져도 괜찮아. 더러운 건 너의 몸이 아니야. 너의 마음이지. 그러니, 몸은 더러워도 절대 더럽혀지지 않아.”

열린 방

등장인물

젊은 남자
말쑥한 신사
수염을 기른 남자
헐벗은 남자
젊은 여자
백발의 노인
젊은 남자의 아내
폐허 관리인



첫째 날


사각형의 방 안으로 두 남자가 등장


말쑥한 신사 여기군요. 당신이 영원히 있을 곳은.

젊은 남자 여기 있을지 말지는 내가 정합니다.

말쑥한 신사 아니요. 당신은 여기서 지내게 됩니다. 당신이 가져온 공간 아닙니까? 책상이 있는. 사각형의. 하얀 방.

젊은 남자 (방 안을 둘러보며) 그렇긴 하지만… 조금 답답하군요. (갑자기 문이 열린다) 누구요!

말쑥한 신사 거긴 아무도 없어요. 방금 당신이 답답하다고 말하지 않았소?

젊은 남자 그렇게 말했을 뿐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는 않았소. 다시 문을 닫아주시오.

말쑥한 신사 말을 그렇게 안 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문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거요.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그러니, 조심하시오. 영원히 이 방에 머물고 싶다면.

젊은 남자 아니, 이곳에 평생 머물러야 한다는 거요?

말쑥한 신사 평생이라니요? 우리에게 그런 개념은 없습니다. 당신의 한평생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렇게 놀란 눈으로 쳐다볼 필요 없어요. 다들 그렇게 처음엔 놀란 척을 하지요. 자신이 한평생 원했던 공간을 갖게 되었으니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런데… 참 소박하군요. 당신이 원했던 공간이란…

젊은 남자 분명, 이 책상과 의자는… 아니 의자가 보이지 않소!

말쑥한 신사 그야… 책상이 필요하다고 했겠죠. 책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젊은 남자 아니, 의자 없는 책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하지만 이 책상은 마음에 드는군요. (책상을 쓰다듬다가 문 쪽으로 다가가며) 아니, 문이 사라져버린 것 같소!

말쑥한 신사 방금 당신이 폐기하지 않았소?

젊은 남자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 없애달라고 하지는 않았소!

말쑥한 신사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 아마 마음속으로는…

젊은 남자 (화를 참으며) 내 마음을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말이오? 젠장… 내가 이런 방을 원했을 리 없어요. 여닫을 수 없는 방이 무슨 방이란 말이오? (문밖으로 나가려 한다)

말쑥한 신사 어, 저기… (눈을 질끈 감으며)

젊은 남자 (보이지 않는 문에 퉁겨져 뒤로 자빠진다) 이게 뭐요! 나는 갇힌 거요?

말쑥한 신사 이 양반, 성미가 급하시군…. 내가 말했지 않소. 당신이 평생… 아니, 영원히 지낼 곳은 여기라고. 하지만 갇힌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들어왔겠소. 누구나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답니다.

젊은 남자 (바닥에 쓰러진 채로) 누구나 드나들 수는 있지만, 정작 집주인은 나갈 수 없다니. 그게 어떻게 갇힌 게 아니란 말이오?

말쑥한 신사 이미 말했지 않소. 이 모든 공간은 당신의 설계대로 지어진 것이라고.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군요. 열려있는데 나갈 수 없다니. 아마도 당신은 자신을 가두고 싶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도 만나고 싶고…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젊은 남자 그렇다면 설계를 바꾸겠소. 나는 나갈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도록… (다시 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말쑥한 신사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요.

젊은 남자 (손가락을 덴 것처럼 움켜쥐고 펄쩍 뛴다)

말쑥한 신사 그 정도면 충분히 알았겠군요. 저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열린 문을 통해 나간다)

젊은 남자 아니 뭔가 더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쑥한 신사 (젊은 남자의 문 안쪽을) 당신이 바랬던 건 거기 다 있을 겁니다. 영원히…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요.

젊은 남자 (웃음을 터뜨리며) 영원이라니! 웃기는군, 영원!*

말쑥한 신사 퇴장. 젊은 남자가 문밖을 바라본다. 거대한 흰색의 풍경이 보인다.


둘째 날

열린 방. 책상에 누워있는 젊은 남자

젊은 남자 (방백으로) 이상하군, 잠이 오지 않아. 배도 고프지 않고. 그리고 이곳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문밖을 바라보며) 해가 지지 않는 북구의 나라인가. 밤인지 낮인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아. 몇 시간이, 몇 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구나. 누군가 시간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밖에 나가볼 수 있다면 태양이 어디에서 뜨고 어디로 지는지 알 수 있으련만, 대낮에도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이 방이 없…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으렸다… 조심 또 조심. 나는 이 방을 원해! 이 열린 방이 필요하다고! 이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구나. 시간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끼니를 챙겨야 할 필요도 없고, 잠자리를 알아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군. 여기 사람들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서 아예 폐기해버린 거야….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영원히 흘러갈 것도 없겠군. 가만… 시간 없이도 영원이라는 개념이 가능한 것일까? 영원은… 멈추어 있는 것인가 흐르는 것인가? 아니면, 멈추어 있는데도 흘러가는 것인가? 재미있는 주제로군! 이런 생각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아, 이렇게 상상에 빠져있을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지! 내가 온 저 아래… (아니, 어쩌면 위인지도 모를) 저세상에서는 몸이 원하는 온갖 생리적인 욕구들을 해결하느라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했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온전히 정신에만 집중할 수 있겠구나! 게다가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해코지하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야… 저 문만 닫을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라고? 참나, 그렇다면 문을 다시 만들어보자… (한참을 서 있다가) 소용없군. 역시 나를 복종시키려고 무슨 요술을 부린 게 틀림없어. 내 눈에는 보이지는 않는 특수한 문을 달아놓은 게 분명해. 분명 열리는 순간이 있을 거야. 다음에 누군가 찾아오면 그 틈에 나가야지!

선 채로 문밖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젊은 남자 (갑자기 다짐한 듯 일어나 방백으로) 그래,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뭐라도 하자…. 하지만 종이 쪼가리 하나도, 잉크도 보이지 않는군…. 내가 왜 도구들을 챙기지 않았을까. 한심스럽구나! 쳇! 불가능할 것도 없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자. 문장을 하나씩 완성하고. 첫 문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외우고 그 다음 문장을 완성하는 거야. 그래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다 그랬다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닌다

젊은 남자 (갑자기 일어나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비장한 말투로 읊조린다)

영원히 멀어지는 지상의 시간이여

멀어져만 가는 그대는 이제 나와 무관하니

가지말라 애원하지 않겠네

이제 시간은 나에게 머무네

도망치지 않는 충직한 나의 시간은

나와 함께 늙거나 젊어질 마음이 없다네

더는 흘러감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대가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한 발짝 걸음을 떼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네

시간이 달릴 때 변화하는 것은

오직 껍데기들이 사는 세상

변화하는 모든 껍데기와

나는 이제 작별을 고하네…

남자는 갑자기 벌거숭이가 된다

이런, 하하!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젊은 남자 (자조하듯) 그래… 옷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옷은 필요 없어! 가져가라고! 하지만 이 방만은 나에게서 뺏어갈 수 없을 걸? 절대로 잊지 않겠어!

혼자서 한참을 중얼거린다

젊은 남자 됐어. 이렇게 매일 조금씩… 아니, 매일이라는 개념도 필요 없지. 영원히 나의 이 열린 방 안에서 상상하고 글을 지어내겠어. 종이도 필요 없고 책상도… 아니 책상은 아직 필요해! 필요하다고! 그래… 하지만, 이렇게 글을 지어내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나갈 수는 없어도 누군가 들어올 수 있다니, 어쩌면 다행이군. 누구라도 방문자가 있다면, 기회를 봐서 시를 들려주겠어.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예술을 아는 사람 하나는 있겠지…


셋째 날


두 남자가 열린 방 안쪽을 들여다보며 서성인다.


수염을 기른 남자 여어… 여긴가 보네. 틀림없어. 들어가 보자고.

헐벗은 남자 어우, 이야. 이런 데가 있었어?

젊은 남자 (인기척에 깜짝 놀라 문 앞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몸을 가리며) 당신들 누구요?

수염을 기른 남자 (젊은 남자의 몸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어어… 이 친구, 여기가 처음인가 보군. 에이. 놀랄 것 없어! 처음엔 다 그래. 우린 다 허깨비여.

젊은 남자 허깨비라니…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며) 그럼 이게 다 꿈이란 말입니까? 꿈이 맞죠?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젊은 남자의 중요 부위를 쳐다보며) 에이… 가릴 필요 없어. 남자들끼리 뭘.

헐벗은 남자 이 양반 아직도 꿈에서 못 깼구먼. 이게 꿈이 아니고 사실…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치를 본다)

젊은 남자 꿈이든 뭐든… 나가주시죠. 여긴 사적인 공간입니다.

수염을 기른 남자 아니 사적이라면서 문은 왜 열어놓은 건가?

헐벗은 남자 닫을 문도 없던 걸… 누구나 들어오라고 그렇게 해놓은 거 아녔어?

젊은 남자 아니요. 처음엔 분명 문이 있었는데 그만…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웃는다)

젊은 남자 아니요. 그건 실수입니다. 저는 분명 안으로부터 잠글 수 있는 방을 생각했는데.

헐벗은 남자 에이… 실수라니! 그분이…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치를 보며) 실수일 리가 없지. 모두 자네 생각대로 된 거라고. 암.

젊은 남자 그분이라는 게 누구죠? 그 사람이 누구든 만나게 해주시오!

수염을 기른 남자 그럼. 실수일 리 없지… 자네가 생각하는 그분 같은 건 없네. 설령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헐벗은 남자를 바라보며) 그나저 … 자네 저 세상에서 건축을 공부했던가? 이 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헐벗은 남자 건축이라. 허허. 그렇지 내가 집 좀 지었지. 아-아주 미니멀하구만. 아무것도 없잖아. 공간 그 자체에 집중한 게지. 집주인이 아주 마음이 복잡한 사람인가 봐. 다 비운 걸 보니까. (안경을 넘어 음흉한 눈빛으로 젊은 남자를 쳐다본다) 그렇지? 집은 멋지게 지어놓고는 막상 그 안에 사는 자기 자신은 배려하지 않은 게야. 미니멀리즘 건축이 그렇지 뭐. 실용적이지가 않아!

젊은 남자 저는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습니다.

헐벗은 남자 에이… 그럴 리가! 나도 여기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걸? 이런 데 올 줄 알았더라면 아주 튼튼한 궁궐이라도 설계했을 텐데….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치를 본다) 헌데, 젊은 양반 취향이 아-아주 대단하구먼. 단순한 구조이긴 하지만 마감이 아주 좋아. (벽을 탁탁 치며) 게다가 튼튼하게 잘 지었는걸?

젊은 남자 (기분이 조금 좋아져서) 이런 텅 빈 공간을 하나 갖는 게 꿈이었죠. 살림살이도 최소한으로 하고 싶었는데… 마침 침실도 부엌도 필요 없게 되었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도 않았는데 피곤하거나 배가 고프지 않다니… 당신들도 그렇나요? 저 바깥에는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나요? 그나저나,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되었나요? 밤인가요? 낮인가요? 여름인가요? 겨울인가요? 이 방 안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웃는다)

수염을 기른 남자 시간을 그렇게 알고 싶어 했으면, 그게 뭐더라… 그 벽에 걸려있는… 두 개의 침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거 말이야….

헐벗은 남자 시계! 시계를 갖다 놨어야지! 있어 봤자 소용없겠지만 말이야.

수염을 기른 남자 소용없고말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아무것도 없다네. (책상을 들여다보며) 그런데… 이 책상은 왜 필요한가?

헐벗은 남자 그야… 앉아서 궁리할 용도겠지. 생각이 많은 양반이라니까.

젊은 남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려고 갖다놓았지만, 의자를…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웃는다)

수염을 기른 남자 작가 선생이셨군! 그런데 작품은 어딨나?

