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 in the sky

To talk about the enormous presence in the painting—one even larger than that, and one even greater still—I must first speak of the giant eye that often appeared in my earlier works.

Since childhood, when I walked at night and saw the moon—especially a waning gibbous moon—it always felt like a giant eye in the sky. No matter where I went, it seemed to watch me from the same place, sometimes staring intently, sometimes glaring sharply, and at times gazing at me with sorrowful sympathy. Being aware of this vast gaze made me see myself as a distinct being, objectively observing and reflecting on my existence.

<밤에 / Part of universe>의 부분, 2011

The moment I recognize the moon as an eye, my perspective shifts—I am no longer beneath the sky but outside of it, pressing my face against a hole in its surface, becoming an immense being beyond it all. And the moment I imagine myself in that position, I conceive of yet another presence that observes everything from an even higher vantage point. It is as if, the very instant I perceive something, I feel a sharp separation between myself and the world. Looking at the moon becomes like peering through a spectroscope, splitting myself into multiple versions, each observing the other.

In my daily life, I experience different events and emotions. When I am immersed in those emotions, I am trapped within my singular body, unable to see beyond myself. I am unaware of the vast gaze above me. But the moment I acknowledge that a greater presence is watching me, I shrink into an object of observation—no longer just feeling emotions intensely, but instead imagining them from a distance, like an outsider looking in.

This observer looks at my curled-up self and wonders what emotions might be inside. It imagines sadness with curiosity, finds humor in sorrow, and recalls painful memories even in moments of laughter. Because those emotions do not fully belong to the observer, they can be examined, turned over, and played with. In this way, I have learned how to step outside of my emotions.

The larger version of me can comfort the smaller me, helping it smile again. The even greater version of me can lift up the one just below it. And the greatest version of me of all can help the standing self take another step forward.

<보기 보기 보기 / Example of seeing seeing>의 부분,

그림 속에 등장하는 거대한 존재, 그보다 더 큰 존재, 그보다 더욱더 큰 존재에 대해 얘기하려면, 예전 그림에 등장하곤 했던 거대한 눈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밤 산책을 하다가 마주치는 달, 그중에서도 하현망의 달을 보면 꼭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눈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거대한 눈이 어디를 가든 같은 자리에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매섭게 노려보고, 또 동정하듯 애처롭게 쳐다보기도 합니다. 그 거대한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 나를 하나의 개체로 객관화하여 바라보고 관찰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늘의 달을 눈으로 인식하는 순간, 나는 하늘 바깥으로 빠져나가 하늘의 겉면에 난 구멍에 얼굴을 가져다 댄 거대한 존재로 위상이 바뀌어 버리고, 그런 나 자신을 상상하는 순간 그 모두를 관조하는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게 됩니다. 마치 내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내가 세상으로부터 철컹 분리되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하늘의 달을 쳐다보는 일은 마치 분광기를 통해 내가 여러 존재로 쪼개어지는 환각을 갖게 합니다.

평소의 나는 여러 일을 겪고 그때마다 감정에 처합니다. 감정에 처해 있음은 나라는 단일한 육체에 갇혀있어 나의 외부를 보지 못하는, 바깥에서 나를 보지 못하는, 하늘에 떠 있는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의 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바라보는 거대한 존재를 상정하는 순간, 나는 타자로 쪼그라들고, 실감 나게 감정을 느끼던 존재에서 그 감정을 상상해 봐야만 하는 관찰자로 둔갑하게 됩니다.

관찰자는 조그맣게 웅크려 있는 나를 바라보고, 그 안에 어떤 감정이 있을지 상상해 봅니다. 상상하는 관찰자는 슬픈 감정을 재미있게 여기기도 하고, 웃기는 이야기에서 슬픈 일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 감정이 나의 것이 아니기에 요리조리 살펴보고 가지고 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런 방법으로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나는, 작은 나를 위로해 주고 다시 웃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더 거대한 나는 나의 조금 작은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더욱더 거대한 나는 일어선 나를 나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나와나의나를 / Meme>, 194 x 130.3 cm, 한지에 먹과 아크릴, Ink and acrylic on Hanji. 2024

Current mood

I love that your emotions are always flowing—
from warmth to cold, from vast to narrow,
from heavy darkness to something light and clear.
Drifting, shifting, never still, they feel so free.

I stand beside them, or just outside,
watching as they move with you.
You don’t ask to change their course
or stop them—only to be seen.
So I stay, and I watch.

My emotions gather like scattered puddles.
One wrong step, and I’m drenched,
soaking in feelings I don’t know where to send.
Left untouched, they pool, waiting.

But watching you, I start to wonder—
what if I let mine flow too?
Little by little, I release them,
letting them drift toward where you are.

<기분의 강 Current mood>, 91.0 x 116.8 cm, Ink and acrylic on paper, 2024

나는 당신의 기분이 늘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좋습니다.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또 검고 어두운 곳에서 맑고 가벼운 곳으로,
늘 어디엔가로 흘러가는 모습이 자유롭게 느껴집니다.

나는 흘러가는 당신의 기분 안에 있거나 바깥에 서서,
당신과 함께 흐르는 기분을 지켜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흐름의 방향을 바꾸거나 혹은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흐름을 같이 바라봐 주는 것임을 알기에,
나도 가만히 바라봅니다.

나의 기분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웅덩이와 같아서,
발을 잘못 디디면 그 기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리곤 합니다.
그 기분들을 어디로 흘려보내야 할지를 몰라서
그 자리에 고이게 만들어버립니다.

나는 당신의 기분이 흐르는 것을 보고
나 역시 그렇게 흘려보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기분이 흘러가는 대로
나의 기분도 조금씩 그곳에 흘려보내 봅니다.

