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바라보며, 저 별빛은 지금으로부터 수십억 광년 전에 출발한, 과거의 빛이야- 라고 하면 낭만적이긴 하나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요. 일 광년의 속도와 시간도 체감할 수 없는데 말이죠.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주의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한순간에 목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아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흐르기만 할 뿐 도무지 돌이킬 수없이 빠른 무엇이 아니라 진열장이 놓인 옛날 장식품처럼 꺼내보고 만져볼 수 있는 무엇이라면, 좀 낯선 기분이 들고 맙니다
파문
마음의 수면 위에 단 한 톨의 먼지도 떨구지 않으려는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 그 맑은 호수를 품고 있는 자는 숨 쉴 수 있는 두 개의 구멍만 내놓은 채 지금 그 호수 가운데에 둥둥 떠 있다. 그는 자유를 느낀다. 호수 주변은 운 좋게도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주 자그마한 물결도 일렁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숨을 쉴 수 있다. 무척 평화로워 보이는 이 장면을, 당신은 아주 안정적인 구도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카메라는 적당히 가슴 높이의 시선에서 물에 떠 있는 남자의 전신을 비추고 있으며, 저 멀리 그저 죽 그어놓은 인공의 선처럼 펼쳐진 수평선이 보일 뿐이다. 당신은 어쩌면 지금 이 호수의 소유자, 물 위에 큰대자로 온몸의 긴장을 풀고 누워있는 사람을 부러워할는지도 모른다. 그때 갑자기 어디에선가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수면 위로 떨어진다. 손톱보다 작은 그 돌멩이가 아주 멀리에서 퐁-하며 수면 아래로 떨어진다. 이내 동그랗게 파문이 인다. 호수 위의 남자는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멀리에서도 그의 근육이 수축되고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이 보인다. 카메라가 갑자기 수면 아래로 내려가더니 시꺼먼 바닥을 비춘다. 호수의 중앙은 검게 물들어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다. 호수 위의 남자는 저 멀리에서부터 점점 다가오는 파문을 바라본다. 그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높은 물결인데도 남자는 심장이 곧 멎기라도 할 것처럼 긴장한다. 남자는 생각한다. 누가 돌을 던졌을까. 누가 던졌을까.
불안
가끔 불안이 찾아올 때가 있어. 궂은 날씨가 거짓말처럼 개고 맑은 하늘, 막 땀을 흘리며 달리고 싶어지는 그런 날, 그런 날 유독 세상은 활기에 넘쳐 자기 갈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여. 나는 그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어 마음속 어딘가에서 간질간질 불안이 찾아오는 것이 느껴져. 불안은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 이 세상에 혼자 남겨져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기분. 다가올 내 하루는, 내 한 달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기분. 그런데 있잖아, 생각해 보면, 삶의 의미라는 것이, 의미 있는 삶, 이라는 가치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잖아. 누구도, 어떤 삶이 좋은 삶이고 최고의 삶인지 말해줄 수 없는데, 나는 왜 자꾸만 다른 이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며, 불안해할까. 나는 왜 항상 무엇에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누구도 그렇게 하라 한 적 없는데, 나는 과거의 잘못들에 대해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미래에 다가올 걱정을 끌어다가 미리 염려하고 있단 말이야. 불안을 잊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 보다는 현재에 나 자신을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 감각이. 불안을 잊게 해주는 것 같아. 나를 현재에 머물게 하는 것들.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는 일. (물결, 비, 눈, 흔들리는 나무, 불꽃, )
촉촉하거나 껄끄러운 무언가를 만지는 일.
악기를 연주하는 일.
내 몸의 균형과 움직임을 찾아보는 일.