젊은 남자 이곳에서는 도구를 구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말인데, 밖에서 종이와 잉크를 좀 구해다 주실 수 없는지요? 필요하시면 이 책상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내가 나가는 것을 도와주시오!

헐벗은 남자 아니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 창작이 가능한가? 경험을 하려면 밖에 나가야지! 나가지도 못하는데 말이야.

수염을 기른 남자 하여간 요즘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머리로 다 해결하려고 한다니까.

헐벗은 남자 하지만 형님, 여기서는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수염을 기른 남자 (때리는 시늉을 하며) 아, 거, 참…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저 아래 사람들 말이지! 아니, 위였나?! 어느 쪽이여?

젊은 남자 사실은 어제 시를 한 편…

수염을 기른 남자 (말을 자르며) 나가서 사람을 만나야지. (안쓰러운 표정으로) 젊은 사람이… 사랑은 안 하는가?

젊은 남자 사랑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제가 어제 영원에 관한 시를…

헐벗은 남자 (말을 가로막고) 저 문 바깥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겠네! 여기 열린 방에 숨어서 말이지!

젊은 남자 (체념한 듯) 하지만…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요….

수염을 기른 남자 (헐벗은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에이… 이 친구 헛살았구먼. 우리가 보일 리가 없잖아! 생각해봐! 그리고 밖에 나가봤자 소용없어. 뭔가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도구가 없다구. 여긴 오직 마음뿐이야!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마주 보며 웃는다)

젊은 남자 그렇군요. 그래서… 다들 그렇게 벗고 있는 것이군요.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의 옷이 사라진다.


수염을 기른 남자 아니 이 친구! 어허.. 참. 제법일세. 우리 옷을 벗겼어!

헐벗은 남자 우리 옷을 벗겼어! (웃는다)

젊은 남자 하하하! 잘 됐군요. 허깨비들에게 옷은 필요 없지요!

수염을 기른 남자 눈치가 제법이군. 작가 양반! 필요치 않은 것은 사라진다네. 그런데, 우리 옷까지 벗길 필요는 없지 않았나?

헐벗은 남자 (몸을 더듬으며) 난 이게 더 나은걸. 고맙네!

수염을 기른 남자 하지만 모오-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네. 원하지 않는 것을 없애버릴 수는 있지만, 이 세계에 그 무엇도 덧붙일 수는 없다구. 그러니, 창작이니 뭐니 새로운 뭔가를 만들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네.

헐벗은 남자 뭔가 만들 수 있는 곳이 있긴 한데….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치를 본다)

수염을 기른 남자 어이, 이 사람이. 괜히 바람 집어넣고 있어. 인제 그만 가자구. 세 늙다리 남자들이 이렇게 좁은 데에 모여 있으니 거시기하기도 하고… 사적인 공간이라지 않나. (문밖으로 나간다)

젊은 남자 (두 남자가 나가는 틈을 타 문밖으로 나가려다 튕겨서 나자빠진다)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뒤를 돌아보며 웃는다)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퇴장.




넷째 날


문밖에 젊은 여자 등장.


젊은 여자 저기요….

젊은 남자 (벽을 마주 보고 누운 채로) 제발… 나를 가만히 놔둬요.

젊은 여자 저기요… 들어가도 되나요. 얘기 좀 나누려고 해요.

젊은 남자 (젊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가 누그러져) 무슨 일이요?

젊은 여자 오래는 머물지는 않을 거예요. 도와주려고 왔어요.

젊은 남자 (한 손으로는 중요 부위를 가리고 문 앞으로 마중 나가며) 먼저 물어보시는 걸 보니 이곳에도 교양인이 있는가 보군요. 들어오시죠.

젊은 여자 (남자를 통과하여 방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어요. 스스로를 공간에 속박시키는 게 아니라면… 어디든 드나들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공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대단한 정신력이에요.

젊은 남자 대단한 정신력이라니. 무슨 말이죠?

젊은 여자 대단한 정신력이고 말고요. 마음만 먹으면 이런 것쯤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니까요….

젊은 남자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젊은 여자 벌써 잘 알고 있군요. (문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저 문도 당신이 필요 없다고 여겨서 사라져버린 것 아닌가요? 혼자서 영원히 머문다는 것이 두려웠겠죠. 책상만 덩그러니 있는 걸 보니 의자도 당신이 지워버린 것 아닌가요?

젊은 남자 그건… 애초에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젊은 여자 (웃음) 조만간… 이 열린 방도 필요 없다고 느낄 거에요.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나와 같이 광야에서 살게 되겠죠.

젊은 남자 광야라니… 그렇다면, 저기 보이는 그대로 바깥도 텅 비어있단 말입니까?

젊은 여자 아직 한 번도 바깥에 나가본 적 없어요? 아, 나갈 수가 없는 거로군요.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분께 전해드릴게요.

젊은 남자 그분이라니… 대체 그분이 누구죠?

젊은 여자 (미소 지으며) 그보다는… 당신 얘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요. 도대체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알고 싶어요.

젊은 남자 별것 아니에요… 작품을 제작하고 있어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젊은 여자 (놀란 눈으로) 하지만 여기엔 아무것도 없잖아요. 창작은 불가능할 텐데….

젊은 남자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머릿속에서 작품을 만들죠. 저도 이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벌써 여러 편의 시와 소설의 첫머리, 두 점의 그림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답니다.

젊은 여자 대단하군요!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들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다니. 아주 아름다운 시와 그림이에요. 지금 당신이 구상하고 있는 소설의 첫머리도 굉장히 흥미롭군요!

젊은 남자 여기 사람들은 칭찬도 비난도 아주 천연덕스럽게 하는군요. 제 작품을 아직 보여드린 적도 없습니다만….

젊은 여자 (젊은 남자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가며) 여기 있잖아요.

젊은 남자 (손이 닿기 전에 물러서며) 작품에 대해 구상을 하는 시간 이외에는… 감정을 연구합니다.

젊은 여자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걸요?

젊은 남자 연구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 혼자 있다 보면, 마음속에 추억과 더불어 여러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죠. 그 어떤 감정을 처음 피어오르게 만든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을 이곳에 불러옵니다. (허공을 응시하며) 그 대상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다투기도 하죠. 그러다 보면 그 감정이 더 예리하게 돋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 그 감정만을 따로 떼어내서…

젊은 여자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젊은 남자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떼어낸다는 것은 마치…

젊은 여자 아뇨… 떼어내는 게 아니라, 혼자서 그게 가능하냐는 거죠.

젊은 남자 물론이죠. 하지만 감정에 대해서만 몰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는 기억 속의 조각들을 짜 맞추곤 합니다. 먼저 생각나는 기억들로부터… 그 주변의 기억들을 하나씩 불러오는 일이에요.

젊은 여자 (웃는다)

젊은 남자 왜 웃는 거죠?

젊은 여자 아니에요. 계속하세요.

젊은 남자 아무튼 오래전의 기억을 불러와 짜 맞추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 아, 참. 지금이 몇 시죠? 이곳은 아마도 북극에 가까워서인지, 아무리 오래도록 문밖을 보고 있어도 해가 지지 않아요. 그림자가 문 반대편으로 지고 있는 모양인데… (문 쪽을 가리키며) 저쪽이 남쪽인가요?

젊은 여자 (크게 웃는다) 당신은 정말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인가요? 천천히 알게 될 거예요. 왜 계속해서 여기일 뿐이고, 왜 계속 지금일 뿐인지….

젊은 남자 그래요… 아무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군요… 뭐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처음에는 아주 작은 기억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요. 시계라고 칩시다. 시계에 얽힌 하나의 사건을 떠올려보는 것이지요.

시계를 처음 사던 날이라던가… 시계를 잃어버린 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는 거죠. 마치 뿌옇게 서리가 내린 창문을 닦아내듯 희미한 부분을 조금씩 투명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어릴 적에 나의 형이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았던 시계를 물려받은 적이 있어요….

젊은 여자 그 시계를 당신이 제멋대로 색칠하고 망가뜨렸죠.

젊은 남자 맞아요! 그런데 어느 날 형이…

젊은 여자 그 시계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차마 사실대로 말은 못하고 잃어버렸다고 말해버렸죠? 그러다가 형에게 흠씬 얻어맞았고요?

젊은 남자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어떻게 이미 알고 있는 거죠?

젊은 여자 당신은 이 열린 방에서 추억을 곱씹고 있었군요. 그런데, 감정이라는 건 누군가와 함께 느껴야죠! 지금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순간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나요?

젊은 남자 (성난 목소리로) 있다고 해도 더는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젊은 여자 어머나, 당신은 나와 이야기하는 게 싫어졌군요? 내가 이 방을 어서 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궁금해요. 마음속 깊은 곳에 잠겨있다가 끌어올려 진 감정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이 방을 나와 광야의 사람들을 만나면, 더 생생한 살아있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쾌한 기분이 더 생생한 것처럼 말이죠.

젊은 남자 (문가로 다가가 여자를 배웅하며) 당신에게 충고를 바란 적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요술을 부려 내 마음을 읽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를 바깥으로 끌어내려는 속셈인 것 정도는 알겠소. 나는 이 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으니, 인제 그만 돌아가시죠. 그리고 제발 나갈 때 내 몸을 통과하거나 하지 말아요!

젊은 여자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이 이 매력적인 열린 방을 끝까지 지키길 응원하기 위해 온 것이에요. 요술 같은 건 없어요. 광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모두의 마음속에 있어요. 당신처럼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것이 없지요. 그도 그럴 것이 숨을 곳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무엇도 숨길 마음조차 없는 사람들이에요. 자기 것이라는 게 없으니, 상처받을 자기도 없는 셈이지요.

젊은 남자 (조금 누그러져서) 상처받을 자기가 없다니,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살지요?

젊은 여자 무엇으로 살다니요?

젊은 남자 자기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구요.

젊은 여자 글쎄요… 자기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아서… 나라는 개념도 사라져버렸나 봐요. 이곳에 시간이란 개념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죠. 생각해봐요.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고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아요. 당신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을 일도 없지요. 늙거나 다치지 않으니 자기를 보호하느라 신경 쓸 필요도 없고요… 그런 세상에도 ‘자기’라는 것이 필요할까요?

젊은 남자 이상하군요. 개인성이 없는 사회라니… 광야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가요? 얼마 전에 왔던 사내들은 좀 무례하던걸요.

젊은 여자 물론 아직 자기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요. 당신도, 나도, 어쩌면 그들도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하죠. 그들은 마치… 모두 동일한 사람 같아요.

젊은 남자 그럼 우리처럼… 아니, 나 같은 사람을 당신은… 아니, 그들은 이상하게 여기겠군요.

젊은 여자 저 아래 세상에서였다면 그랬겠죠.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달라요. 누가 무엇을 하건 관심이 없어요. 당신도 이미 알겠지만…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요. (웃음) 당신이 아직도 이 열린 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긴 하죠.

젊은 남자 그게 누구죠? 그가 당신들이 말하는 그분인가요?

젊은 여자 당신은 참 성미가 급하군요. 이곳에서는 좀 더 느긋해질 필요가 있어요. 조만간 그분이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젊은 남자 그가 이 세계를 만든 사람인가요? 이 세계의 관리자인가요?

젊은 여자 (웃음) 이 세계에 그런 절대자는 없어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사람도 없고요.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한 사람 같아요. 여기는… 아직은 이해가 잘 안 되겠죠.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다고 생각하면 돼요… 어쩌면 우리는 정말 구름인지도 몰라요. 아무튼… 그는 당신을 아주 만나고 싶어 해요.

젊은 남자 명확한 얘기는 없고 뜬구름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군요. 도대체 그 사람이 언제 온다는 겁니까?

젊은 여자 이제 가봐야겠군요. 또 보게 될 거예요.


젊은 여자가 문 반대편 벽 뒤로 퇴장




다섯째 날


열린 방 안으로 백발의 노인 등장


백발의 노인 오오… 아직 그대로 있군! 소문대로 대단하군.

젊은 남자 (본체만체) 이번엔 또 누구시오? 방을 구경하러 왔으면 조용히 보고 나가시오.

백발의 노인 허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아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건 자네지! 말해보게나 이 방을 언제쯤 포기할 수 있겠나?