Walking in the mood

If I ask, "How are you feeling these days?" my wife, as if she had been waiting for the question, unravels a detailed story about her emotions that day—where they originated, how they grew, and where they eventually flowed. I then adjust my posture and fully immerse myself in listening to her. As I listen in silence, I feel as though I am stepping into the emotions she describes, walking alongside her. Like the ever-changing weather, sometimes her words send shivers down my spine in astonishment, while at other times, we burst into laughter together. When we pass through certain valleys of emotions, we share in a quiet melancholy, comforting each other. As we wander through these feelings for a while, the murky emotions eventually clear, leaving behind only a transparent, calm state of mind. This is why asking about someone’s feelings is always an exciting and meaningful act—an invitation into their inner world. If someone were to ask me how I’ve been feeling lately, I would also like to guide them, just as my wife does, through the forest of my emotions, the alleys of my moods, the valleys of my thoughts. So, I first turn to myself and ask—what am I feeling these days?

<기분산책 / Walking in the mood>, 91.0 x 116.8 cm, Ink and acrylic on paper, 2024

요즘 기분이 어때? 하고 물으면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그날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그 기분은 어디서 기원하여 어떻게 자라났고 또 어디로 흘러갔는지 상세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나는 그러면 자세를 고쳐 앉고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를 듣는다. 잠자코 듣다 보면 그녀가 묘사하는 기분 속으로 들어가 그녀와 함께 걷고 있는 것만 같다. 마치 매일 달라지는 날씨처럼, 어떨 때에는 소름이 돋을 만큼 놀랍다가 어느 순간엔 깔깔거리며 웃는다. 또 기분의 어떤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울적한 기분이 되어 서로 위로를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기분 속을 걷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탁한 기분은 다 걷히고 투명한 마음의 바탕만이 남는다. 상대의 기분을 묻는 일은 그래서 늘 설레고 또 기대되는 일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요즘 어떤 기분인지 묻는다면, 나도 아내가 그런 것처럼 그 기분의 숲으로, 기분의 골목으로, 기분의 계곡으로 한번 잘 안내해보고 싶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먼저 묻는다. 요즘 나는 어떤 기분인가?

The black sphere

If someone were to ask, "What does this black sphere mean?" I would want to answer, "That’s exactly what it means!" But since that might sound like an arrogant Zen riddle, I usually offer some sort of explanation.

The black sphere in the painting is meant to represent "something that seems to hold significant meaning." If you see someone carefully holding and gazing at an object in their hands, you naturally assume it must be something important. Similarly, I often feel tempted to place these white or black orbs at focal points in my paintings—where the subject’s gaze meets something significant. But, paradoxically, the reason I paint these spheres is that they don’t actually have a grand meaning.

Most things we chase in our daily lives turn out to be insignificant when we look back on them. We might obsess over purchasing an item, agonizing over it for days, only to forget about it when we get distracted by something else. A memory from the past may keep us up at night, tormenting us—until we change our perspective and realize that past events have no real power over our present selves. Future worries that have yet to materialize can make us anxious, even though they cannot harm us in the present. Perhaps, at the core of it all, we just need something to cling to.

That’s what the black sphere represents. It appears important, yet it may not be. It seems to be there, yet it might not be. It is an empty yet full, gleaming object—a seductive symbol within the painting. Perhaps we always need something round, dark, and shiny to pour our desires into, something to grasp onto, something to worry over. The figures in my paintings either retrieve this object of obsession, hide it from view, or point toward it. Through this black sphere, I aim to illustrate the fundamental movements of the mind.

여기 이 검은 구슬은 뭘 의미하는 거예요? 라고 물어보신다면, ‘바로 그걸 의미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너무 건방진 선문답 같아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곤 했다. 그림 속 검은 구슬은 대체로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그려졌다. 옆사람이 손끝에 쥐고 무언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건 중요한 무언가일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림 속 주인공의 시선이 닿는 중요한 지점에 자꾸만 저런 희거나 검은 알맹이를 그려서 넣고 싶은 유혹을 늘 느낀다. 하지만, 특별히 거기에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것이 허탈하지만 그 구체를 그려 넣는 이유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좇는 대부분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경우가 많다. 어떤 물건이 사고 싶어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도 다른 일로 바빠 잊어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물건으로 잊혀 버리기도 한다. 과거의 어떤 기억 때문에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하다가도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해 보면 과거의 그 사건은 현재의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가 없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어떤 가능한 걱정거리도, 당장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데도 우리는 불안에 떨며 그 어떤 점에 집중하고 매달린다. 어쩌면 그렇게 매달릴 무언가가 늘 필요해서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림 속 검은 점은, 그래서 중요해 보이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기에 분명 있는 것 같지만 없을 수도 있다는-, 어떤 공 한 구체로서, 비어 있지만 가득 차 반짝거리는 매력적인 상징으로 그림 속에 등장한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쏟을 무언가 둥글고 검고 반짝이는 갖고 싶은 무언가가, 붙잡고 해결하고 싶은 고민거리가- 유희의 대상으로서 늘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림 속 인물는 그런 집착의 대상을 거두어들이거나, 보지 못하게 가리거나, 혹은 반대로 가리키기도 하고 있다. 그래서 검은 구체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마음의 기초적인 움직임이다.

Complete understanding

What does it mean to achieve complete understanding of someone different from ourselves? And is complete understanding even possible? This question first took root in my mind during a long drive with my wife. She told me about a recent meeting where she had listened to someone talk for nearly five hours. Even during the short time she was telling me this story, I had to stifle several yawns. So I asked, “How did you manage to listen for five whole hours?” She simply replied, “It seemed like she really needed to talk.” As I listened, I could sense how deeply my wife had connected with that person, and how, in turn, she had connected with her. “That must be what complete understanding looks like,” I thought, reflecting on my own impatience when listening to others. It made me wonder: What does it really mean to understand? Could I capture that idea through my art?

Thinking about understanding reminded me of an experience from my early days studying traditional East Asian painting. Back then, I was fascinated by the philosophy my teachers shared, believing deeply in the aesthetics of Eastern art. I remember being in awe of my professor’s orchid paintings—how a few effortless strokes could capture such vibrant energy. “To paint a tree well, you must first become one with it,” he once said. Those words sounded so profound, and I believed them completely. But what did it actually mean to “become one” with a tree? One summer, during a field study at an arboretum, I spent an entire class sitting in front of a tree, trying to merge with it. I repeated to myself, “Become one with the tree,” but all I did was doze off and absentmindedly sketch people instead. Looking back, I ask myself: What does it take to completely understand something different from myself? Would studying the tree’s anatomy, its chemical composition, and its growth process lead to understanding? Or should I record every stage of its life—its changing leaves, its roots stretching through the soil, its quiet transformation?