고독의 정체
홀로 완전함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일까. 사람은 둘이 만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완성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종종 한다. 그 사람들은 인간이 혼자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깨달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환상이 아닐까. 둘이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눈빛만 보아도, 아니 눈빛조차 보이지 않는 먼 거리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개별자로서 느낄 불완전함과 불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개인으로서 불완전성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완전함에 이르렀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완전함에 대한 기준이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 고독을 느끼며,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누군가를 필요로하지 않으며, 그 시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개인으로서 완전함에 이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개별자로서의 완전성은 절대적인 선인가. 누구나 성취해야 할 목표인가?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홀로 있음을 두려워하는 순간, 불안을 느끼고, 외로움을 잊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대가, 소모해야 하는 정신력, 고독을 느끼는 지구상의 인구가 스스로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괜스레 소비하는 에너지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스스로의 고독을 삼키고 견뎌낼 수 있도록 훈련되었다었다면, 그만큼 자원과 에너지가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타인과 위험하게 관계 맺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시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왜 사람들은 고독감을 견디지 못하는가? 고독감은 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가게 하는가. 사람 안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유전적인, 아니면 호르몬의 작용이 있어서,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어떤 정신적인 연대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주 어렸을 때, 어떤 계기에서인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곁에서 죽음을 경험했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다거나, 자살 충동을 느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일기장에 생각들을 정리해 나가다가 그 단어에 이르렀던 것 같다. 전후 맥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자살에 대한 얘기였다. 아마도 텔레비전에서 어떤 연예인의 자살을 다루었던 건 아닐까 싶다. 관객을 염두해 둔 자살은 진정한 자살일 수 없고, 완전한 자살을 위해서는 자신의 자살 사실을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목격자나 관객이 있는 자살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살이 아니라는 것. 왜 그런 생각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는 와중에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혼자 있는 이에게는 관객이 없다. 자신의 삶을 구경하고, 그에 대해 무엇이든 참견해 줄 관객.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관객이 없으면 의미도 없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 바라보고 해독하며 비평이든 칭찬이든 해주어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상대방이 눈앞에 없더라도, 우리는 내면에 수많은 관객을 상정하고 그들에게 의견을 묻고 삶의 결정들을 내린다. 가깝게는 가족에서, 주변 사람들, 국가, 사회적 편견에 자신을 비추어 행동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을듯 하지만, 상상 속의 관객은 대개 책임을 묻는 심판관으로서 역할을 한다. 고독감을 느낄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공감이다.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듣는 이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기만 해도, 혹은 그저 그 얘기를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기만 해도 위로받았다고 느낄 만큼, 고독감을 느끼는 존재는 나약하다. 고독한 존재는 왜 그토록 누군가의 공감을 필요로 할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공감을 표하고 스스로 위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타인을 만나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친구는, 자기 얘기를 잠시 멈추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오 분 정도 참고 들어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친구라 가정해 보자. 친절한 우리 친구는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요즘 무슨 고민 있어?’ 고독한 이가 얼마나 듣고 싶어 했던 질문인가? 고독한 자는 열심히 그동안 자기가 고민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1. ‘그래 맞아 나도 그런 기분 느껴본 적 있어’,
2.’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3. ... 대답 없이 자기 얘기를 한다.