젊은 남자 방을 포기하다니요? 나갈 수도 없는데 어떻게 포기합니까. 방이 나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백발의 노인 자네가 방을 필요로 하는데 어떻게 방이 자네를 포기하나?

젊은 남자 예… 방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 문이 열려있으니… (고개를 돌려 노인을 보며) 있으나 마나 한 셈이로군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으시면 노인께서도 여기 며칠 머무르시지요.

백발의 노인 자네는 방이 왜 필요한가? 이런 곳에서. 밖으로 나가보긴 했나? 아 참, 나갈 수가 없겠군.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이 여길 드나든 것으로 알고 있네. 그들이 이곳에 관해 얘기를 좀 해주던가?

젊은 남자 (다시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예…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무언가 생각난 듯 노인을 바라보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군! 그분!

백발의 노인 (웃음) 나는 그저 광야의 한 노인일 뿐일세. 그 사람에게 볼일이라도 있는가? 여기서는 모두가 그 사람일세. 모든 사람과 동시에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에게 물어보게. 내가 기꺼이 자네가 찾는 그분이 되어주겠네.

젊은 남자 좋소. 그렇다면 먼저,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백발의 노인 지상의 언어를 빌어 얘기하자면, 자네는 지금 대자연의 거대한 영혼의 일부가 된 것일세. 전체의 일부이지만, 전부인 것이나 다름이 없지. 이곳은 자네가 살던 가시적인 세계의 이면이라고 할까… 우리 쪽에서 보면, 자네가 있던 세계가 이면이네만… 말하자면 우리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동력원일세.

젊은 남자 모든 생명… 그렇다면 왜 이곳엔 식물이나 동물은 보이지 않나요? 속세를 살던 내가 생각해도 인간이 대자연을 거느릴 능력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백발의 노인 좋은 질문이오. 인간이 특별한 것은 그 특유의 자의식 때문이라오. 저 세상에서의 자의식이 너무도 또렷했기 때문에 마치 빛의 잔상처럼 이곳에 와서도 자의식이 남아있는 것이라오. 반면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동물과 식물들은 죽음 이후 곧바로 이 거대한 백색의 공간에 스며들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오. 사실 이곳에서 우리 인간들은… 조금 창피한 존재라오.

젊은 남자 그럼 인간들은… 아니 사람의 영혼은 여기서 무얼 합니까.

백발의 노인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네. 우리는 그저 잔상일 뿐이니까.

젊은 남자 노인은 아무래도 나를 여기서 꺼내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감독관 같은 일을 하는 것 아니오? 지난번에 온 여자도 당신을 아는 모양이던데….

백발의 노인 우린 만난 적 없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네. 말하지 않아도… 내가 자네를 이곳에서 꺼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네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그 사람이 나인 것을 첫눈에 알아보았고 말이야. 자네도 이미 이 세계 사람들과 같은 영혼에 속해있다는 것일세.

젊은 남자 그렇다면 왜 나에게만 이런 방이 주어진 거요?

백발의 노인 보통은 이곳에 올라올 때, ‘자기’라는 것을 버리게 되지. 마지막 순간에는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니까 갑자기 너그러워진달까… 아니 어떤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몸을 가진 삶의 끝이 곧 모든 것의 끝이라 믿는 순진한 인간성 덕분에, 다음 생에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 거라 감히 생각하지 못한다네. 내세를 믿는 사람조차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는,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기에 십상이지. 숨이 끊어질 때의 육체적인 고통이 그들의 정신을 마비시켜버린달까. 하지만 자네는 (방 안을 둘러보며) 이런 공간을 가지고 온 것을 보니…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급작스러웠던가 보군. 그게 아니라면… 늘 죽음을 염두에 두었을 게지.

젊은 남자 (자랑스러운 듯)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의 고통이 오히려 저 세상을 살며 느꼈던 정신적인 고통보다 크지 않았죠. 맞아요. 아주 신속하게 모든 것이 끝났죠… (그 순간이 떠오른 듯 눈을 질끈 감는다)

백발의 노인 아무튼 자네처럼 무언가를 이 세계로 가져온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불필요한지를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네. 거대한 성을 가지고 온 자도, 심지어 죄 없는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온 자도 있었지만, 다 무용함을 알고는 이 세계에서 지워버렸다네. 나는 이곳에 도착한 영혼에게 인간 세계의 잔상이 얼마나 불필요한지를 조금 더 일찍 느끼게 해주고 있다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면 편법을 쓰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결정할 문제일세.

젊은 남자 돌아올 수 있는 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백발의 노인 광야로 나와보게나. 그럼 알게 될걸세. 우리에겐 비밀이 없다네. 모두가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네. 자네는 자신을 감추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광야의 사람들은 자네의 마음 속속들이 느끼고 있다네. 자네가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우리에게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네.

젊은 남자 왜 나의 모든 것을 열어 보여줘야만 하죠? 나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요. 누군가의 위로도 필요 없고요. 불행을 느낄 권리도 있지 않나요? 당신들이 느낀다는 그 아픔도 사실 지극히 인간적인 도덕적인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 또한 버려야 할 인간적인 잔상 아닌가요?

백발의 노인 자네도 이미 우리가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네. 우리가 자네를 걱정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는 이미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네. 자네가 괜찮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네를 염려한다는 생각이 자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 자네가 정말 괜찮다 말할 수 있을까? 이 열린 방은 그래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야. 겉모습을 감출 수 있을 뿐, 아무것도 감추지 못해….

젊은 남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실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열린 방에 숨어있건 광야를 떠돌건 어느 한 편에만 영원히 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한 거예요….

백발의 노인 여기에 있으면 저기가 좋아 보이고, 혼자 있으면 함께 있고 싶어지고, 또 함께 있으면 홀로 있고 싶고? 그래서… 여기도 저기도 아닌 곳에 있고 싶다?

젊은 남자 그런 셈이죠.

백발의 노인 참으로 인간적이군! 자네가 이 열린 방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겠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이야. 내가 너무 성급했네. 자네 스스로 이 방을 부수고 나오기를 기대하네….

젊은 남자 그럼 저를 이대로 놔두시겠다는 건가요?

백발의 노인 자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네.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그렇다고 억지로 자네를 이 방에서 끌어내 광야로 내모는 일만큼 위험한 일도 없을 것 같네.

젊은 남자 이제는 저를 범죄자처럼 대하시는군요. 이곳 사람들도 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백발의 노인 내가 말하는 위험이란, 자네에게 닥칠 위험을 말하는 것일세. 저 아래 세계에서 자네에게 벌어졌던 불행한 일이 여기에서도 벌어지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고개를 떨구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며) 내가 너무 많은 얘기를 했군! 혹시라도… 광야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볼 생각은 없나? 열린 방을 그대로 둔 채로 말이지. 자네가 원하면 이 방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걸세. 나갈 수 있도록 조처를 해 두겠네.

젊은 남자 드디어 이 세계의 관리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나갈 수 있게 해주시는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백발의 노인 (웃으며) 자네는 이 방을 나오게 될 걸세! 광야에서 보세!


백발의 노인 퇴장




여섯째 날


광야에서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마주친다


젊은 여자 반가워요! 드디어 나왔군요! 열린 방은 이제 없어진 건가요?

젊은 남자 오… 아니오. 문밖을 나갈 수 있게 해 주신다기에 그렇게 한 것뿐이오. 방은 아직…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린다) 남아있을 거요. 하지만…

젊은 여자 (남자의 시선을 돌려놓으려는 듯 큰소리로 기뻐하며) 그렇군요! 잘됐어요! 마침 오늘 지상에서 초대된 자의 연설이 있을 예정이에요.

젊은 남자 지상에서 초대된 자라뇨? 죽지 않고도 이곳에 들어올 수 있나요?

젊은 여자 물론 불가능한 일이죠. 지상의 인간 중 극히 일부의 현명한 사람들만 이곳으로 초대해요. 물론 죽여서요.

젊은 남자 죽인다고요?

젊은 여자 그럼요! 이곳에 오려면 일단 죽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이미 죽을 운명에 처한 자의 목숨을 잠시 빼앗는 것뿐이니까.

젊은 남자 잠시 빼앗는 거라면…

젊은 여자 맞아요.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다시 돌려보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면, 목숨을 다시 붙여서 돌려보내죠. (남자의 눈치를 살펴보며) 하하!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을 저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낼 일은 없으니.

젊은 남자 그러고 보니, 죽었다 살아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요.

젊은 여자 (웃으며) 인간의 시간으로 약 이천년 전쯤에 한 사람을 돌려보낸 적이 있죠. 물론 그 이후에도 여러 현명한 자들을 돌려보냈지만… (한숨을 쉬며) 요즘 인간들은 어찌나 바쁜지,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거나 태워버리더군요. 무덤 속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여기로 돌아온 자들도 많아요.

젊은 남자 (황당한 표정으로) 이곳으로 초대할 사람은 누가 어떻게 선별하는 거죠?

젊은 여자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죠…. 산 자들 가운데에서 현명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있으면, 모두 함께 그의 한평생을 검토해요. 과연 이곳에 초대할만한 사람인지...

젊은 남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더니… 이곳 사람들도 부지런하군요.

젊은 여자 (남자를 이끌며) 어서 가요!


모여 있는 사람들 곁으로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다가간다


광야인1 오! 당신이로군요!

광야인2 열린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는 그분?

광야인3 지상에서 온 예술가!

광야인4 예술가야말로 진정한 선구자이지!

광야인1 그러고 보니 오늘의 연설은 여기 이분이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광야인1, 2, 3, 4 (웃는다)

젊은 남자 (당황한 표정으로) 열린 방에서 온 사람이 제가 맞습니다만, 그런 선구적인… 수준의 예술가는 아닙니다.

광야인4 아무튼 그… 열린 방을 철거한 것을 축하하오!

젊은 남자 (놀란 눈으로 여자를 쳐다본다)

광야인1, 2, 3 축하해요!

광야인3 그 흉물스러운 방을 볼 때마다 얼마나 지워버리고 싶던지!

젊은 여자 (광야인3을 흘기듯 바라보며) 아직 열린 방은 그대로 있다고 해요….

젊은 남자 (안심한다)

광야인2 하지만 광야로 나온 것만으로도 축하받을 일입니다!

광야인1, 3, 4 그럼요 축하받을 일입니다!

젊은 남자 (어쩔 줄을 몰라 그저 웃는다)

광야인1 그럼 백발의 노인이 방에서 나오는 걸 허락해 준 모양이군…. 그나저나, 그 방은 언제쯤 부술 작정이신가? 그 날을 우리도 함께 축하해 주고 싶네만.

젊은 남자 나에 대해 잘도 알고 있군요.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광야인1 우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 있는 광야인2나 광야인3이나 광야인4나, 다 같은 마음일 거요.

광야인2, 3, 4 모두가 모두의 마음속에!

젊은 남자 당신들은 여기에서…

광야인3 쉿! 지상에서 초대된 자의 연설이 시작됐어!


지상에서 초대된 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다.


지상에서 초대된 자 오와… 오와…

광야인4 이제 올라오고 있군.

지상에서 초대된 자 오오우… 와아우…

광야인1 거의 다 올라왔어.

지상에서 초대된 자 (갑자기 눈을 번쩍 뜬다)

광야인2 이제 깨어났어!

지상에서 초대된 자 (갑자기 일어나 하늘을 향해 팔을 뻗으며) 위대하신… 하느님… 대자연의 정령… 만물의 창조자… (생각이 나지 않는 듯 잠시 멈추더니) 생명의 아버지! 대지의 여신이시여!

광야인1 다 갖다 붙이는구먼. 저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좋을 것을.

광야인2 저들 눈에는 우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이렇게 가까이 모여있는 줄 모르겠지.

광야인3 쉿!

지상에서 초대된 자 여기 당신의 아들이 거룩한 부름을 받고 돌아왔나이다!

광야인4 아니 왜 항상 우리를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는 게지?

광야인1 목소리가 아주 또랑또랑 하네. 역시! 하지만 조금 작은 소리로 얘기하면 좋으련만!

광야인3 쉬잇!