But then I return to my wife’s story. She didn’t achieve complete understanding of the person by categorizing them, asking about their background, age, financial situation, or where they lived. She simply listened. And through listening, she understood—as if she had lived their life herself. Yes, to understand, we must know how to wait. To understand a tree, it is not enough to know its name. We must spend seasons with it, hear its rustling leaves, feel its response to the wind and rain, and witness its blossoms and falling petals. To do this, we must wait. We must resist the urge to speak, to interrupt, to prioritize our own thoughts. If a tree is about to bloom, we must be willing to set aside our own concerns and simply watch. Ah, now I understand a little better. To achieve complete understanding of another, we must be willing to wait. We must listen with patience. And to listen, we must be able to set ourselves aside—even if just for a moment.


이해한다는 것은

낯선 다른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나아가 완전한 이해라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처음 이 질문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내와 장거리 드라이브를 떠나다가 나눈 대화 때문이다. 아내가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섯 시간 가까이 들어주고 왔다는 이야기-. 아내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나는 연신 하품을 참아야 했는데 말이다. 다섯시간 동안이나 어떻게 참고 들을 수 있느냐-는 내 질문에, 아내는 ‘그분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이야기를 전해 듣다 보니 아내가 그 상대방에게, 또 상대가 아내에게 얼마나 깊이 동화되어 있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겠구나-.’하고, 타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반성하며, 과연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림으로 그려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이런 일화도 떠올랐다. 이제 막 동양화 전공을 시작한 풋내기 시절, 여러 스승에게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동양 미학에 제법 심취해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저 한두 번 슥슥 올려 치는 획만으로도 기운이 생동하는 것 난蘭 그림을 보며, 우리 교수님은 도인이 아닐까 하던 시절이었다. ‘나무를 잘 그리려면 우선, 나무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 라는 그 말이 어찌나 멋지게 들리던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가 된다는 말인가? 볕이 좋은 어느 초여름, 학우들과 함께 수목원에 사생을 나간 적이 있는데, 수업 시간 내내 나무 앞에 우두커니 앉아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나가 되어보자-‘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꾸벅꾸벅 졸기도 하며 정작 종이에는 사람을 끄적거리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래. 나와 다른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무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했던 것일까? 나무의 모든 부분의 이름을 알고, 나무의 화학적 구성과 에너지 변환 과정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떨까? 나아가 나무의 뿌리와 줄기, 다른 생김새의 잎 모양, 자라나며 변화하는 모든 장면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아니, 다시 아내의 얘기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아내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 분류하고, 그 사람의 출신, 그 사람의 나이, 그 사람의 경제력, 그 사람의 사는 곳을 캐물어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마치 상대의 삶을 살아 본 것처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나무를 이해하기 위해, 나무의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나무의 한 해를 같이 보내며, 나무가 내는 소리, 나무가 겪는 날씨, 나무가 피워내고 흔들리고 떨어지는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참아야 할 것이고, 중간에 내 얘기를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할 것이고, 이제 막 꽃이 피어날 계절이라면- 내 중요한 일 따위는 포기하고 내려놓을 줄 알아야 그의 모든 장면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이제 조금 알겠다.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리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귀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나 자신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Drawing Lines, Samadhi, Understanding

When people first see the faint lines drawn in the background of my artwork, most of them ask, “Where can I buy this kind of patterned paper?” or, after sensing the lines were hand-drawn, they wonder, “Did you use a pencil?” I usually answer, a bit shyly (but almost as if I’ve been waiting for that question), “No, I drew each line with a brush.” Then they often exclaim, “Ah!” or “Oh…” and either express admiration or ask, “Doesn't your wrist hurt?” I appreciate these compliments and concerns; they feel good to hear. But sometimes, I worry that people might think I only focus on that one detail of the labor-intensive process in my work.

If I were asked in an interview, “Why do you create such labor-intensive artwork?” I might answer like this: “Many years ago, I visited the Metropolitan Museum and spent a long time admiring an ancient Egyptian sarcophagus. Thinking of the unknown stone workers who must have spent countless nights carving and polishing that stone, and imagining their hard daily lives, I felt a deep emotion that I couldn’t experience from any modern artwork. That’s when I decided I wanted to infuse that same sense of time into my work.” So for me, drawing lines is a way of recording the time I spend in front of my artwork. Perhaps, like I did in front of that Egyptian sarcophagus, the audience will think of my quiet, meditative drawing time and feel moved by it. But honestly, most of the time spent drawing is a battle with distractions. Of course, there are calm, peaceful moments, and times when inspiration brings a smile or a meditative feeling, but those moments are very brief. Recently, I've started paying more attention to the changes in my mind during the process of drawing and trying to focus on that.

Focusing is like searching for a lost treasure in a lake. Every time you reach for it, your view becomes clouded, and you only move farther away from it. It’s similar to trying to focus on a “word” and then struggling to dismiss all the other thoughts that come to mind. But when I simply observe my drifting thoughts without trying to control them, I see them float by, sometimes briefly appearing and then fading away, until, after waiting patiently, something shiny appears out of nowhere. It’s not something I lost, and it wasn’t there before. It’s just a little pebble that has come drifting along, but now, with my clearer mind, it shines like a gem. It’s something that’s only visible when I stop trying to find it, and when I’m not forcing it, it suddenly becomes clear. It’s like the idea that if you try too hard, you won’t get what you want, but if you let go, things will come to you. This is not meant to sound like some philosophical saying from the Tao Te Ching, though.

I think understanding people is similar. If you try too hard to quickly understand someone, you might make the mistake of comparing them to someone else from your past before they even finish speaking, or keep offering “solutions” they didn’t want. But if you simply listen quietly to what they say, the preconceived notions that get in the way of understanding gradually fade away, and you start to see them more clearly. You understand a little more. So, don’t try too hard to understand, but also don’t avoid it altogether.