첫 번째 대답의 경우 일견 이해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 고독자는, 자기 기분이 절대 상대방이 느낀 고독과 같을 리 없다고 불신할 것이다. 두 번째 대답의 경우, 일견 위로받는 것 같기도 하지만, 너무 쉬운 대답이므로, 아마 내 얘기를 잘 안 들었을 거라 여기며 실망할 것이다. 세 번째의 경우, 아마 괜히 얘기했다는 생각이 들며, 사람들을 만나 얘기해 봤자 아무 소용 없구나! 하며 허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친구는 정말 세심하고 다정다감하여, 고독자가 얘기한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도 모두 반응하고, 재차 묻고, 확인하고, 작은 부분에도 정성을 들여 공감을 표해줄지도 모른다. 그런 친구가 있다면, 아마도 굉장한 호감을 느끼게 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고, 또 어쩌면 항상 같이 있고 싶다고 여기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을 소유할 수 없고, 타인에게 끝없이 나를 주입할 수 없다. 그 친절한 타인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게되면, 그 친구에게 집착하게 되고 내 얘기를 찰떡같이 들어주는 그 귀가 없으면 나의 삶은 무의미해져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완벽한 공감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주 가끔, 어쩌면 일생에 한두변, 대화 중에 완벽하리만치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혼자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는가? 혼자서도 완전한 기분에 이를 수 있다면, 또 그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렸을 때 내가 반했던 사람은 늘, 자기 자신에게 심취해 있는 사람이었다. 시끄러운 쉬는 시간 교실 안에서 자기 공부에 몰두해 있는 우등생을 볼 때, 수업이 모두 끝나고 빈 농구장에서 홀로 레이업 연습에 몰두해 있는 친구를 볼 때, 도서관에서 무언가 상념에 젖어있다가 다시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여고생을 볼 때,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늘 부럽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또 한편으로는 동물을 볼 때 비슷한 류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모든 것에 무심하며,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에만 몰두 해 있는 듯한 고양이를 볼 때면 늘 그런 느낌이 든다. 어느 강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백조를 보았을 때 에도, 사슴을 보았을 때 에도, 멧돼지를 보았을 때 에도 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리 와’ 하고 아무리 관심을 끌려 해도, 멧돼지를 마주쳤을 때에는 죽은 듯 가만히 서있었지만, 나같은 인간 따위에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유유히 자기 길을 가버리는 동물들을 보면 늘 아름답다고 여긴다. 하다못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우듬지 나무들을 보아도, 그렇게 외부의 자극에 저항하지 않고 흔들려버리고 마는, 무심코 자기 생장을 이어가는 그 생명들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끼고, 그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나는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틀림없이 그들에게 있는 무엇인가가 없다. 무언가 비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물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가끔 한숨을 쉬며 ‘다 부질 없다’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공을 괜히 건드리며 노는 고양이가 ‘에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하며 허무감을 느끼고 있을 지 확신할 수는 없다.
고독감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왜 혼자 있을 때, 혹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조차, 외로움을, 허무함을 느끼는가. 고독감을 받아들이고 그저 나무처럼 가만히 그 무엇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가만히 있을 수 없는가? 하루종일 눈에 밟히는 이런저런 사물들을 바라보며 조금 걷거나 누워서 하루를 보내고 시도 때도 없이 잠드는 고양이처럼 살 수는 없는가? 왜 아무 일 없는 하루 중에도 불안을 느끼고, 연락처를 뒤적이며 통화버튼을 누를지 망설이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어디엔가 내 마음과 같은, 공감을 느낄만한, 재미를 느낄만한 시각적인 자극 거리가 없는지 찾게되는 것인가.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는 날에도 왜 나는 새벽까지 뜬눈으로 잠들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이 고독감의 정체를 알고 싶다.
고독은 무엇일까? 고독감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있던 본래적인 성질의 감정인가? 고독감은 언제 어떻게 나에게 스며드는가? 이런 생각들을 해본다. 고독감과 외로움은 어떻게 다른가? 물론 홀로있는 모든 순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버스를 타고, 운전을 하고, 곧잘 한다. 하지만, 정말 고독감을 느끼는 순간은 잠들기 직전이 아닐까. 해야 할 일과를 마치고, 더 이상 즐길 거리도 찾기 힘들고, 물론 요즈음에는 끝없이 그런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아니 찾아내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무엇을 보고 즐길 지 추천해 주지 않는가, 침대 위에 몸을 누이고 불을 끄면 불면이 시작된다. 비로소 내 마음이, 내 정신이 이 몸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나는 오로지 잠들지 못하는 이 정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 진정으로 불빛이 사라진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뭐 그리 새삼스러운가. 혼자서 나의 하루가,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의 존재가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진짜 고독이 시작된다.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도 생산되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 오늘 하루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로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무언가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일찍 잠들어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지 하는 질문에 이르게 되면,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방안을 서성이고, 창가에 앉아 빈 거리를 바라보고, 잠을 이룰 수 없어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에 이르게 되고마는 것이다.