지상에서 초대된 자 당신의 아들이 지상을 떠돌며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왔나이다! 들리시나이까아! 여기에 저와 함께 계신다면 당신의 모습을 제게 보여주시옵소서! 어디 계십니까아아아!

광야인4 역시 인간들은 의심이 많아서 탈이야.

광야인2 자네가 여기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해보게. 온 광야를 헤집고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다들 꿈에서 깨야 한다면서 말이야. 나는 자네가 지상에서 파견한 광인인 줄 알았다니까. 허허.

광야인3 쉿! 쉬이이잇!!

지상에서 초대된 자 (광야인 3쪽을 돌아보며) 아아! 들립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광야인3 (깜짝 놀라 입을 막는다)

광야인1, 2, 4 (광야인 3을 보며 웃는다)

지상에서 초대된 자가 광야인3 쪽으로 다가와 다시 무릎을 꿇는다.

지상에서 초대된 자 … 제가 지상에서 보낸 오십육년이라는 시간은 짧았지만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여전히 인간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이 아닌,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위대한 대자연이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참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고통 속으로, 끊임없는 탐욕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물질에 매몰된 가련한 존재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대한 창조자께서… 아니 대지의 여신께서 지상의 한 인간에게 일러주었던 위대한 깨달음을 기억하십니까? 당신께서 그 선지자의 마음속에 심어놓았던 진실의 씨앗은 이천년이 지나는 동안 뿌리내리고 열매 맺었으나, 사람들은 이제 그 열매가 너무 흔해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저 열매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맛과 향을 즐기기에만 바쁘더이다. 자기 안에 다시 그 씨앗을 심어 열매를 틔워보려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지상의 인간들은… 충분히 타락했습니다.

젊은 남자 (젊은 여자에게) 저 사람이 말하는 선지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군요. 저 사람 얼굴도 낯이 익고요.

젊은 여자 (웃음) 굉장히 안타까운 얘기인데… 왠지 웃음이 나는군요. 이천 년 전 선지자와는 확실히 말투가 다르군요. 우리도 정말 어색해요.

지상에서 초대된 자 … 지상의 인류가 가진 문제는 역시나 그들의 육체였습니다! 나보다 앞선 선지자께서 말씀하셨듯… 그들에게 시급한 문제는 바로!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몸을 초월하는 것이었음을! 재차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습니다! (박수 소리를 기대했다는 듯 텅 빈 광야를 둘러보고는) 이제 더는 인간이 육체의 제약을 느끼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틀림없이 계신, 위대하신 대자연의 영혼처럼! 모두가 모두의 마음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마음먹은 대로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수억 명의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듣고 나누게 된 것입니다! 지상으로 자라난 식물이 그러하듯, 인간도 이제 자원을 낭비하며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대자연이 창조한 위대한 생명체인 식물들처럼, 그들도 이제 기술의 힘을 빌려 정주하는 생명체로 거듭난 것입니다!

광야인1, 2, 3, 4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폭소한다)


지상에서 초대된 자의 연설이 계속되고 광야의 군중들은 하나둘 흩어진다.


젊은 남자 왜 끝까지 듣지 않고 돌아가는 거죠?

젊은 여자 당신도 들었잖아요.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고 초대한 자가 기대 이하의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다들 실망해서 돌아가는 것이죠.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기술의 힘을 빌리겠다는 건, 인간을 다시금 물질에 구속시키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잖아요. 차라리 육체에만 갇혀있는 편이 낫죠. 지금 인류는 이미 너무 많은 물질에 기대고 있어요.

젊은 남자 흥미롭군요.

젊은 여자 무엇이?

젊은 남자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당신들… 아니, 우리는… 인류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세계에 있으니까요.

젊은 여자 (웃음)

젊은 남자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젊은 여자 (굳은 표정으로) 당신은 돌아갈 수 없어요.

젊은 남자 (놀란 표정으로) 무슨 말이죠? 분명 그분은 열린 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어요!

젊은 여자 물론 그러셨죠. 당신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하지만 당신이 그 방을 나올 때 그 방은 사라졌다는군요.

젊은 남자 사라지다니요! 약속과 달라요! 천상의 사람들조차 기만할 줄 아는군요?

젊은 여자 여보세요. 아무도 당신을 속이지 않아요. 속일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에요. 당신이 방을 나설 때, 이 방에 남아 있어 봤자 아무 소용없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시를 들어 줄 그 누구도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고 그랬잖아요.

젊은 남자 (체념한 듯) 잘 알고 있군요. 네, 그랬겠죠.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방을 나올 때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나 보죠.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은 아무 소용 없었을 테고요.

젊은 여자 방을 잃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요.

젊은 남자 영원히… 광야를 떠돌며 사는 삶이 무슨 의미인가요?

젊은 여자 삶의 의미라는 건… 지상에 잠시 머물 뿐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장치일 뿐이에요. 그들은 주어진 수명보다 지나치게 더 오래 살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들은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지나치게 안전한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런 인간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삶의 의미라는 걸 고안해 낸 것이죠. 지상에서 당신이 하던 일이 예술이라 했나요? 보세요… 그저 서로 조금씩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 온 인생을 바치는 예술이라는 것이… 당신이 이곳에서 내려다보기에도 그토록 의미 있는 일처럼 보이나요?

젊은 남자 예술작품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게 얘기하더군요.

젊은 여자 (웃음) 적어도 예전의 인간들은… 자연을 찬미할 줄 알았어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묘사해내는 데에 전력을 다했죠. 우리가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이나 물빛을 포착하고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들을 우리는 좋아했어요. 저 아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내는 예술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우리도 존경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인간은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놓고 예술작품이라 추켜세우더군요. 틀림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마치 뭔가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뭉개버린다거나 하면서…. 우리가 말하길 지극히 인간적인 쓰레기를 만들어 세워놓고는 서로 칭찬하기 바쁘더군요. 그들은 예술이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올수록 아주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아요. 당신도 그런 예술작품을 만들 생각인가요?

젊은 남자 (미소) 이 세상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다면서요….

젊은 여자 (부끄러운 듯) 맞아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죠. 여기에서는 뭔가를 꼭 이루지 않아도 괜찮아요.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 것은 한정된 삶에서나 의미 있겠죠. 이 세계에서 당신이 무얼 하건 누구도 비난하거나 칭찬하지 않을 거예요.

젊은 남자 하지만, 영원한 시간이라니…

젊은 여자 영원한 시간이 어떤 것인지는… 영원한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될 거예요.

젊은 남자 영원… (갑자기 생각난 듯) 맞아요. 영원에 대한 시를 지은 적이 있어요!

젊은 여자 당신이 영원을 두려워하는 건 사실, 반복을 두려워하는 것이에요. 아침에 일어나 저녁이 될 때까지 매일 되풀이 되니 두려운 거죠. 하지만 이곳에는 반복되는 게 없어요. 해가 뜨거나 지지 않아요. 계절이 바뀌지 않아요. 주변의 모든 것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있을 거예요. 작은 세계는 계속해서 회전하죠. 더 작은 세계일수록 더 빨리. 하지만 여긴 한계가 없는 거대한 세계예요. 공전도 자전도 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모든 것을 품고 있죠. 모두가

젊은 남자 모두의 마음속에….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젊은 여자 제가 당신을 조금 도와드려도 될까요? (손을 남자의 머리 위로 가져간다)

젊은 남자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다) 마음대로 해요.


엎드려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젊은 남자 나… 이상한 꿈을 꿨어.

젊은 남자의 아내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무른다) 무슨 꿈이었는데? 그냥 잠시 엎드려있는 줄 알았는데 아주 푹 잤네.

젊은 남자 영원한 시간… 글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 이상한 꿈이었어. 당신도 나왔던 것 같아. 열린 방… 그래, 내가 죽어서 어떤 세계에 들어갔는데,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았어. 그곳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어.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다 같은 생김새였던 것 같아.

젊은 남자의 아내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해? 거기가 천국이래?

젊은 남자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꿈에서 깨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젊은 남자의 아내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아니! 어떤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젊은 남자 그런 꿈이 아니야…. 거기는 시간이 없는 곳이라고 했어. 해가 뜨거나 지지도 않고 계절도 없는… 회전하지 않는 세계라고. 아무것도 변하는 것 없으니 권태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 했어.

젊은 남자의 아내 그런 세계라면… 끔찍할 것 같은데? (남자의 배를 쿡 찌르며) 지금의 몸무게 그대로! 영원히! (웃음) 당신은 뭐든지 쉽게 질리잖아.

젊은 남자 그러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계라니.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잠을 자거나 먹을 필요도 없데….

젊은 남자의 아내 어제 당신, 배고파서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잠들어서 그런 꿈 꾼건 가봐! 배고프지? 밥 줄까? 당신은 그래서 그 세상에서 남기로 했어? 영원히?

젊은 남자 아니, 처음엔 나에게 작은 방이 하나 있었어. 문이 없는 방. 안에 있으면 너무 좋고 편안했는데, 그 방 안에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하더라고.

젊은 남자의 아내 그 여자가 나오라고 꼬셨겠지.

젊은 남자 어! 어떻게 알았어?

젊은 남자의 아내 몰랐어? 나도 당신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거?

젊은 남자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대자연의 영혼이라나… 그런 말을 내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니… 웃긴다. 아무튼, 방에 있건 바깥에 있건, 영원한 생이라는 게 끔찍한 건 마찬가지인데 방에 있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영원한 편이 나을 것 같더라고.

젊은 남자의 아내 그래. 그래서 내가 항상 말하잖아. (머리를 마사지하며) 이 고집스러운 생각 주머니에서 좀 빠져나오라고. 만약 다시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당신은 항상 그런 (놀리는 듯한 말투로) 미니멀-한 세계를 좋아했잖아. 여기에서 사람들과 지지고 볶고 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해서 항상 산으로 바다로 나가고 싶어 하는 거 아냐? 대-자연 속으로!

젊은 남자 글쎄… 내가 생각했던 영원과는 다른 영원을 사는 그들의 모습이 정말 편안해 보이긴 했어. 영원히 같은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그런 반복적인 하루가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는 세계라면….

젊은 남자의 아내 오… 뭔가… 그 유명한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네. 그 인공지능이 남자 주인공을 우주 공간 속으로 던져버리는 장면.

젊은 남자 맞아, 멈추지 않고 영원히 날아가 버리는… 우주 공간에 던져진 기분이었어. 생각해 봐, 어쩌면 우리는… 죽는 날이 정해져 있어서 이토록 뭔가 남들에게서 자꾸만 빼앗으려 하고 밟고 일어서려고 애를 쓰는지도 몰라. 자아실현이니 삶의 목표니 하는 것들을 울부짖으면서 말이야.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닌데 말이야.

젊은 남자의 아내 맞아, 사람들이 배가 부른 거지.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 마주 보며) 그래서, 만약 지금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그렇게 할 거야?

젊은 남자 음… 하지만 그런 세계는 너무 따분할 것 같아. 해탈한 사람처럼 마음이야 백지장처럼 하얗고 깨끗해질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 어렵게 뭔가를 이뤄내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도 없을 테고. 어렵게 얻은 것을 잃는 고통도 없겠지. 그건 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하지만…

젊은 남자의 아내 그래서… 돌아갈 거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면?

젊은 남자 그렇다면…

젊은 남자의 아내 그렇다면?

젊은 남자 돌아가 볼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일어선다.


젊은 남자 이런!

젊은 여자 좋아요. 잘했어요.

젊은 남자 이게 무슨 짓이요!

젊은 여자 당신이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아서 꿈을 꾸게 해드렸어요.

젊은 남자 아니! 바로 지금이 꿈속이오! 다시 돌려보내 주시오! (눈을 감고 자신의 따귀를 때린다)

젊은 여자 소용없어요!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당신은 방금 여기에 남기로 했어요. 그러니 이제 받아들이세요.

젊은 남자 아까는 돌아갈 수 없다면서요! 그렇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다 필요 없어요!


젊은 남자가 광야를 가로질러 뛰어간다.

젊은 여자는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반대 방향으로 퇴장한다



일곱째 날


남자는 지상의 시간으로 여러 날을 달려 광야를 벗어나 폐허에 도착한다.