선 긋기, 삼매, 이해하기

내 그림의 옅은 배경에 그어진 선들을 처음 본 관객들은, 처음엔 대부분 ‘이런 패턴의 종이는 어디에서 살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거나, 손으로 그은 것을 직감한 다음에는, 연필로 그은 선인가요? 하고 묻곤 한다. 그러면 나는 쑥스러운 듯,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아뇨, 붓으로 하나씩 그어서 만든 선이에요.‘ 하고 답한다. 관객은 그제서야 ’아!‘ 혹은 ’아…’ 하며 감탄하거나, ‘손목 안 아프세요?’ 하고 염려 섞인 감상을 들려준다. 그런 감탄과 칭찬과 염려가 고맙고 또 듣기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밖에 내세울 게 없어서 그렇게 그렸다고 느껴질까 봐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아마도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왜 이런 노동집약적 그리기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오래전에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 수천년 전에 만들어 진 이집트 석관을 보고 한참동안 감탄하며 그 앞을 떠나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그 석관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밤을 새며 돌을 깎고 갈고 닦았을 이름 모를 석공을 떠올리면, 그리고 그가 겪었을 하루하루의 고된 일상까지 생각해 보면 그 어떤 현대 작품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을 느낄 수 있어요.’라고 ’그래서 언젠가 나도 내 작품에 그런 시간을 담고 싶었어요.‘하고 말이다. 선 긋기는 그래서 내가 그림 앞에 머문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도 어쩌면 내가 이집트 석관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의 고요한 선 긋기 시간을 떠올리며 그 명상적인 풍경을 상상하며 감동할지 모르지만, 사실 대부분의 그림그리기 시간은 산만함과의 싸움이다. 물론 한적하고 고요한 시간도, 영감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질 만큼 명상적인 시간도 있지만, 그런 시간은 무척 짧다. 최근 들어서야 그런 선 긋기 시간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을 관찰하고, 집중하는 일에 집중해 보고 있다.

집중하는 일은 마치 호수에 빠진 귀중품을 찾는 일처럼, 그것을 찾으려고 휘적일 때마다 시야가 흐려지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만 한다. 집중하고자 하는 화두를 어떤 ’단어‘나 ’문장‘으로 한정하면 그것 이외의 말이 떠오를 때마다 걷어내느라 오히려 집중력이 흐려지는 것과 같달까. 오히려 부유하는 상념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것이 잠시 떠올랐다가 떠내려가고 또 가라앉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잠시 기다리면 어디에선가 반짝 하고 무언가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아니며, 원래 거기 있던 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떠내려 온 어떤 조약돌일 뿐이지만 이제 맑아진 내 마음에 더욱 투명하게 드러나 보석처럼 보이는 것이다. 막상 찾으려고 하면 잘 보이지 않고, 찾으려 하지 않으면 보이는 것. 노력하면 얻지 못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얻게 된다는- 그러니 힘을 빼라는- 도덕경에나 나올 법한 얘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문득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을 ‘빨리’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상대방의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예전 기억 속의 어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와 비슷한 사람으로 규정해 버리거나, 상대가 원치 않았던 ’해법‘을 자꾸만 제시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오히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이해를 방해하는 선입견이 가라앉고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일부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 이해하고자 너무 노력하지도, 노력하지 않으려 하지도 말자.

<완전한 이해 / Mineral wait>, 76 × 145 cm, ink on Hanji, 2024

빛나는 마음 그림에 부치는 글

왜 당신의 마음은 나와 같지 않은가? 당신은 왜 나처럼 괜찮지 않은가? 를 따져묻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당신도 때에 따라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좋을 수도 있는 것 뿐입니다. 날씨가 좋았으면 하는 기대로 집을 나섰는데 비가 온다고 해서 하늘을 탓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의 마음도 날씨처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비가 오면 오랜만에 쳇 베이커나 빌 에반스를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고이 모셔두었던 방수코트를 꺼내입기도 하며 그런대로 기분을 내어보는 것처럼, 상대의 기분이 갑작스레 우울해진다고 당황하며 그것을 재빨리 바꾸려 하기보다 그런 울적한 기분을 같이 나눠보는 편이 현명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기분이든 제각각 다른 빛을 내며, 잘 들여다보면 이해하고 즐길만한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아무런 색도 맛도 나지 않는 평온하기만 한 마음 보다, 조금 덜컹거리고 산만해보여도 자기만의 빛깔을 가진, 빛이 나는 마음을 마주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즐거운 일입니다.

<빛나는 마음 / Shining mind>, 194 x 130 cm, ink and acrylic on Hanji, 2024

그림 속 검은 액체에 대하여

나의 손에서 빠져나와 흘러내리는 저 검은 액체는, 오랜 시간 나에게 고여있다가 넘쳐버린 눈물이고, 불 꺼진 방 안에서 나와 함께 숨죽이고 있던 늙은 어둠이며, 창문을 열면 즉시 우주에 가 닿아버려 파악할 수 없었던 무한한 암흑이며, 모든 살아있던 생명과 음식의 결말이고 죽음이다. 누군가와 나눌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슬픔이자 고독이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의미이자 허무이다. 나는 그런 고독의 질감을 아는 당신에게 그것을 조금 흘려보냅니다.

본래 잉크는 살아있던 존재가 불태워져 남은 그을음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나에게서 나온 이 검고 투명한 감정들이 이전에 얼마나 화락 타올랐었는지를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잉크의 입자들이 생물의 몸에 갇혀 있기 이전에는 멀고 먼 고대의 어떤 별을 이루고 있었던 입자들이었으며, 그 별이 죽음을 맞이해 폭발함으로써 비로소 빠져나온 입자들인 것처럼, 지금 내 마음을 떠나 당신에게 가 닿는 감정들도 멀고 오랜 기억들이 어느 순간 타오르고 폭발하여 연소한 뒤 남아있는, 숙성되어 덤덤해진 감정들입니다.

당신은 아마 나의 이런 감정들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검은 잉크로 나의 마음을 그림에 새겨두고 지금의 당신과 미래의 당신이 알아차려주기를 희망합니다.