고독감의 시작은 허무를 깨닫는 순간, 무의미를 느끼는 것.
왜 허무한가? 왜 무의미한가?
왜 삶이 무의미하면 안되는가?
삶에 왜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삶이 원래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고독감이 해결되는가?
고독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떤 조건으로서 부여된 성질이라면, 어쩌면 조금 쉽게 그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태어나기 전,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영혼의 총합의 상태에서, 나라는 몸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대신, 너는 전부로서의 영혼에서 영원히 혼자가 되어야 한다. 라는 주의 내지는 경고를 감수하고 나라는 정신이 몸을 타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불평할 수 없지 않은가?
삶의 신성
신성함이라는 건 무엇일까. 내 삶의 신성은,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 느끼는 신성함과 같을까. 어떤 사람에게서 신성함을 느꼈을 때, 그가 신성함을 보이는 행동을 내가 한다고 하여, 그 신성을 나 역시 획득하게 되는 것일까. 혹은 그 신성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신성하다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신성한 사람은, 신성함을 자랑할 필요도, 신성함 자체를 의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발설해야 하는, 자랑해야 하는 행동은 이미 불완전하고, 또 불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함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보이지 않아야 하고 내색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신성함은 흉내 내서 이룰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와 하나가 된 무엇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성한 사람은 경계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두드러진 경계를 만들어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 그림에서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그런 사건인 것이다. 그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아는 척 말하거나 글을 쓰거나 설명하거나 자랑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경계를 가린다는 표현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경계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 말해야 할까. 경계가 형성되지 않는 사람.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 있는 사람. 표면적인 이유나 변명에 집착하지 않고, 커다란 목적. 자신의 삶에 가장 중대한 목적. 그것 하나에 매몰되어, 그것 이외의 것에는 무반응, 무관심,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에 가장 행복해하는 그런 사람. 껍데기를 벗어버린 사람. 여기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 여기에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사건이 있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궁극적인 행복의 요체가 숨어있다. 아니, 행복은 아니라, 평정일 것. 궁극적인 마음의 평화.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평화. 마음의 평화. 그런 삶. 그런 삶을 이룰 수 있는 규칙들을 세우고, 그런 삶을 이룰 수 있는 습관을 하나씩 들여가면 그것으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창작 형태. 창작 도구. 언제 어느 때건 영감을 얻어 기록할 수 있는 그런 패턴의 삶. 시간과 장소가 허락될 때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영감들을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작가 생활. 그럴 수 있다면, 일을 해도, 달리기를 해도, 어머니와 있어도, 누가 내 시간을 침해해도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런 포맷을 만들어내야 한다.
단초들
#1
비가 오면 마음이 괜히 불안하다. 빨래가 잘 마르지 않을 것이라던가, 빗길에 틀림없이 차가 막힐 것이기 때문이라던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 날은 어쩐지 비가 금방 그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비가 오면 어쩐지 기분이 좋고, 비가 그치면 또 서운한 마음이 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득 행복을 느낄 때, 그것이 차오르는 속도만큼 금새 사라져 버릴 것이 두려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좋은 느낌은, 꼭 그만큼의 잠재적인 불안과 함께 찾아온다.