폐허 관리인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젊은 남자 (지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기는 어디인가요. 저 폐허들은...

폐허 관리인 자네처럼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지상의 물건을 지참하고 왔다가 내버린 것들을 폐기하는 곳일세. 얼마 전에 자네가 버린 열린 방도 이곳에 도착했지.

젊은 남자 그것이 어디 있소! 나는 그 방이 필요합니다! 잃어버린 문짝도!

폐허 관리인 (혀를 차며) 미안하지만, 그 문짝은 이미 해체되고 없네. 자네의 물건들은 생각보다 단순한 물질이어서 금방 분해할 수 있었네. 지금은 그래도 수월한 편이라네. 예전에는 지상의 인간들이 온갖 것들을 다 가져왔으니까. 거대한 피라미드를 가져오질 않나, 흙으로 된 수천 명의 인물상을 가지고 오질 않나… (폐허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저기 자네의 열린 방이 있구먼. 저 책상도 아마 자네 것이지?

젊은 남자 오! 맞아요! 나의 책상! 그렇다면 저 책상이라도 주시오!

폐허 관리인 그걸 가지고 뭘 하려고… 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덧붙여서는 안 되네. 해체만 가능하지.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작게 분쇄해서 다시 지상으로 돌려주는 일이지.

젊은 남자 그럼 내 책상은 내가 분해하게 해주시오!

폐허 관리인 그것도 안 되네… 자네 마음속에 이미 책상을 분해해서 만들고 싶은 무언가가 보이는구먼. 창작은 안 되네! 다만…

젊은 남자 다만?

폐허 관리인 창작 비슷한 걸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젊은 남자 그게 무슨 일이든, 나에게 일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 지옥 같은 영원한 평화 속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폐허 관리인 단 하루만 사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하지만 자네가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네.

젊은 남자 저는 노동을 원합니다.

폐허 관리인 거, 참. 성미가 급하구먼. 자네가 할 일이란… 분해한 물질들을 지상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야. 그 물질들을 이곳의 흙과 함께 빚어 거대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덩어리는 자네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네. 어차피 이 세계 바깥으로 던져질 것이니, 어떤 모양이 되건 상관없지. 어차피 지상에 떨어질 때 여러 조각으로 부서질 테니까. 자네가 만든 것이 무엇이든, 지상의 사람들은 볼 수 없겠지. 사라지고 말 것을 만드는 일인데도 괜찮은가? 자네는 예술가라지?

젊은 남자 좋습니다!

폐허 관리인 한번 시작하면 영원히 그만둘 수 없네. 그래도 괜찮은가?

젊은 남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좋습니다!

폐허 관리인 그렇다면, 저기 자네의 열린 방부터 부수도록 하지.


젊은 남자가 자신이 가져왔던 열린 방을 부수기 시작한다.

지상으로 보낼 유성을 빚어낸다.

끝.

사死의 철학

나는 붉은 세계에 살고 있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빨갛게 점멸하는 세계. 눈앞의 붉은 점으로부터 쏘아져 나온 붉은 빛, 그리고 그 붉은 빛에 반사되어 비치는 내 얼굴. 그것이 내가 보는 세계의 전부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붉은 점이 점멸하는 시간을 일 초라 가정했을 때, 구천만 번쯤 깜빡인 거로 보아 약 삼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작정하고 깜빡임을 세어 보기로 한 이후 그 정도이니, 아마 오 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구천만이라는 숫자를 세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만 번의 점멸 이후 약 일 분 여의 암전이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구천 번의 암전을 세었다. 수를 세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어서가 아니다.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이 생명유지장치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빛의 점멸을 세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숫자와 숫자 사이, 빛과 빛 사이 찰나의 시간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밀려와 셈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명유지장치로 들어온 것은 약 이십 년 전 일이다. 인공지능 혁명이 일어나 더는 사람들의 노동이 필요 없는 시대에 이르렀을 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앞으로의 생을 오염된 세계가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살기로 했다. 나의 몸을 영면시킨 곳은 파라사피언스 Para Sapiens 라는 기업-국가였다. 오래전 아시아인종이 모여 살던 곳에 파라사피언스 가상세계의 인공지능서버 ‘코기토 Cogito’가 있었다. 이곳에 몸을 맡긴 이유는, 다른 어떤 가상세계보다도 가장 완벽함에 가깝게 20세기 인류가 살던 풍경을 가상세계 속에 재현해 냈기 때문이다. 멸종한 동물들과 함께 야생의 생을 살 수 있는 가상세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어려서부터 20세기 인간의 삶에 관심이 많았기에 파라사피언스를 택했다.

몸을 네트워크에 연결한 채 영면의 상태로 고정하고 가상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위버퀘어퍼 Überkörper’라 한다. 가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고정된 실체인 몸으로부터 분리하는 일이다. 마음이 몸을 자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하게 몸의 물질대사를 기계가 대신 처리해주면 마음은 몸을 잊게 된다. 생명유지를 위한 영양분은 매시간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어 필요한 양만큼 주입된다. 체내에서 생긴 노폐물이나 바이러스는 나노로봇이 혈관을 돌아다니며 분해한다. 노쇠한 세포들을 일정한 주기로 새로운 세포조직으로 교체되어 노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아, 이론적으로는 인공태양으로 움직이는 이 기계가 멈추지 않는 한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 라고 홍보하는 것을 들었다

가상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뇌’를 전자화하는 과정이다. 시신경에 직접 시각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나, 자신의 기억을 가상세계의 서버와 연결하는 과정이 가장 까다롭고도 중요한 일이다. 정보화된 지각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장치들도 위버퀘어퍼 시스템의 핵심 기능이다. 나에게 벌어진 사고는 아마도 시신경과 연결된 장치에 문제가 생겨서인듯하다. 어느 순간 나는 가상세계를 바라보던 시각을 잃어버렸다. 몸의 다른 감각들은 아직 가상세계의 것들을 느끼고 있지만, 시각정보가 가상세계와 끊어져 버렸다. 흙의 냄새를 맡고 질감을 느끼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볼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다른 감각정보들이 아직 가상세계의 느낌을 전달해 줄 때는 상황이 조금 나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점차 약해지더니 이제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위급 상황에 파라사피언스社의 응급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시각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황당한 일이지만 그밖에 구조를 요청할 방법이 없었다. 가상세계 속에서도 일종의 서비스 센터가 존재하지만, 휴가를 받고 태평양의 한 섬으로 여행을 떠나온 날 벌어진 일이라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양자컴퓨터가 매 순간 수십억 가상인류의 생체정보를 처리하는 가장 안전한 시스템’이라는 광고를 덜컥 믿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접촉 불량으로 보이는 고장을 처리해 줄 사람이 없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살려달라며 생명유지장치 안에서 발버둥을 치고 싶지만, 운동을 위한 근육과 물리적 감각은 이미 퇴화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꼼짝없이 이 생명유지장치 안에 갇힌 채 붉게 빛나는 점멸등만 바라보아야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사실 붉은 점멸등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처음 생명 유지장치 안에 몸을 설치시킨 뒤, 일종의 가상시각을 부트하기 전, 심리적 안정을 위해 점멸하는 것이라고 설명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깜깜한 이 상자 안에 저 붉은색의 LED등 마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진작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수년간 붉은빛의 점멸만을 바라보다 보니 이제는 저 붉은 빛이 내 생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 불이 켜질 때마다 나는 죽음을 다짐한다. 생명유지장치를 스스로 끌 수는 없는 일이기에 몸을 죽이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정신만큼은 나의 의지로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정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뇌를 죽여야 한다. 뇌를 죽이기 위해서는 생명유지장치가 뇌세포의 노화를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노화의 정도는 사고 思考 의 양으로 측정하는 만큼, 사고하지 않는 훈련을 지속해 왔다. 사고를 멈추기 위해 빛의 깜빡임을 몇 년간 세어보기도 했지만, 수학적 사고과정이 세포의 소비로 측정된다는 것을 안 뒤부터는 이제 불빛을 세지도 않는다, 오직 붉은 빛이 켜지는 순간 그 빛과 함께 있고, 빛이 꺼지는 순간 나를 잊는다. 있다는 느낌과, 없다는 느낌, 그 느낌에만 집중한다. 있다와 없다는 의식에만 집중하면 나라는 의식도 잊게 된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영원한 삶 속에서

몸을 초월하고, 정신을 초월하는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사 死 의 철학이다

날개 달린 자의 자유

“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절대 이해하지 못해요!” 그녀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녀의 등 뒤에 달린 커다란 날개가 퍼덕거리는 바람에 사무실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것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그녀 자신도 놀랐는지 시장의 눈치를 보며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줍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그대로 두세요.” 시장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날개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익인翼人 여러분들께서 요구하시는 내용에 대해서는 저희도 충분히 검토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익인 여러분들을 위해 드론 항공 구역을 변경한다거나 익인 전용 비행구역을 설정해달라는 요구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도시의 대다수 시민은 날개가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익인 여러분 역시 일반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계시고요. 익인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비행하실 수 있는 안전한 지역에 집단 이주시설을 마련해드리는 것으로 이번엔 타협을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시장의 말에 그녀의 날개가 다시 한 번 들썩이기 시작한다.

“저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참고 살아왔는지 아십니까? 날개가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저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 온 정신적 스트레스는 또 어찌하고요? 깃털이 다 빠질 정도랍니다. 물론, 시장님은 그 고통을 모르시겠죠. ‘자유비행구역’ 설정은 저희가 애초에 요구했던 가장 핵심적인 사안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시장님도 적극적으로 검토해봐 주시겠다고 하셨고요. 그런데 인제 와서, 날개 달린 저희더러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말씀입니까? 저희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생각하시나 보죠? 저희는 그저 자유롭게 날고 싶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늘에 새까맣게 날아다니는 드론들 때문에 사고로 죽는 저희 나래인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저희가 가진 날개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하긴 예전엔 날개를 펼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지요. 대다수 시민은 날개가 없다고요? 우리는 시민 아닙니까? 소수자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시정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시장님의 일 아닌가요?”

시장은 고개를 숙이고 차분히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녀의 날개가 또다시 펼쳐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익인 여러분들은 그 비행 능력 덕분에 더 많은 배송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드론 배송업체와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위원장님은 지금 자유롭게 비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드론 배송업체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특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전히 자유롭게 비행할 권리에 대한 요구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날개 제거수술을 받는 익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위원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대다수의 익인들은 말입니다….”

“익인이라뇨! ‘익인’이라는 차별적인 용어를 아직도 쓰십니까? 우리도 사람입니다. 시장님과 같은 사람이라고요! 마치 새로운 종을 대하듯 자꾸 익인이라는 용어를 시장님부터 쓰고 계시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녀는 잔뜩 웅크리고 양손으로 감싸듯 자신의 날개를 쓰다듬는다.

“저도 압니다. 나래민으로 순화하기로 한 것을… 아시겠지만 새로운 용어는 정착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나래민이라는 순화용어를 홍보하기 위해 들인 비용은 또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그녀가 낙담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시장은 협상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알겠어요. 그 정도만 하세요. 계속 변명만 늘어놓으시는군요. 아마도 시장님 등에 날개가 생기기 전에는, 절대로 저희를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이 도시에서 날개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거의 노예로 낙인찍히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사람들은 우리를 사람이 아닌 운송수단으로 취급하죠. 처음 보는 동물 대하듯 우리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경멸적인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나래민들이 왜 날개 제거수술을 받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더는 날고 싶지 않아서라고요? 아니에요! 그 차별을 견디다 못해 날개를 잘라내는 것이지요! 우리는 날고 싶어요! 자유롭게! 창밖의 새들처럼 말이죠!”

나래민 대표로 나온 여자는 협상에서 더는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시장실 창문을 열고 날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창문 밖에는 협상 결과를 기다리는 수많은 나래민 대표와, 나래민을 추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렇다면… 날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시장이 창문틀에 선 여자의 등에 대고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했다.