<고독의 질감 / Texture of solitude>, 2024

바위되기 그림에 부치는 글

나의 아버지는 고물상을 하셨습니다. 주로 차량에서 나온 폐금속을 분류하여 재활용하는 일이었지만, 다른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업체와 공간을 함께 쓰셨던 터라, 작업장에는 온갖 종류의 낡은 물건들로 가득했지요.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논밭뿐이었던 마곡동 아버지의 일터에 가는 일은 나에게 늘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별 희안한 잡동사니들 속에서 처음 보는 기계 부품과 전자기기들을 뒤적거리는 일이 나에게는 보물찾기처럼 느껴졌으니까요. 작업장 한편에는 오래된 소파들이 산처럼 가득 쌓여 있었는데, 그 소파 미로를 탐험하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이 그곳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동료들과 자장면을 시켜 드시기 시작하면, 나는 몰래 사무실을 빠져나와 소파산 등반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오늘처럼 하늘이 맑은 어느 날, 그 소파산 꼭대기 가장 푹신한 곳에 누워 자라보던 네모나고 높은 하늘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는 듯합니다. 아홉 살 꼬마가 뭘 알겠는가 싶지만, 그때 느꼈던 어떤 해방감이 최초로 느꼈던 자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딘가 잠시 숨어있을 만한 소파산을 찾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저의 형님뻘 되는 남자 관객분들이 이 그림을 유독 좋아해 주셨어요. 때로는 어딘가 나 자신을 숨길 수 있을 만한 작고 아늑한 곳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곳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부동하는 바위가 되는 상상을 해봅니다.

고개숙인 얼굴들에 대하여

”작가님 작품 속 인물들은 왜 늘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처음 받아보았습니다. ’그러게, 왜 그럴까?‘ 처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요. 눈을 감은 것이 아닌걸요. 정말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나요? 어, 그렇네요!” 얼마 전 인터뷰 때에는, 같은 질문을 받고서 문득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화초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화초에는 얼굴이 없잖아요. 어디가 정면인지, 어디를 바라보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 의아하게 느껴져서 쓰기 시작한 짧은 시였습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설프게 대답하고 만 것이 후회되어,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고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어릴 적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었던 저는, 바라봄을 당하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버스를 타면 누군가가, 아니 그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을 거라는 확신에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되는 일도 있었고. 스무 살이 넘어 처음으로 구했던 이태원 공동 작업실에서는 내가 작업실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몇 시간이고 소변을 참는 일도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발표해야 할 때면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며 안으로 쪼그라들고 마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늘 부담스러웠고, 그 누군가가 없는 밀폐된 곳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가상의 관찰자를 끊임없이 상정하고 그 그림자와 싸우고, 논쟁하고, 변명하고, 그로부터 숨기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 속에 그런 외부의 관찰자에 대한 상징이 자주 나오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겁니다. 나를 관찰하는 타인, 그 시선에 움츠러든 나를 관찰하는 나 자신, 또 그 모든 일들을 거시적으로 관찰하는 어떤 존재. 이러한 시선으로부터의 탈주, 바깥의 바깥, 외부의 외부의 외부-와 같은 주제들은 저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습니다. 추후 이런 연속적인 빠져나옴에 대해 또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수줍은 많은 소년이 세계 속에 던져저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실패를 거듭하며 그 안에서 조금씩 자기 존재감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어른이 되어가며 어릴 적의 수줍은 성격은 많이 고쳐나갔습니다만, 여전히 저는 사람들의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저는 얼굴이 없는 것들이 좋습니다. 식물을 바라볼 때, 자연을 바라볼 때 그것에 얼굴이 없어서 비로소 편안히 그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위에도, 나무에도, 산에도, 호수에도 얼굴이 없어 그것을 바라보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불편함이 없어 그제야 나 자신을 세상에 편안히 비추어보거나 흘려보낼 수 있다고 할까요. 긴장하지 않고 바라보기가 가능한 그런 환경에서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밤이 작업하기에 좋고 겨울이 산책하기에 좋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식물과 달리 사람의 얼굴은,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구멍과도 같아서,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마치 블랙홀 속으로 정보들이 빨려 들어가듯, 하고 있던 말도 잊어버리게 되고 또 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기곤 합니다.

얘기가 길었습니다만, 저는 그래서 그림 속 인물들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마치 자연처럼 자기 자신에게 골똘하고, 자신의 사유에 몰두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몰입해 있는 존재는 아름답고, 그들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설 때, 골똘히 자신의 일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싱긋 미소가 지어지는 것처럼 그림 속 저의 인물들도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을 잊을 만큼 자기 자신에게 빠져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림 속 인물의 삼매경에 조금은 질투의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치-‘하고 고개를 돌려 이제 자기 내면의 일에 빠져들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로 가득 차서 전시장을 빠져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관객분들께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일 겁니다.

인인인연 작품에 부치는 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당신을 먼저 기쁘게 해야 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되었습니다. 당신의 기쁨은 나에게 이어져 나로 인해 또 다른 이를 기쁘게 만들 것이기에, 이것은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의 연쇄, 감정의 연대, 인연의 연속이 나를 더 굳건하게 만들고, 또 나를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혼자라면 그저 놓아버리고 내버려두고 또 쉬이 빠져나가 숨어들기 십상입니다만, 함께여서 당신을 꼭 붙들고, 당신을 일으켜 세우고, 마음놓고 당신에게 안길 수 있습니다.

<인인인연 / Endless emotion>, 91 x 116.8 cm, Ink and acrylic on Hanji, 2024

붓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번에 전시된 작품의 필선 거의 대부분을 이 붓으로 그은 것이다. 종각 송지방에 갔다가 오리나무 열매 한 봉지를 사고 문득 집어 온 붓. 고려 산마면상필山馬面相筆이다. 면상필이라는 명칭은 아마도 인물의 면상面相을 그릴 때 세밀한 선을 긋기에 적합하다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세필이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황모黃毛(족제비의 꼬리털)로 맨 붓이 가장 좋다고들 하는데, 어딘가에서는 그냥 누런 짐승 털이면 인조모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다 황모라 하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이 붓의 털은 중국 북부 산양의 털로 맨 붓이라고 한다.