#2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지 못하면서, 하루 종일 에너지를 소비하는 느낌이 불쾌하다. 좋은 작업을 위한답시고 좋은 책상과 좋은 의자, 좋은 컴퓨터, 좋은 자세를 위한 자세 교정기, 다음날 좋은 작업을 위한 숙면, 숙면을 위해 좋은 침대, 침구류. 그런 것들을 다 갖춰놓고, 갖춰진 그 사물들을 바라보며, 막상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 날은, 잠을 잘 잘 수가 없다. 한편,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왔기에, 나는 의미 있는 무엇을 생산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도대체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작가라는 직업은 이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지만 그 답, 혹은 변명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3
단념해 버리는 관계들. 어떤 이에게 호감이 들다가도, 그 호감의 원천이, 또한 그 호감이 이끄는 결말이 어떤 성적인 욕구의 충족에 있다는 의심이 들면, 이내 마음을 접는다. 어떤 날은, 누군가가 무척 보고 싶다가도,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정신없이 그간의 사적인 일들에 대해 상대방에게 쏟아붇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되면 씁쓸한 기분에 이르게 된다. 또는 대화 중에 상대방이 나의 일상에 대해, 나의 생각과 감정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금세 싫증이 나고 떠나고 싶어진다. 어떤 사람은 그저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라, 너무 생각을 많이 하지 마라고 충고하지만, 감정에 솔직해서 순간적으로 충족되는 행복감보다, 그 감정적인 행동들 때문에 얻게 될 부담이나 책임감에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나의 일상이 망쳐질까 두려운 것이 크다. 그런 면에서 혼자인 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본능적인 외로움은 극복이 되지 않는다. 성적인 충동을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의 또다른 환희는 무엇일까. 외로움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적절한 교우 관계란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유지하는 친구-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4
다시 신을 창조할 수는 없을까. 나는 전적으로 신에 의지한다-라는 기분을 가져본 적 없다. 어떤 신적인 존재를 믿고, 그 환상-세계관에 푹 빠져있는 사람을 볼 때 느껴지는 안정감이라던가, 확신에 찬 얼굴, 그런 것을 본 적이 있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신을 믿어본 적 없고, 믿을 마음도 없는 현대인이 의지할 곳은, 그 의지처는 어디인가. 자기 자신을 믿으라, 네 안에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부처의 말은, 참말인 듯 하나, 자기가 자기를 믿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단 말인가. 늘 이리저리 흔들리는 존재가, 늘 외로움에 벌벌 떠는 인간이, 홀로선 인간이, 어찌 자기 스스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가. 경계 없이, 내가 이 세계에 포함되어, 일부로서 함께 있을 뿐, ‘나’라는 실체는 없다-는 말은 참말인 듯 하지만, 하루 중 과연 몇번이나 그 사실을 스스로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나를 버리면서, 어떻게 신성을, 충만감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신은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말인가.
불안의 정체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좋은 것을 창조해내지 못한다는 불안일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불안일까. 이 불안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이 불안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불안을 있는 그대로, 불안한 상태 그대로를 묘사하고, 어떤 사람은 불안함의 본질에 대해 묘사해 낼 지도 모른다. 불안함의 본질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아무 쓸모 없다는 생각이 불안의 근원인가.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고, 무엇을 하려고 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 상태는 어떤 것인가.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시 시작한다. 이 불안은 일곱살 어린아이같아서 내가 그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에 나, 불안이 있으니, 나에게 집중해라. 너는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 불안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이곳엔 나 혼자 있으니, 이 불안은 나로 인한 것이 틀림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 불안이 타인로부터 묻어은, 타자가 나에게 남겨 놓은 흔적, 그가 나에게 떠넘긴 사생아, 나의 책임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실제하지 않는 관념이 나를 지배한다는 생각이, 그에 내가 복종하고 무기력하게 늘 좌절하고 만다는 사실에 허탈한 기분. 나는 더이상 나의 주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어떤 기분인가. 나는 그런 기분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혹은 사실 아주 어려서부터 이런 상태였는가.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두우면 불을 켜야하고 불을 켜면 꺼야만 하는, 자려고 누우면 잠이 오지 않고, 일어나면 다 그만두고 잠들고싶은 그런 불안, 사람들 곁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혼자있고 싶고, 또 혼자 있을 땐 외로움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것을 원하다가 저것을 원하고, 또 저것을 원치 않다가 이것을 원치 않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또 끊임없이 원치 않는, 사실은, 그러고보니, 내가 그린 첫 그림도 그러하였다. 원하고 원치 않는, 도움을 바라면서 바라지 않는. 그 모순.된 감정. 그렇다면 다시 또 나는 전혀 개선되거나, 나아지거나, 발전하지 않은 것인가. 왜 나는 그대로인가. 왜 나는 이 상태로 돌아오고자 했는가. 어쩌면 처음 그렸던 그 그림을 다시 그려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 불안의 정체는 전혀 새로울 것없는, 익숙한 것. 나는 틀림없이 이 기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오후가 된 것을 알게되면, 진홍빛의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행복한 기분이 들다가, 이내 다시 불안이 찾아온다.