“언제든 날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처럼요. 날 수 있는 사람들이 날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차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부러울 뿐이지요. 운송수단으로 취급하다니요. 그건 당신들이 그 일을 원해서 한 것 아닙니까? 애초에 당신들은 그 일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도시도, 국가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당신들이 이 좁은 새장 같은 도시에 살며, 권리를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날개를 펼치지 못하게 한다고 믿는 것은 당신들이 창조해낸 억압 아닙니까?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당신들은 새처럼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새들처럼 자유로운 마음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 아닙니까?”

시장은 자신의 지위를 떠나, 날개가 없는 한 인간으로서 나직이 따져 물었다. 나래민 대표로 시장실을 방문했던 여자는 창틀에 걸터앉아 가만 그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넓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대로 추락하는가 싶더니 그녀의 키만큼 넓은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시청 앞 광장에 모여있던 수백 명의 익인들이 한꺼번에 날개를 펼치고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무화 無化

전시가 열리는 날이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이 며칠 전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수백 미터나 줄이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거대한 강물이 흘러내려 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유명 작가의 전시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사람이 모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예술 애호가들뿐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끈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전시의 제목은 <Nihilation> 즉, 무화 無化 였다. 전시를 개최한 작가는 평생 온갖 종류의 검은색을 사용해 온 것으로 유명했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했던 전통적인 잉크를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전 세계의 모든 검은색을 수집해 그만의 독특한 검정을 만들어 그림의 재료로 사용했다. 21세기 초 영국의 과학자들이 개발해 상용화한 벤타블랙*을 그림의 주재료로 사용하다가, 노년에는 가시광을 100% 흡수하는 절대검정을 작가 스스로 개발해 내 더욱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 사람들은 그가 표현한 절대 검정을 마주하면 모든 걱정 고민을 그 안에 던져버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 와중에 최근 절대검정보다 더 짙은 검정을 개발해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것도 몇 해 전 암흑물질을 검출해 낸 스위스의 입자 물리 연구소와 공동으로 일을 추진해 왔다고 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작가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저명한 입자물리학자였다. 아니, 최근에는 과학자 이외에 예술가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작가는 입자물리연구소와 함께 암흑물질인 액시온을 상온에서 안정적으로 가둬 둘 수 있는 거대한 중력상쇄장치를 개발에 성공했으며, 일반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 시설을 이곳 스위스 제네바의 입자가속기 위에 설계하게 된 것이다. 이 원통형의 거대한 건물은 전시장이기 이전에 최첨단의 입자물리 실험장치였다.

또 하나 오늘 전시에 수만 명의 관객이 몰린 이유는 어제 있었던 베르니사주 vernissage 행사 때문이다. 저녁 아홉 시에 시작된 베르니사주 행사에는 작가와 함께 전시를 기획한 입자물리연구소의 주요 과학자들과 예술계 인사 스무 명이 초대되었다. 일반적인 전시와는 다르게 국가적인 행사이기도 하여서, 일반인과 미디어의 출입이 통제된 채 진행됐다. 그런데 문제는, 스무 명의 VIP 인사들이 하루가 꼬박 지난 지금까지도 전시장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VIP가 입장한 이후 일반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까지 입구가 통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지시가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들어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일반 전시 관람객 이외에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온 사람들과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사람까지 더해져 관객 수가 수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예고된 입장 시간이 다가오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느라 여기저기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일어나 생긴 여유 공간이 채워지면서 오래 기다렸던 사람들이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가려고 밀치다가 하마터면 앞줄의 사람들이 넘어져 깔릴 뻔한 위험한 상황도 연출되었다. 사람들은 오래 기다린 만큼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들떠 상기되어 있었다. 검은색을 좋아하는 작가의 팬들인 만큼 수만 명의 관객 역시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와 있었다. 원통형의 건물 역시 까만 색이어서 거대한 사원으로 입장하는 신도들이 연상되었다.

드디어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마치 우주 공간처럼 검은 세계가 펼쳐졌다. 안으로부터 아무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겁낼 법도 한 그 공간 속으로 사람들은 용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주일 전부터 기다리던 사람들은 마치 종교시설에 입장하듯 경건한 자세로 입장했다. 아직 줄 중간에 서 있는 관객들은 까치발을 들고 멀리 보이는 검은 원통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였다. 이상한 일이 있다면, 들어가는 사람이 수백 명쯤 되는데도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인지 오로지 전시장에 들어갈 생각 뿐인 듯했다. 자기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지듯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데도 아무 의심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사실, 이 검은 공간에는 전시 제목 그대로 <무無>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가 아니면 들어설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 달 전에 시설이 완공된 후 최초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작가도 거기 없었고, 그를 따라 들어갔던 설계자들도 거기에 없었다. 어제 입장한 VIP 인사들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입장하기 시작한 관객들도 들어서는 그 순간 사라져 버렸다.

이 전시장은 암흑물질을 전시하려는 목적에 맞게 미세한 입자도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두꺼운 초합금으로 지어져 있었다. 암흑물질을 가두고 있는 만큼 그 어떤 빛 입자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는, 절대적으로 단절된 공간이었다. 성간을 여행하는 우주선에 쓰이는 재질로 지어져 지구 위에 고립된 우주를 연출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건물 지하에는 100km에 달하는 입자가속기가 매설되어 있었고, 입자 충돌로 인해 생기는 암흑물질을 정교하게 걸러내어 지상의 전시장으로 공급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건물이 완공되고 얼마간은 설계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암흑물질로 채워지고 있는 칠흑 같은 공간을 보며 작가와 과학자는 흡족해했다. 그러던 중, 누구도 과학적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거대한 질량의 입자들이 암흑물질 속에서 검출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모여 아주 작은 블랙홀이 작은 우주 안에 생성되기 시작했다. 작가와 과학자들은 인간이 절대 탐험할 수 없는 블랙홀을 우연히 구현해 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정도의 블랙홀은 자신들이 지어놓은 최첨단 시설로 충분히 가두고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일반 대중에게 암흑물질이 아닌 블랙홀을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 모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전시 오픈을 하루 앞두고 가장 먼저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누구도 블랙홀의 성장을 멈출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관객들은 거대한 탑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가기 시작했다. 입장을 기다리던 수만의 관객들이 순식간에 검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초합금으로 만들어진 건물도 이미 그 중심부의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너져내리고 있다기보다는 찌그러지고 있었다 이제, 그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주변에 서 있던 나무와 돌, 자동차와 집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제 풍경 전체가 블랙홀의 중심부로 액체처럼 흘러들어 갔다. 빨려 들어가는 모든 물질이 찢어지고 폭발했다. 붉고 푸른 빛을 내며 타다가 마지막에는 검은빛으로 수렴되었다.

조만간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자의 잉크도, 책도, 그리고 책을 들고 있는 당신도 미세한 입자로 분해되어 아주 작은 점으로 빨려들어 갈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생각도, 시간도, 이야기도 모두 무로 화하고 말 것이다.

무명인

한 마을에 젊은 화가가 살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의 소질을 알아본 부모는 그가 미술가의 길을 걷도록 기꺼이 도와주었다. 스무 살이 될 무렵, 근방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술 대학에 입학하여 교수들의 총애를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미래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너는 잘 해낼 거야.’ 라는 주변의 말만 듣고 젊은 화가도 자신의 미래를 낙관하였다.

졸업 후, 젊은 화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격려해 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의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젊은 작가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은 더는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처럼, 그는 아무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안쓰럽게 여긴 스승이 잘 아는 전각 장인을 소개해 줄 테니 가서 전각을 만들어보라 권해주었다. ‘그림에 낙관을 찍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의심하면서도 젊은이는 도장을 만들러 나섰다.

스승이 일러준 주소로 찾아가 보니, 학교 앞에 웬 작은 유리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학교 앞 건널목을 십 년 동안 거의 매일 지나다녔으나, 그런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안 청년은 황당하다는 듯 머뭇거렸다. 거의 매해 가게가 바뀌는 목 좋은 곳에 있는 건물 끝, 아주 작은 전각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철 손잡이가 닳고 닳아 유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문에 달린 창 너머로, 한 대머리 노인이 책상 앞으로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누군가 그렇게 열중해 있는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본 터라, 청년은 노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으레 구경꾼이 창 너머로 보곤 하는지, 노인은 청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젊은 작가는 용기를 내어 유리문을 밀었다. 유리문이 바닥에 솟아 나온 턱에 걸려 쿵 하는 소리를 냈다. 집중하고 있던 노인이 깜짝 놀라며 청년을 쏘아보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문을 당기라고 손짓해 보였다.

젊은 화가는 미안한 표정으로 문을 당겨 노인의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들어서자 노인에겐 충분했던 공간이 갑자기 숨 막힐 듯 좁아 보였다. 직전의 작은 소동에 행여 작업하던 도장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노인은 알은체도 없이 커다란 돋보기를 대고 자신의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도장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노인은 청년을 바라보고 ‘어디, 용건을 말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낙관을 하나 파러 왔습니다. 아는 선생님 소개로…”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책상 주변을 살피더니, 시험 삼아 도장을 찍어보곤 하는 흰 종이를 꺼내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 아직… 어떤 이름으로 만들지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가격이나 한번 알아보려고…”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청년을 쳐다보았다. 생각 없이 찾아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청년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시선을 창밖으로 거두어주었다. 젊은 화가는, 자신의 작품과 어울릴만한 이름이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알고 있던 한자도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노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일어서려는 청년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종이 위에 글자를 적었다.

청년은 노인이 볼펜으로 눌러 쓴 한자를 소리 내어 읽어냈다.

“무 無… 명 名… 인 印…”

노인은 잘 읽었다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그 ‘이름 없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긴장했던 청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자 노인도 활짝 웃어 보였다.

“좋은 이름이네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도장은… 무엇으로 하죠?”

노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잠깐 기다리라는 듯 오른손을 들어 보이고는 왼손으로 책상 아래에서 검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꺼낸 적 없었는지 누렇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노인은 거친 손으로 한번 닦아 내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청년 앞으로 내밀었다. 상자에는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고운 빛깔의 도장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젊은 화가는 마치 완성된 작품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꺼내어 만져 보았다.

짙은 회색에 매끈한 돌처럼 보이는 것은 물소의 뿔로 만든 것이라 적혀 있었다. 검고 매끈한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동물의 뼈라고 하니 왠지 께름칙하여 도로 내려놓았다. 옥으로 된 도장은 왠지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일까 염려되어 건너뛰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도장도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짙은 갈색에 물결치듯 나무 주름이 새겨진 도장이 마음에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벽조목霹棗木이라고 적혀있었으나 어떤 나무인지 청년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눈치챈 듯 노인은 손가락을 들어 청년의 등 뒤를 가리켰다. 젊은 화가는 등 뒤에 무엇이 있나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워낙 좁은 공간이어서 어정쩡하게 일어서서 의자를 앞으로 당겨보았다. 그제야 의자 뒤에 세워져 있던 웬 썩은 나뭇가지가 눈에 보였다. 노인은 나무를 달라며 손짓을 했다. 청년은 나무를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노인은 다시 종이에 적었다.


벼락맞은 대추나무 120


뒤의 숫자가 가격임을 알아챈 청년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청년도 노인처럼 이제 말없이 말하는 법을 배운 듯했다. 나아가 자신이 빈털터리임을 증명하듯 몇 장의 지폐뿐인 지갑을 열어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노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심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들고 있던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서 검지만한 가지를 잘라냈다. 청년은 내심 놀랐지만,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덜컥 도장을 만들어놓고서 돈을 내놓으라며 덤터기를 씌울 사람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노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기계의 전원을 켜더니, 잘라낸 가지 끝을 평평하고 매끈하게 다듬었다. 순식간에 거친 나뭇가지가 제법 도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평평한 면에 이름을 새기려는가 기대하고 있는 청년에게, 노인은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도장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해 하며 빈 도장을 받아든 청년에게 노인은, 자신이 조금 전 써 놓은 글씨를 다시 한 번 가리켜 보였다.