그림을 시작할 때, 나는 보통 접시 위에 여러 종류의 세필들을 늘어놓고는 한 번씩 그어본 다음 마음에 드는 붓이 나타나면 끝까지 그 붓을 사용하는 편이다. 서예 붓도 그 용도에 따라, 서체에 따라 다른 붓을 골라야 하듯, 나의 경우 반복적으로 균일한 선을 만들어내야 하기에 그에 맞는 붓을 골라잡는다. 붓은 털의 종류에 따라, 인조모가 섞인 비율에 따라 성질이 조금씩 다르다. 탄력이 좋은 털은 붓끝이 쉽게 모이고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얇고 세밀한 묘사에 유리하지만, 한 번에 물을 머금을 수 있는 양이 적다. 그 말은 먹물을 한 번 머금고 그을 수 있는 선이 많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자주 먹물을 묻히다 보면 농도가 미세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반면 물을 많이 머금을 수 있는 털로 맨 붓은, 조금 더 많은 선을 그을 수 있지만 복원력이 다소 떨어져 계속해서 붓끝을 정돈해야만 한다. 또한 물을 오래 머금고 있는 만큼 처음 선을 그을 때의 농도와 물이 다 할 때의 먹의 농도가 미세하게 달라진다. 그래서 꼭 탄성이 좋은 붓이 좋다거나, 물을 많이 머금을 수 있는 붓이 좋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림에 필요한 기법과 그 목적에 맞는 붓이 가장 좋은 붓인 것이다.

열 네점의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가장 큰 수고를 해 준,
붓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찰랑 / Our mind rippled and sparkled> 전시에 부치는 글

외로운 나의 마음은 흐르지 못하고 내 안에 고립된 채 가라앉아 즙처럼 검은 빛을 띄고 있습니다. 검지만 맑고 투명한 마음의 표면에 고독한 나는 작은 파문을 만들어보고 그에 일그러지는 나를 비추어 보곤 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당신과의 관계가 시작되자, 기분이 한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막혀있던 둑이 터지듯 툭 하고 흘러넘쳐 나의 기분의 일부가 당신에게로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가까워지며 그 기분의 흐름은 더 큰 지류를 형성하고 우리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제 멈추어 가둘 수 없는 하나의 강이 되어 당신을 향해 흐르게 됩니다. 당신의 마음에 가닿은 나의 기분은 당신 마음의 토양을 적시기 시작하고, 점점 모여 당신의 내부에 작은 감정의 저수지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마음속에 상방으로부터 기원한 감정의 담수를 갖게 됩니다. 내 안에 고인 당신의 감정들은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 같지만 기이하게도 당신의 기분에 동조되어 움직입니다. 때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양의 무시무시한 파도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높이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며 시원한 분수를 뿜어내기도 합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펄펄 끓어 넘쳐 나의 감정을 데이게도 하고, 차갑게 얼어붙어 뿜어내는 냉기로 모두를 서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기원하지 않은, 예기치 못한 이 기분의 출렁임이 평온한 나를 흔들어 당황케 하기도 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나의 감정을 당신의 뜨거운 마음에 동조된 기분이 녹여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각자가 서로의 마음에 어떤 동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서로의 화를 조장하기도 하고 또 서로의 기쁨을 돋우기도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나와 당신의 기분의 일부가 이토록 서로 동조될 수 있는지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늘 어떤 식으로든 늘 연결되어 있으며, 당신으로 인해 나의 마음이 비로소 흐르고 맑게 희석되어 찰랑찰랑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물에 반쯤 잠긴 인물상에 부치는 글

그림 속에 물 표현이 등장할 때가 종종 있다. 주로 어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힘과 흐름을 표현할 때 물을 표현한다. 물속에 잠긴다는 것은 공기 중에 있는 것과는 달리 온몸 구석구석 그것과 맞닿아 있어 도저히 분리해 낼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접촉이다. 피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어 불가항력인 물은 그래서 나에게 공포였다. 나에게 다가오는 일들이 나를 곤경에 빠트려 힘들게만 한다고 느낄 때, 나의 삶을 그런 비극적 숙명으로 받아들일 때, 불길하고 도도한 운명을 상징하는 장치로 물을 표현하였다. 어쩌면 어릴 적에 부모님과 계곡에 물놀이를 갔다가 혼자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갈 뻔한 적이 있어서, 발이 땅에 닿지 않았던 그 두려운 기억이, 물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물속에서 온몸에 힘을 빼면 자연스럽게 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것이 무척 평온하고 안전하다는 느낌마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물은 나에게 두렵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한 이중적인 의미로도 다가온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물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 것과 같이 변화가 있어, 내 삶에 다가오는 일들을 비극적으로만 받아들이기보다, 긴장을 풀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보다 불안을 덜 느끼게 되었다. 내 삶에 다가오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역시 공포스럽기도 하고 편안한 일이기도 하다. 내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낸 인물은 그러한 이중적인 처지를 나타낸다고도 하겠다.

한편 물 속으로, 혹은 검은 표면 아래로 고개를 처박고 있는 도상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내가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세계로의 일탈을 말하는 것이다. 형이하학적이고 논리적인 세계로부터 비이성적이고 비분절적인 세계로의 완전한 연결, 결심, 또는 그것에 의탁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로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이미지와 언어를 보고 듣는 것이 일상적인 지상의 말과 이미지를 향유하는 것보다 더 즐거울 때가 있다. 그런 차이를 보여주고 싶거나, 그런 기분을 표현하고 싶을 때 역시 그림에 물을 가져와 표현하게 되는 것같다.

물은 나에게 있어, 불가항력의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이기도 하고,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저승,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을 마주하며 느끼는 친밀함과 불안이 그림으로 표현된다.