피어있는 풀
글을 써보자, 그림을 그려보자. 가장 덤덤한 그때를 골라서. 아주 기쁘거나 아주 슬프지 않은 그런 기분에 쓰고 그리자. 그렇지 않으면, 특별한 기분에, 짓눌린 채,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거나, 관심을 끌고 싶어 거짓말을 하고 말 것을 잘 안다. 아무 기분도 아닌, 무덤덤한 마음 안에서 아름다운 것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지만, 왜 그 무덤덤함이 표현되어야만 할까. 사람들은 그 꽃 같은, 물 같은, 덤덤한 자연 같은 작품을 위해 돈을 지불한다. 자신에게 말 걸어오지 않고 덤덤하게 피어있는 풀. 길을 걷다 괜히 손을 뻗어 풀 한 꽃 꺾어 기어코 손에 쥐고자 하는 욕심 같은 것일까.
방 안을 환하게 비추던 형광등을 끄고 작은 탁상등을 켝고나면 그제서야 안전한 느낌이 듭니다. 등불 아래에서 멀어진 곳에 들어 찬 어두운 기운 만큼 나 자신이 확장된 느낌이 듭니다.
외로움에는 시리고 시큼한 맛이 있다. 다른 이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따뜻한 전구 빛의 보리차 같은 고소함 미소 짓게 하는 달콤함. 그런 것을 보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무언가가 스치듯 지나간다. 그것이 나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온도인 것처럼, 건전지 플러스 극에 혓바닥을 갖다 댔을 때 느껴지는 찌릿함을 그리고 싶어진다. 사람들에게 온기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차고 시린 맛도 필요한 것 아닐까. 행복은 달콤한 실제여야만 하고, 슬픔은 외로운 작품을 통해 느끼는 그런 것. 영원히 누구도 나를 찾지 않게 되면 어쩌지. 잊혀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그것이 실제적으로 다가올 때 느껴지는 두려움은. 아니,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기분. 수월관음도를 그리던 화공들도, 가을 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작업하다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는 내가 만든 이미지 속에 갇혔다. 그것을 자유라 말하며, 누구도 나를 방해해서는 안된다 경고했으면서, 정작 홀로 있을 때 외로움을 불평한다. 행복을 걷어차고. 나왔으니 불평하지 말아라. 네가 얻은 고요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거기 있도록 하자. 세상 사람들을 엿보지 말자.
기억을 갖게 된 것은, 진화의 자연스러운 발전이고 진화 라는 개념 자체의 본질인듯 하다. 실수로 인해 위험에 처하고 그로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기억이 없다면 종이 유지되기 어려울테니, 가능한 한 오래 생을 유지할 수 있게 위험한 기억은 잘 보존하여 위험으로부터 피하고, 종에 유익한 기억 역시 잘 보존하여 반복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니, 기억의 본질적인 기능은 실수(악)를 저지르지 않고 유익한 일(선)을 더 자주 실천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두고 후회하거나 그리워하는 것은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는 사치고 과잉이다.