“무… 명… 인…”

청년은 다시금 소리내어 노인이 지어준 이름을 읽었다. 몇 번을 다시 속으로 되뇌더니, 그제야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노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장 파는 노인은 이제 귀찮으니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갑자기 정색하는 노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청년은 성의를 표하려고 지갑을 뒤적거렸다. 노인은 그마저도 성가시니 이제 썩 꺼지라는 듯한 표정으로 돌변해 있었다. 젊은 화가는 한 손에 벽조목 도장을 움켜쥐고 도망치듯 도장집을 빠져나왔다.

남자는 그날 이후, 자신의 그림에 ‘무명인’을 새겨 넣었다. 누구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던 그가, 이제는 매년 커다란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절대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도 무명인이 찍힌 그림을 그린 작가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도 작가가 누구인지 딱히 궁금해 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무명 씨가 그렸다는 이유로 더욱 유명해진 젊은 작가의 작품은 당대 가장 유명한 갤러리와, 수집가에 의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녹턴 : 작품번호 제9번

I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다섯 시 반인데도 벌써 날이 어두워서 약속 장소로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에 나탈리가 알려준 대로 대강 오는 방법을 노트에 적어두었지만 급하게 휘갈겨 쓴 터라,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Ledru Rollin 역에 내려 Avenue Ledru Rollin 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될 것을, 반대 방향에서 한참을 헤맸다. 카페 이름은 Le Bistrot du Peintre. 전형적인 파리의 카페처럼, 현관 위에 녹색 필기체의 글씨로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차양 아래로 의자와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노란 전구로 밝혀진 실내도 분위기가 좋아 보였지만, 비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는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오전에는 몽마르뜨를 헤매고 다닌 터라, 의자에 앉을 때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났다.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 나를 흘긋 쳐다본다. 주문을 받으러 온 남자에게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나탈리를 기다렸다. 괜히 보자고 했나 싶을 정도로 몸이 무겁고 피로했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지겨웠다. 그만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직원이 작은 찻잔에 에스프레소를 내 왔다.

내일이면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대체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인지… 연말의 긴 휴가를 외롭게 보내고 싶지 않아 결정한 휴가지가 파리였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 외로움이 조금 덜할 거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의 파리는, 마치 화려한 쇼가 끝나고 난 뒤의 공연장처럼 쓸쓸해 보였다. 도시 전체가 더는 웃거나 떠들 기력이 없어 정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모든 가게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받았다. 커피 한잔에 4.5유로라니! 한 잔을 더 할까 싶어 주머니 속 동전들을 꺼내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급한 성격 탓에, 쓰디쓴 에스프레소는 이미 다 마시고 난 뒤였고 나탈리로부터 조금 늦어질 거라는 연락을 받은 터라,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카페 안쪽에서는 나지막이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쇼팽의 녹턴이었다. 곡 번호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쇼팽을 들으며 비 내리는 거리를 감상하고 있자니, 마음이 더 울적해지는 듯하였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백발의 노인은 코끝에 안경을 걸쳐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손끝으로 책장 위를 빠르게 훑으며 지나갔다. 너무 빨리 읽는 게 아닌가 싶어 자세히 봤더니 판형이 꽤 컸다. 안경 너머로 내가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지 갑자기 커다란 책을 한 손으로 말아 쥐고 얼굴을 가린다. 노란색 표지에는 커다란 고딕체 글씨로 < CHOPIN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더니, 내 앞자리로 달려와 우산을 접어 내려놓는다. 가죽 재킷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내고 젖은 손을 바지에 몇 번 닦아내더니 내 앞으로 손을 쭉 내민다. 나탈리였다. 이메일만 주고받았을 뿐, 이번이 초면이었다. 나탈리는 내 그림에 대한 기사를 자신이 펴내는 잡지에 싣고 싶어 했다. 먼저 이메일로 인터뷰하긴 했지만, 내가 파리에 온 김에 만나자고 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 나도 좋다고 했다. 그녀도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그녀가 멋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모국어일 뿐.

나탈리는 내가 파리에 와서 한 일들에 대해서, 파리의 크리스마스는 어땠는지에 대해, 그리고 내 고향에 관한 얘기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나탈리가 하는 일은 어떤지, 파리 생활은 어떤 지를 물었다. 예상했던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며칠 동안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았던 터라, 평범한 대화에도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는 작은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갑자기 그녀가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라던가, ‘작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고, 또 성심껏 위로해 주었다. 그녀가 ‘다 잘 될 거야’라는 뻔한 위로를 건네는 순간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어쩌면 그 말을 듣고 싶어서 파리까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머릿속으로는 오늘 밤을 그녀와 함께 보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 후회가 들기 시작할 무렵,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다른 약속이 있다며 아쉽지만 일어나야겠다고 했다. 아쉬운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마침 나 역시 피곤하다고, 다음을 기약하자 말했다. 프랑스식 인사를 나누는 것에는 영 서툴러서 그냥 악수만 하고 서둘러 떠나 보냈다.

피곤하기는 하지만 왠지 좀 더 머물고 싶었다. 가게 안에서는 아직도 쇼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님은 나와 건너편의 노신사밖에 없어, 카페 직원들은 앉아서 마감을 준비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곳의 운치를 마음 편히 누릴 수 있으련만, 편안함을 가장하고는 있었으나 왠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빈 찻잔만을 보고 있기가 궁색하여 수첩을 꺼내, 돌아가면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억지스러워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하긴, 비를 피할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다. 카페 안에서 직원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 잔 더 마시겠느냐며 물어오기 전에 계산하고 일어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건너편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이 있는 자리로 가 보았더니 자기 악보를 가리키며 프랑스어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악보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며 눈을 찡그리고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인 듯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모른다고 또박또박 영어로 이야기했지만 막무가내다. 프랑스 사람 특유의 넉살을 떨며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노인의 굵은 손가락이 멈춘 곳에는 아주 작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게다가 악보가 낡아서 글자 부분이 바래 있었다.

s c h e r … z a n d o

그 의미는 모른 채 펜으로 휴지 위에 커다랗게 옮겨 적었다. 늙은 프랑스인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인 양, ‘스케르찬도!’라고 외치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러고는 고맙다며, 합장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두어 번 인사했다. 나는 그저 웃어 보이며,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다시 내 팔을 붙잡고 무언가를 자꾸 설명한다. 커피잔과 내 자리를 번갈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커피값을 내주겠다는 듯했다. 계속해서 사양하자,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카페 직원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직원은 활짝 웃어 보이며, 역시 동양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엉겁결에 낯선 노인에게 커피를 얻어마시게 된 나는 황급히 짐을 챙겨 카페를 빠져 나왔다. 노인은 여전히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

II

오늘 비스트로두빵트흐에는 손님이 없었다. 엠마뉘엘에게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으니, 나를 위해 쇼팽 녹턴 작품 9번을 틀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매일 찾아오는 내 요청을 거절할 리는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면, 내일부터 찾아오지 않을 작정이다. 하긴 내일은 중요한 연주실황 녹음이 있어 이곳에 올 수 없다.

음반사에서 연락이 와서 녹음을 진행하는 게 얼마 만인지, 내 실력을 아직까지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무척 고마운 일이다. 나를 위해 뉴욕에서 녹음할 때 쳐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했던 스테인웨이 피아노를 파리까지 공수해 온다고 하니, 나도 그 노력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게다. 프로듀서가 젊은데도 꼼꼼한 구석이 있어, 피아노 연주에 적합한 장소를 찾느라 지난 일주일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어제는 겨우 섭외한 파리 시내의 한 성당에서 만났는데, 소리가 가장 잘 울리는 곳을 찾아 성당 구석구석을 박수를 치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주를 위한 준비는 끝났다. 이제 연주자인 나만 준비하면 된다. 작품 번호 9번은 너무도 잘 알려진 터라,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조차도 틀린 부분을 쉬이 알아채기 마련이다. 실수할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악보를 들고 나왔다. 카페에는 웬 동양인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신경이 조금 쓰이긴 했지만, 그 역시 쇼팽을 좋아하는지 가만히 음악을 따라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제 9번의 1, 2, 3을 집중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카페 안에서 녹턴 1번 내림 나단조 곡*이 흘러나온다. 가볍고 구슬픈 첫 주제가 끝나고 두 번째 주제를 따라 읽어가는데 건너편 자리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관광객인 듯 한데 이런 동네 카페에 앉아서 무얼 하는 것일까. 동양인 특유의 앳된 얼굴을 가진 청년의 얼굴에는 우수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가끔 무언가 후회하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그것을 잊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내면에 차오른 우수를 직시하듯 비에 젖은 도로 위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호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세어본다. 아마도 커피값을 계산할 돈이 충분한지 확인하는 것일 게다.

2번 내림 마장조†가 시작될 즈음, 밝은 표정의 한 여자가 우산을 받쳐 들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도 어두운 안색을 거두고 밝은 표정으로 여자를 맞이했다. 조만간 추락하게 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는 작은 희망. 그것이 바로 2번 곡의 분위기이다. 그는 이제 완전히 그녀에게 집중해 있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홀로 있는 남자는 자신의 불행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의 불행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덜 나쁜 상황에 안도하고 그것을 행복이라 여긴다. 하지만 보라, 아름다운 여성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희망과 행복을! 청년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축하의 의미로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아주 작은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녹턴 3번, 나장조‡가 흘러나온다. 첫머리의 박자는 알레그레토로 마치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연주해야 한다. 장식음이 많아 처음엔 꿈꾸듯 나른하고 행복한 오후의 정경이 떠오른다. 건너편 남자는 아까의 우울한 기운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밝은 표정으로 여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젊은 남자의 활기찬 태도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이제 곡의 두 번째 주제가 시작된다. 나단조로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마치 단꿈에 빠진 사내를 흔들어 깨우듯 화려한 아르페지오가 온화한 공기를 흩트려 놓는다. 유령처럼 그의 주변을 맴돌며 불안한 마음을 조장한다. 청년은 마치 이 3번 곡을 몸으로 표현하려는 것처럼, 갑자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턱을 괴며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한다. 행복감만으로 가득 채워진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남자에겐 언제나 일치시킬 수 없는 모순된 욕망이 있다. 자신의 세계로 무단으로 침입한 여성을 반가워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러 온 이방인을 대하듯 여자를 밀어낸다. 자신에게 지고지순 사랑을 베푸는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그녀와 함께 정주하며 위로받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만 유독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연인을 내심 무시하면서도, 그녀에게 인정받는 것만이 일생일대 가장 중요한 성취인양 행동한다.

갑자기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남자는 조금 당황한듯한 표정이 되어 엉겁결에 그녀를 떠나보낸다.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뭔가 잘 해결되지 않은 눈치다. 여자가 떠난 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남자는 다시 일어설 힘조차 없어 보인다. 노트를 꺼내어 뭔가 적는가 싶더니, 이내 카페 안 직원들 눈치를 살핀다. 이 사내는 혹시 커피값을 치를 돈이 없는 게 아닌가? 나는 가여운 이 젊은 청년을 구제해주고 싶었다. 그를 통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녹턴 작품 9번에 담긴 감정을 온전히 회상할 수 있었으니, 구제해준다기보다는 사례라 하는 편이 마땅하다.

꾀를 하나 내었다. 낡아빠진 내 악보에서 작은 글자를 보여주고 읽어달라 할 셈이다. 늙어 시력이 나빠진 노인의 독서를 도와준 대가로 커피 값을 대신 내 주겠다면야 달리 사양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3번 내림나단조 두 번째 주제 부분의 스케르찬도 scherzando 라는 글자 부분을 일부러 조금 구겨서 잘 보이지 않게 한 다음, 점잖게 그에게 손짓을 했다.