1. <중첩 IV / Superposition IV>, 2023
2. <관수도 I / water-gazing I>, 2023
3. <세계의 이면 / Calm gaze>, 2024
4. <예술가 되기 / Being an artist>, 2017
5. <세례 / Into the black>, 2016
6. <실로 있기 / A way of being>, 2015
7. <여기, 지금 / Between the lines>, 2014
8. <수월관음도 水月觀音圖 / The Moon I See>, 2013
9. <자꾸만 네가 떠올라 / Sinking of you>, 2013
10.<불면의 낮 / Sleepless days>, 2009

겹쳐진 인물상에 붙이는 글

중첩되어 서로를 만나지 못해 지나쳐버리고 마는 이런 이미지들은 2009년 이후 꾸준히 떠올렸던 이미지이다. ‘나’와 ‘당신’의 경계를 분명히 알지 못해 벌어지는 오해와 그로 인한 좌절을 겪으며 떠올랐던 이미지들이다. 오해라는 것이 주로 너무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혹은 너무 뒤늦게 이해하며 생기는 경우가 많아, 공간 안에서 어긋난 위치로 표현되곤 하였다.

마치 작은 카약을 타던 사람이 갑자기 거대한 유조선을 운전해야 하는 조타수가 된 것처럼, ‘나’라는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나는 늘 거추장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장애물을 요리조리 잘 피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나의 끄트머리를 잘 파악하지 못해 늘 겹쳐지고 부딪치고 파괴되어 침몰시키거나 침몰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오해, 그런 뒤뚱거림, 그런 충돌사고는 아마도 애초에 ‘나’ 라는 외곽선이 있는 실체라고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한다. 실체가 없는 추상적 - 애초에 단일한 존재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없는 - 존재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관성으로 시간과 장소를 부여하고 마치 부피와 무게가 있는 물리적 실체로 받아들이다 보니 장애가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와 당신은, 어느 지점을 점유한 채 머물러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몸 바깥으로 자유롭게 넘쳐나거나 드나들며 스치는 바람, 혹은 기운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기온과 기압에 따라 공기가 이동하듯, 뜨겁고 성난 기운과 차갑고 우울한 기운,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서로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는 것뿐, 우리가 믿는 ‘나’라는 것은 스치는 그 기분들에 그저 처하고 지배당한 다음, 그 자리에 남겨지는 자리이고 흔적일 뿐이다. 그저 나에게 머물던 어떤 기운과, 당신에게 있던 어떤 기운이, 나와 당신이라 믿고, 나아가 몸이라는 경계 안에 가두어 ’나‘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Murmures / 미묘美妙> 전시에 부치는 글

나는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나는 당신과 관계를 맺으며 가장 큰 고통을 맛보고 또 가장 큰 기쁨을 맛봅니다. 당신에게 다가가는 일은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것만큼이나 나에겐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막상 당신에게서 벗어나 홀로 있을 때, 내가 겪게 될 따분함과 허무에 비하면 당신 곁에서 당신이 내게 주는 단맛과 쓴맛을 맛보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쉬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 있게 당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당신에게 걸어 들어갈 때, 당신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는 어쩐지 항상 길을 잃고 맙니다. 나로부터 당신으로 이어지는 길 어딘가, 나와 당신의 경계가 희미한 그곳은 무척 신비롭기 때문입니다.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한 그 미묘한 틈새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고 파멸을 발견합니다. 그 사랑과 파멸은 각기 다른 빛을 내며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변화시킵니다. 그렇게 나도 아니고 당신도 아닌 흐릿한 경계에서 헤매다 보면 나는 어느덧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곳에서 내가 좇는 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며 당신의 욕망도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당신의 의지가 포개어져 있는 그곳에서는 ‘나의 것’, ‘당신의 것’은 의미가 잃고 사라져버립니다. 나와 당신이 중첩된 그곳에서 나는 그래서 커다란 공포를 느낌과 동시에 커다란 자유를 느낍니다. 나를 잃어버림으로써 드디어 나는 나의 한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그것이 무한할 것이라 믿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에게 신비를 체험하게 해 주는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먹 이야기

지난 오월, 일본 나라에 위치한 고매원 古梅園 본점에서 구입했던 송연먹 松煙墨 이 두 계절 지나며 거의 다 닳았다. 먹을 구하려고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갈아타고 했으니 내가 가진 먹 중에 가장 비싼 먹이다.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먹의 가격은 아무래도 원재료를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가에 따라 결정된다. 송연먹은 문자 그대로 소나무 송진을 태워 얻어진 그을음을 긁어모아 만든 먹이다. 그을음에 아교를 섞어 반죽을 만들고 수없이 치대어 내부의 공기를 빼낸 뒤, 쉽사리 부러지거나 갈라지지 않도록 오랜 시간 말리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송연먹은 일단 나무 한 그루를 태워 얻을 수 있는 그을음이 워낙 소량이다 보니 값이 제법 나간다. 고매원 본점에서 구입할 때는 이것이 송연 백 퍼센트인지를 몇 번이고 묻고 확인한 뒤 구입해 왔는데, 얼마 전 한국의 한 필방 사장님께 얘기했더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하신다. 백퍼센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다가도 소나무 수십그루가 태워지는 상상을 하고보니, 굳이 백퍼센트가 아니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오히려 화학 원료의 먹물을 쓰는 것이 세상에 이로운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튼 내 검지손가락만 한 이 작은 먹으로, 그동안 못해도 천호쯤 되는 그림은 그린 것 같다. 조약돌처럼 반들거리는 검은 먹이 작품으로 변하고 그 작품을 팔아 월세도 내고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생각하니 어쩌면 믿기 힘든 요술이 일어난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예술가의 삶을 안쓰럽게만 바라보는 먼 친척이 나에게 ‘도대체 뭘 해 먹고 사냐?’고 물으면, 요 작은 검은 돌을 꺼내어 보여주고는 싱긋 웃어 보일까 보다.

가난뱅이 작가 시절에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먹을 벼루에 갈아 원하는 만큼의 먹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 참 사치스럽다고 여겼더랬다. 낮 동안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두어 시간 자투리 시간에 먹을 한번 갈아보겠다고 한참 먹을 갈다 꾸벅꾸벅 졸기도 하였고 다음날 딱딱하게 굳은 벼루를 박박 씻어내며 한숨을 쉬는 일이 다반사, 그 일을 몇 번 반복한 이후로는 먹과 벼루를 상자 안에 고이 넣어두고는 먹물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래도 딴에는 갈아 만든 먹물로 그리지 않는 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는지 화방에 진열된 먹물 중에서도 제일 비싼 먹물을 사곤 했었다.