苦
모든 고통은, 현재에 머물지 않음으로부터 온다. 그런 면에서 기대나 희망도 일종의 고통이다. 기대는 너무 쉽게 강렬한 욕망으로 변해버리고, 희망은 지금의 행복을 가려버리고 그것을 미래로 유예시킨다. 현재에 머문다는 것은, 백치가 된다는 것. 과거에 얽메이지도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 그래서앉아있거나 움직일 때에, 밥을 먹거나 똥을 쌀 때에도 기쁜 것이다. 바보가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과거나 미래를 잊고 지금 당신이 머문 그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라고 말하면, 마치 천진한 어린이를 바라볼 때 처럼 미소짓고 아- 그렇구나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그것을 훈련하기에는 너무 타락한 것 아닐까. 내가 걸으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스스로 주입할 수 있겠으나, 그 행복은 금방 휘발하고 말 것이다. 불가의 가르침은 마치, 성인의 몸과 마음에, 어린아이의 탈을 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덩치 큰 아기탈을 쓴 어른. 그런 것 아닐까. 하고 냉소적인 생각을 한다.
지구인의 마음
나라 국적 전통 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전지구 시대로 들어섰다. 공시성. 어느 도시에 정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국적을 강조하는 것은 전통에 숨기 위함이다. 결국 국적조 초월한 현재 지구인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한다
아름다움에 대해.
외로움에 대해.
외로움은,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힘인가.
그래서 나는 외롭고자 한 것일까.
견디지도 못하면서.
정말 외롭고 쓸쓸한 그림을 그릴거야.
라고 다짐할 때가 많다.
마치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주제라도 되는 것처럼.
외로워서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다.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렇게 무기력한 기분에 휩싸여 지나가버렸다.
나는 그저 도망치고만 싶다.
외로움은.
고독감은.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그 느낌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티마이오스!
듣고싶은 그림
불안. 말 한마디가 불안을 가져온다.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한마디의 말이 나를 미치게 하고, 나를 혼돈에 빠뜨린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만 싶다. 나를 멈추게 하는, 나를 무너뜨리는 모든 시도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다. 온화하고 밝은 미소, 따뜻한 격려, 위로,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우울한 그림은 이제 그만 그렸으면 좋겠다.'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그러게요. 애초에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먹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보이는 내 마음을 그렸을 뿐. 어쩌면 그래서 그림이 그토록 싫어졌던 건 아닐까. 위로와 격려의 그림. 밝은 미소와 같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건강한 빛
건강한 삶. 요즈음은 그런 삶을 꿈꾼다.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 나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올해 만났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런 건강한 빛을 품고 있었다. 작품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걷고 숨 쉬고 미소짓는 그 모습만으로도 '건강한 삶'이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건강한 삶이란, 이미 건강한 상태에 있는 삶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헤쳐나가겠다는 용기, 유머감각, 환한 미소, 그리고 타인의 어두움을 외면하지 않고 품으려는 넓은 마음,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지려 노력하는 모습까지 포함한다. 그렇게 하려고 나도 노력하고 있다. 처음 그림을 그리려 마음먹었을 때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마음은 사람을 설레게 하고 부지런히 움직이게 한다. 올해 만났던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나도 그 건강한 빛을 품고 싶다. 그 빛이 필요한 사람이 내 주변에 너무나 많다.
알면 모르게 되는 것
'너는 이미 슬픔에 처하고자 하는 너 자신을 보고 있잖아. 예측할 수 있는 슬픔은 진짜 슬픔이 아니야.'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두가 지 장면,
하나는 아버지의 장례식. 소리 내 통곡하는 일가친척들 사이에서 이상하게도 나는 어떻게 울음을 터뜨려야 할지 알지 못했다. 소리 내 우는 일은 나에게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삼일장이 끝나는 아침, 장지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나는 비로소 작정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러려고 마음을 먹었던 듯하다. 후련했다. 아마도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슬프고 힘들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울음이 진짜 슬픔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슬픔은 아주 나중에, 예상치 못하는 순간에, 다가오고 끼쳐온다.