Kim & Stephanie

Kim

미스터 김은 이곳 자이덴가쎄 Seidengasse 에 사는 몇 안 되는 동양인이었다. 삼 개월 전 그는 독일인, 에바 씨가 임대한 이곳 공동거주 아파트의 작은 방에 들어왔다.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곳은 생활비 부담이 덜한 대신, 인종차별적인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들었다. 그래서 비자를 얻고 나면 꼭 비싼 임대료를 내고서라도 빈 중심의 마리아힐퍼슈트라쎄 Mariahilferstrasse 근처에 살고 싶었다. 김은 전 세계 열네 개의 매장을 거느리고있는 패션디자인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맡고 있었다. 영국에서 경제학 학사를 졸업했지만, 일자리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 한 유럽 내 다른 도시를 찾다가 이곳 오스트리아로 오게 되었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국을 오가야 했던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마땅한 머물 곳이 없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일 년간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이 도시에 정착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한 주소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은행 계좌를 개설할 때 깨달았다. 근처 수퍼막트 Supermarkt 의 직원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비하면 상당히 친절한 편이었다. 회사에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은행 계좌가 있으니 이제 월급을 현찰로 받느라 민망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럭저럭 탄탄한 재정을 유지하고 성장해가는 회사였으므로 스트레스받을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각지에 흩어진 지사의 경영 실적을 보고받고 분석해야 할 때면, 시간대가 다른 탓에 집에까지 일감을 가져와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그렇게 타향에서의 삶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하자, 그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었다. 정착하는 데에 집중하느라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감정들이 하나둘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스터 김은 자연스럽게 주변의 이성들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마리아와 지난 연말 파티 때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이사벨라에게 마음이 끌렸다. 물론 두 여성 다 미모가 출중했다. 하지만 둘 다 남자친구가 있는 눈치였다. 김 씨의 외로움이 더욱 심해진 건, 그해 겨울이었다. 자이덴 거리에 하나둘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커다란 별 모양의 전등이 달렸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방 창문 바로 위에 설치되었다. 그의 방에 인접한 커다란 창문을 열고 나가면 사람 한 명이 설 수 있는 작은 테라스가 있었는데, 그는 그 좁은 공간이 위험하게 느껴져 나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일 밤 그는 창밖의 별을 바라보며 마리아와 이사벨라, 그리고 고국에서 만났던 여자들을 떠올렸다.

도시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다른 유럽 동료들은 긴 휴가를 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회사에서도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 고국에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일찍 예약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여유가 생길수록 자신의 텅 빈 내면이 더 잘 들여다 보이는 법. 그는 매일 밤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자정이 가까워져 올 무렵, 답답한 마음에 테라스로 한 번 나가보려 커튼을 걷었는데, 건너편 건물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공중에 매달린 전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여인의 모습이었다. 체구가 아담했으며 얼굴은 주먹만 한 크기였다. 깊이 팬 푸른 눈과 오뚝하게 솟아오른 코, 코끝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빨갛다 곱슬머리를 뒤로 말아 올린 금발의 여자였다. 추운 날씨 탓에 담배에 불이 잘 붙지 않았는지 라이터 불빛이 수차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춰주었다. 그는 단번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김 씨는 매일 밤 커튼 뒤에 숨어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끔 그녀가 김 씨가 사는 방 창가로 시선을 던질 때면, 들킨 줄 알고 심장이 마비되는 것처럼 꼼짝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훔쳐보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사생활을,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허락한다는 의미는 아닐까?’ 김의 망상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그는 용기를 내어 테라스로 나가보기로 했다. 모두가 고향으로 떠나 텅 비어버린 거리, 외로운 두 사람이 커다란 별 모양의 전등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그런 낭만적인 장면을 그는 매일 밤 그려왔다. 오늘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자정에 가까워져 오자, 건너편 건물의 그녀도 안절부절못하는 듯 보였다. 그는 커튼 뒤에서 오랫동안 망설였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망설이고 또 그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를, 그녀에게 온전히 보여주고 싶었는지 두 시간 동안이나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켰을 때 그는 커튼을 힘차게 걷어 치웠다. 창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오래 사용하지 않아 창문과 문틀 사이가 페인트로 뻑뻑하게 붙어 있었다. 창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건너편 건물의 그녀가 자신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Stephanie

슈테파니는 그라픽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알프스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위해 이곳 빈으로 작년에 이사해왔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 특유의 티 없이 맑은 미소와 소탈한 성격은,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대개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슈테파니는 자신의 이마와 어깨, 그리고 팔뚝에 나 있는 주근깨를 부끄러워했다. 별것 아닌 일에도 너무 쉽게 폭소해버리는 천진한 성격 탓에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자신의 잇몸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괜한 일에도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였다.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늘 시골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리웠다. 심지어는 배설물 냄새가 지독한 목장에서 소 젖을 짜던 일이 그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면, 이내 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이 그리워졌다.

특히 단짝 친구였던 마티나가 그리웠다. 마티나는 크로아티아에서 온 활달한 친구였다. 영상 예술가가 꿈이다 보니, 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진 작품들을 슈테파니에게 보여주었다. 디자이너인 그녀보다도 더 많은 최신의 작가와 작품들을 알고 있어, 함께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었다. 마티나는 학기가 끝나갈 무렵, 어떤 동양인 작가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세계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라고 했다. 슈테파니 역시 마티나 때문에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방학이 끝날 무렵엔 마티나 만큼이나 그의 작업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런 멋진 작업을 하는 사람의 실제 모습은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방학이 끝나자, 그녀는 수소문하여 그 동양인 아티스트가 사는 거리를 알아냈다. 작고 흥미로운 컨템포러리 갤러리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5구역이었다. 그곳에 살면 디자인을 공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지난 학기 때 지내던 방을 정리하여 자이덴가쎄에 방을 얻었다. 한 달에 팔백 유로라고 적힌 계약서를 보고는 잠시 망설였지만, 영감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돈은 아깝지 않을 거라며 자신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집세를 감당하기 위해 근처 커피숍에서 일해야만 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갤러리에는 늘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는 듯 보였지만, 막상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슈테파니는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자신감이 없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무기력증까지 생겨버렸다.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건너편 건물에 사는 그 동양인 아티스트였다. 밤 열한 시에 돌아와서도 그 작가의 작품을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을 놀랍도록 독특한 발상으로 시각화 해내는 그의 능력을 닮고 싶었다. 그녀는 창문 너머를 늘 주시했다. 그가 사는 방에 불빛이 켜지는 날이면 그녀도 밤늦도록 그 불빛에 의지해 무언가에 골몰했다. 그가 사는 건물은 중앙의 창문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테라스처럼 꾸며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사 올 당시에는 당장에라도 그 동양인 작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는 늘 창문에 커튼을 드리운 채 작업했다. 공교롭게도 그 작가가 사는 아래층에도 웬 동양인 남자가 살고 있어서, 창가를 아른거리는 그 개구리처럼 생긴 남자를 한동안 그 멋진 작가로 오해한 적도 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지만, 슈테파니는 고향에 가지 않았다. 방학 동안 어떻게든 그 아티스트와 연락을 해 볼 심산이었다. 창가의 불빛만으로도 전해지는 그의 존재감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지만, 직접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 어쩌면 이미 친구나 다름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거리에는 바이나흐텐 Weihnachten *장식이 달리기 시작했다. 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갔었기에 도시의 화려한 바이나흐텐 장식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창문 바로 앞에 장식이 걸렸다. 그녀는 그것이 좋은 징조라 생각했다. 바이나흐텐을 며칠 앞두고 그녀는 작가의 우편함에 메모를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의 작업을 열렬히 좋아하는 학생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자신이 당신의 앞 건물에 살게 되었으니 이런 우연이 또 어디 있겠느냐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니, 오늘 밤 자정에 테라스로 나와 한 번만 손을 흔들어줄 수 없겠느냐-는 낭만적인 말을 끝으로 메모를 남겼다. 이보다 더 귀여운 요청은 그 어떤 팬으로부터도 받아본 적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무례한 요청은 아니었을까 불안해하며 자정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킨다.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고 건너편 건물을 바라본다. 작가는 약속대로 커튼을 걷고 테라스로 걸어나왔다. 웬일인지 아래층의 개구리 같은 남자도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슈테파니는 오직 그를 향해, 자신이 가진 진짜의 아름다움, 시골 출신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어느 날 아침 변호사 J 씨에게 일어난 일

아침에 눈을 뜬 변호사 J 씨는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다. 두 눈을 질끈 감고 한참은 있어야 할 만큼 머리가 죄어오는 통증을 느꼈다. 전날 과음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가올 대형 재판을 준비하느라 수백 장의 서류를 검토하고 분류해야만 했다. 침대 밖으로 떨어지다시피 기어 나와 우선 냉수를 한 잔 들이켰다. 샤워를 하고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 뭉치들을 탁탁 정리하여 가죽 가방에 챙겨 넣었다. 법원에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의료소송 건에 대한 기일 연기신청서를 찾는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였다. J는 무의식적으로 침대맡에 둔 안경을 찾았다. 하지만 그 안경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안경은 이미 코 위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다시 가방 안의 서류들을 꺼내 하나씩 살펴보았다.

‘공정신고… 자동차… 접수…’

두꺼운 서체로 쓰인 제목을 아무리 읽으려 해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눈이 더 나빠졌나…’

포기하고 책상 위에 보이는 흰색 서류란 서류는 모두 가방에 챙겨 넣고 오피스텔을 나왔다. 기일 연기신청서는 상대 변호사가 제출할 테고 동의만 해주면 되는 일이니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주말부터 작성하던 신체보완감정신청서도 확실히 챙겼는지 확신이 안 섰다. 국내 대형 자동차 제조업체를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신고하는 중요한 서류이기에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건설사 구내식당에 먼저 들렀다. 구내식당이긴 하지만 음식 맛이 괜찮았다. 매주 새로운 식단을 짜서 한두 가지 메뉴를 고를 수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북엇국을 먹을 것인가 제육 덮밥을 먹을 것인가, 돈가스를 먹을 것인가 된장찌개를 먹을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이 그의 하루 중 몇 안 되는 즐거운 순간이었다. 그가 주문할 차례가 되어, 식권을 파는 곳에 붙어있는 메뉴를 살펴보았다.

‘김… 육… 찌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메뉴판 앞에 이마를 들이대고 아무리 읽어보려 해도 당최 읽어낼 수가 없었다.

J 씨를 뒤따르던 사람들이 짜증스러운 듯 헛기침을 해대는 통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둘 중 아무것이나 달라고 했다. 결국, 고른 메뉴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회덮밥이었다. 아직 냉동상태에서 덜 녹아 허연 고무 쪼가리 같은 참치를 대충 씹어 넘기며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황급히 식판을 반납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초복이 가까이 다가온 터라, 아침 아홉 시인데도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지하 식당에서 빠져나온 그는 정신없이 출근하는 인파와 아스 팔트에서 전해져오는 후끈한 열기, 자동차 매연, 건물마다 지저분하게 매달려 있는 전깃줄과 간판들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형형색색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씌어있는 간판들이 호객꾼처럼 다가와 눈앞에 아른거리며 그를 착란케 했다.

‘소공… 치… 의원… 2F… 고기… 금지… Nort..’

하나의 단어를 읽으려 집중하면 다른 간판의 글자들이 경쟁하듯 날아와 해독을 방해했다. J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고 셔츠 안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까막눈이 되어버린 듯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증상을 말하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려 애를 썼지만, ‘난독증’이라는 말을 의식하는 순간 글자들이 상상 속에서마저 뒤죽박죽 자리를 바꿔가며 기억을 방해하는 듯했다. 난독증을 넘어 난상증 難想症 이라 해야 할까. 그는 도망치는 글자들을 붙잡는 심정으로 떠올린 말을 하나씩 힘주어 소리 내 읽었다.

‘나… 난!… 도… 도… 독! ㅈ… 즈 으…. 즈 증!’

그 소리에 놀란 행인들이 그를 지나치며 아래위를 흘기듯 보았다. J는 절망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머릿속에 단어들을 나열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감기약을 사먹고, 허리가 아프면 정형외과에, 이가 아프면 치과에 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난독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는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J는 일단 사무실에 것이 가는 생각 좋겠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눈고감도 찾아 수 갈 있는 길이 갑자기 막막하게 느껴졌다. 사무실을 찾아가는 순서마들저 뒤박죽죽 자리를 바꾸버어려 발음걸을 떼어놓을 수조차 없었다. 그는 마치 고장 난 기처계럼 행인들 사이에 서 멈춰 있었다. 출구로 1번 내려가서… 더플라자 다음 방향 시청 꺾어져… 계단… 해야했다. J는 머속릿이 그의 느꼈다 것을 그는 말았다 하얗게.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