지금은 내 그림을 구입해주는 고마운 분들이 생기면서 되도록 먹물이 아닌 먹을 직접 갈아서 만든 먹물을 쓰려고 한다. 전시장에서 구입한 그림을 표구하다가 상처가 생겼다고 따로 연락을 주고는 몹시도 미안해하는 컬렉터를 보면서, 또 매 전시마다 새로운 작품을 구입해주고 사용한 재료에 대해 묻는 컬렉터를 만나게되면서, 내가 그린 그림이 어느 순간 나의 것도 컬렉터의 것도 아닌 어떤 공공의 영역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로부터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선택하는 종이와 먹도, 화판의 재질도 이제야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달까.

아무튼 이제 좋은 먹을 써보자- 하고 비행기와 기차를 갈아타며 고매원 본점까지 가져온 먹이라서, 또 이렇게 손톱만큼 작게 먹을 온전히 갈아 본 적은 처음이기도 해서, 기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가 보다. 지금도 여전히 갈아서 만든 먹물과, 공장에서 제조한 먹물이 어떻게 다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다른 것이라면 붓이 머금고 있던 물과 흑연 입자가 종이 위에 떨어져 안착되는 속도가 미세하게 다른 정도일까. 먹의 오묘한 빛깔의 차이라던가, 수명이라던가 하는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그림을 그리기 전 한 시간 만이라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데에 먹을 가는 일만큼 좋은 것이 또 없다. 정성이 한 움큼 더 들어갔으니 그림이 괜히 좋아 보이는 것은 덤이다.

필정筆亭

인사동 동양한지에 가 보면 늘 선반 안쪽 구석에 한두 개씩 먼지를 잔뜩 이고 뒹굴고 있는 이것. 용도가 불분명하여 적당한 이름도 없이 그저 한지죽으로 불리우는 이것. 처음 보았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어느날 작업하다가 말고 이것의 쓰임이 번뜩 생각나 한달음에 가서 사왔다. 아니, 종이 몇 장 샀더니 그냥 가져가라 하신다. 이 종이 뭉치는 붓에 스민 수묵을 살짝 덜어내고 붓 매무새를 가다듬기에 그만인 도구이다. 면 소재의 행주는 금방 쉰내가 나고, 티슈나 화선지를 접어서 만든 종이 뭉치는 또 금새 축축해져서 못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수백 수천 번 붓을 가져다 대도 딱 적당한 만큼의 물만 가져가 주고, 먹은 물은 차곡차곡 제 몸에 담아 감당해 낸다. 잠시 쉴 때 붓을 올려두거나 세워두기도 좋아서 필산의 역할까지 훌륭히 수행한다. 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붓을 슥슥 닦아 낼 때마다 흡족하여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넘치게 쏟아내도 언제든 들어주는, 그러면서도 입이 무거운 사람, 언제든 찾아가 의지하고 싶은 그런 듬직한 사람이다. 장소로 비유하자면 먼 길 떠나는 이가 잠시 머물다 가는 정자와 같은 소담하고 편안한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 한지뭉치를 필정筆亭 이라 부르기로 한다.

<아완 我玩 / Mind collector> 전시에 부치는 글

나의 마음은 강가에서 주어 온 돌 같습니다. 어딘가는 닳고 닳아 반들반들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어느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까슬까슬 만지면 생채기가 날 듯 위험해 보입니다. 나는 그렇게 내 마음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만져보기를 좋아합니다. 돌 표면에 그려진 겹겹의 무늬처럼, 내 마음에도 다채로운 시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돌처럼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마음은 변화하지 않아 안전하지만 오래 보면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는 물을 바라봅니다.

나의 마음은 물 위에 비친 달빛과도 같습니다. 틀림없이 하나인 것에서 출발한 불빛이 출렁이는 물결에 따라 무한하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마치 마음이 변화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무한하게 변화하는 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엇을, 나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은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갖게 합니다. 파도가 바람과 땅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것처럼, 나의 마음도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파도에 깊이 있게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끝없이 변화하는 마음을 바라보는 일은 틀림없이 즐거운 일이지만, 계속해서 흔들리는 것을 관찰하다 보면 또 멀미가 나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래서 나의 마음을 돌처럼 보기도 하고 물처럼 보기도 합니다.

나의 감정을 홀로 바라보는 일이 따분하게 느껴지거나, 어지럽게 느껴질 때, 나는 사려깊은 다른 감상자를 초대합니다. 나와는 다른 미감으로 어둡고 밝은 다양한 마음을 수집해 온 또 다른 마음 수집가, 마음 관찰자를 초대합니다. 그와 함께 내 마음을 바라보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잘 보이는 곳에 그려진 멋진 무늬에 대해 설명할 때에도, 잘 보이지 않는 귀퉁이에 난 못생긴 돌기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도, 그 세심한 감상자는 적절하게 칭찬해주고 또 격려해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짝이는 것에 정신이 팔려 풍덩 빠지려 할 때에는 소매를 꽉 붙들어 줄 것이고, 흔들리는 이미지를 쫓다가 한없이 떠내려갈 때에는 길을 잃지 않도록 좌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잊기 위한 그림

나는 잊기 위한 그림을 그립니다. 마음속에 맴도는 생각들, 가슴에 응어리진 감정들, 미래에 대한 걱정과 실체가 없는 망상들을 잊기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실타래처럼 얽힌 생각은 그 자체를 시각화함으로서 마음에서 멀어집니다. 지난 일에 대한 후회, 분노, 죄책감, 억울함 등의 감정들은 그림 속 인물에 투영하여 그대로 타자화된 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듯 마음을 산란케 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 불안, 망상들은 복잡하고 정교한 도상을 따라 그리는 과정에서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저의 그림 그리기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끝없이 부유하고 산란하는 마음을 붙잡고 챙기고 다스리는 일종의 명상입니다. 하여 나의 그림은 동시대 예술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이정표를 제시하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인적인 기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공감과 감동, 비판과 냉소, 영감과 자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런대로 나의 작품이 사적인 기록으로서만이 아닌 유의미한 공공의 작품으로서, 또는 공공의 기록물로서 언급되고 기록되고 재생산되고 보존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