다른 하나의 장면은 뉴욕. 센트럴 파크. 자연사박물관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향하던 어느 숲길을 걷다 생각했다. 포착한 이후에 다시 빠져드는 감정은 마치 한 번 무엇인가의 이름을 알고 나면 그 이름을 다시 부르고 싶어지는 것처럼, 무언가를 소환하고자 하는, 일종의 기쁨이다. 내가 처한 감정이 슬픔이라 부를 수 있어서 느낄 수 있는 기쁨. 진짜의 감정은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무엇이어야 할 것이다. 이름 지어진 감정은 이미, 그에 적합한 표정과 몸짓, 목소리의 떨림까지 뇌리에 각인되어 있고 학습되어 있다. 마음속에 벅차오르는 어떤 이름 모를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그 순간 그 감정에서 빠져나와 버린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거기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슬픔에 처해 있고자 하는 이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남겨진 세계
너는 떨어진다
붙잡지 않고 서로를 놓아 버린다
손끝에 힘이 남아있지 않다
모든 힘을 다해 붙잡지 않는다
네가, 아니면 내가 추락한다
내가 추락하는 편이 나아
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내가 살고자 했으니
너는 멀어진다
너는 내 새끼손가락만큼 작아진다
새끼손가락만큼 작아진 너를 그저 바라본다
손가락 끝에 일그러진 표정 같은 건 볼 수 없다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
네가 아플 때 짓는 표정과
네가 울 때 내는 소리가 귀에 익어
내 새끼손가락이 갓난아이처럼 우는 것 같아
그 울음소리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
나는 남겨진다
홀로 일어서는 장면을
홀로 거닐며 빛을 맛보는 장면을
홀로 세계에 대해 마음속으로 떠드는 장면을
셀 수 없이 상상해봤으면서
그것이 가능한지 귀를 의심하고 눈을 의심한다
세상은 아름답고 적막하다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낸다
소리는 반향없이 그대로 퍼져나간다
세상은 나의 감탄을 그저 듣는다
감탄을 듣는 세상은 아름답고 적막하다
나뭇가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사고에 대비하여 보험을 들어놓는 것처럼,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면서 일단 남들이 하는 것들은 어느 시점에서는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불안과 초조. 이러이러한 삶을 선택하면 이러이러한 미래가 예상된다. 그러니 이러이러하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에서 ‘이러이러’ 한 삶의 가치들은 역사에 의해, 통계학자들에 의해, 현자들에 의해, 정부에 의해, 기업들에 의해, 학교에 의해, 집단에 의해, 부모에 의해, 친구들에 의해 전해진다. 그 가치들은 그것을 주장하는 개인이나 사회 나아가 민족, 인류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 그런 각기 다른 복잡한 요구, 욕구, 가치들에 따라 사람들은 잘도 살아간다.
그 가치의 힘을 비교해봤을 때,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가 한 민족의 가치나 사회의 가치, 집단의 가치, 혹은 부모가 추구하는 가치를 넘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가치가 가진 역사가 전래된 가치의 그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무리 기운이 넘치는 젊은이라 하더라도 당장에 극복할 수 없는 건 시간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이 든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젊은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 또한 시간뿐이다.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연륜을 격파, 극복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시간을 창조하는 것 뿐이다. 완전히 새로 쓰여지는 역사를 만들어 기존의 것과 비교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라는 건 아예 다른 종이 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기에,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자라나는 가지가 되는 것이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같은 밑동에서 태어났으나 이제 나는 너와는 다른 쪽으로 가지를 뻗을 것이며, 우리가 뿌리로부터 빨아들여 공유하는 수분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쓰일 것이다. 내가 뻗어가는 가지는 당신과는 다른 별을 가리키고 있으니 제 갈 길을 가시요.- 라는 식으로.
제 갈 길을 가는 가지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시간이다. 이제 막 틔운 움이 어디까지 뻗어 나갈 지, 어느 방향으로 자라나게 될지를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은 분명 저쪽으로 가고자 하여도 제 몸이 붙어있는 큰 가지가 방향을 틀면 휘청거리며 너도 별수 없이 이쪽으로 가고 있었구나- 하는 오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으려면 아주 느리게 아주 조금의 영양분을 빨아대며 끈질기게 자라날 수 있는 근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