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저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위선

"정말? 아무것도? 아무도?"

"그래. 아무것도. 아무도."

"말도 안돼. 내가 보아온 너는 적어도 항상 뭔가를 추구하고, 그 주어진 상황속에서 열심히였던것같은데- 게다가 적당히 잘 해내기까지 했잖아! 넌 잘하고 있는거야. 잠시 슬럼프인거지."

"아니야. 아니라구. 정말 그저 방안에 앉아서.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니까. 아- 요즘의 난 말야, 그저 소화가 덜 되어 답답한 가슴으로 불필요하게 내 몸에 보충된 에너지가 어서 소비되기만을 바라며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있거나, 산채로 매장되는건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하며 시계소리에 맞춰서 두눈을 껌뻑거리고 누워있거나, 그 두가지 뿐이야. 나같은 인간을 위해서 조차도 일용할 숙식과 숙박이 제공된다는 건 정말 전인류적 수치야. 차라리 헛된 것이어도 좋으니 미래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라도 한다면! 컴퓨터 앞에서 이따위 인생에도 혹시 운명적인 계기나 대답 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는건 아닐까 하며 의미없는 말들을 검색창에 쳐넣고서 멍청하게 위 아래로 스크롤이나 하고있는 꼴이란! 운명적인 대답은 얼어죽을! 결국 싸구려 포르노사이트에나 기어들어가서 짧은 무비클립들을 끊임없이 재생시키며 자위에 열중하게되지. 그러다 보면 금방 잠들어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고, 자야할지 일어나야 할지 애매한 시간이 되면, '그래 살아있는것만으로도 충분해- 라고 중얼거리다가 잠들고 마는거야. 일말의 후회도 없이 말이야. 늦은 잠에서 깨어난 다음날은 전날과 다를바 없이 끔찍하기만 하지.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도 꾸역꾸역 외출을 하고, 화창한 봄볕 아래에서도 부끄러운줄 몰라. 그게 내가 말하는 고뇌이고 철학일까. 알량하게 예술가를 꿈꾸고 그 허영을 채운답시고 매일 3850원짜리 에스프레소를 위속에 들이붓지. 생산해 내는 것들은 결국 쓸데없는 중복일 뿐이고 쓰레기일 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이젠 나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얼마전에 채플린의 영화를 봤어. 갑자기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미치도록 그리웠거든. 우리의 찰리 채플린이 텅빈 의자위에 애처로운 표정으로 혼자 앉아있는 어떤 쇼트였는데 갑자기 화면이 까맣게 변하면서 'Alone'이라는 타이포가 나오는거야. 무성영화라는 것을 깜빡했던거지! 나뭇가지 처럼 도안되어있는 A의 세리프가 참 예뻤는데, 어쨌든- 난 채플린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에는 집중하지 못한채, 내내 한가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어, '나'라는 녀석을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뭐가 가장 어울릴까 하고 말야. 그래서 생각해 낸 단어는 행복하지도 않은데다가 비극적이지도 않은 그런 단어였어. <낭비>라는 단어였지. 그래. 낭비라는 단어가 꼭 어울려. 어쩌면 낭비라는 분석을 내리는 것 조차도 낭비인셈이지. 난 말야 차라리 죽어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한심해보여도 어쩔 수 없어. 미안. 사실은 거짓말을 했어. 난 오늘 여기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않았지만,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우연히 누군가 이곳을 지나치고, 나를 발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상상했으니까. 거의 열망했을 정도지! 그런데 마치 완벽하게 계산된 히치콕의 영화처럼, 해가질무렵 창가 쪽을 바라보고 있는 내 프레임 속으로 네가 걸어들어오는거야. 아- 그러고보니 필름포럼에서 히치콕 걸작선을 하고있는데, 지금가면 아마 현기증을 볼 수 있을꺼야. 교회 종탑씬에서의 외곡된 화면, 그리고 버나드 허먼의 찌릿찌릿한 음악이 일품이었는데 말야. 어쨌든, 이상하기도 하지. 아니 이상하게 되어버렸어.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는데. 항상 이시간이면 너무나 외로워지거든. 그래 외로움말야. 무슨말이든 하고싶었는데 결국 정말 무슨말이든 이야기해버렸네. 그런데, 너 듣고 있니? 이런 한심한 얘기들에는 아무 대답도 소용없지. 알아, 그럴 가치도 없어. 아무것도 안마시네. 바쁜거야?"

"아이구 정말 답답한 소리좀 그만 해. 전인류적 수치라고? 그만둬. 너를 위해 소진되는 에너지가 아까운 것 같다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그거 알아? 온갖 것을 핑계삼아 삶에는 전혀 흥미 없다는 듯 이야기할 때의 네 모습이 얼마나 역겨운지를?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 모든 상황은 결국 네가 원한 것 아냐? 왜 아무것도 못해- 글을 쓰고 싶다고? 그렇다면, 좀 더 열심히 플롯을 짜고 글을 써.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종이를 꺼내고 붓에 물감을 묻혀서 칠하는거야. 누군가가 그리우면 당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거야. 배가고프면 밥을 먹고. 소변이 마려우면 소변을 보는것처럼 간단한거야. 배가고픈데 누가 밥을 떠먹여주기만 바라고 있는거야? 너 그렇게 형편없는 녀석이었어? 죽어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도데체 너라는 녀석은 고통이라는 것을 겪어보기라도 한거야?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춥다고 벌벌 떠는 녀석이 무슨- 아이구, 니 말대로라면 그냥 그래 당장 죽어버려라- 아니, 아니지 그렇게 말했다가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너라는 녀석은 죽고싶다고 떠벌리고 다니면서도 그럴 수 없는 온갖 변명거리들을 준비하고 다니겠지. 정말 이대로의 너라면, 나도 널 위해 소진되는 에너지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게다가 오늘 네 얘기를 듣고보니, 네가 어디서 굶어죽더라도 널 동정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도 의도되어진다고 믿는 너니까. 너의 죽음도 틀림없이 네가 원했던 것이라고 믿어도 되겠지. 오히려 축하를 해줘야 할까. 나 참, 왜 내게 이런 악역을 맡기니!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 아냐? 왜 상대방을 자꾸 숨막히게 하니? 이 세상에 너만 그렇게 답답한거 아니야. 가장 속편하게 사는 것 같은 사람도, 정확히 너만큼 사는게 힘든거야. 너는 너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고난이라고 믿고싶겠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만큼,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한다구. 하지만 그런 사람들 조차도 너처럼 이기적이지는 않아. 제발 좀 끙끙거리지좀 마. 잘 좀 생각해 보라구. 정신차리라구! 그 사치스럽고 역겨운 말장난 집어치우기 전까지는 날 만날 생각은 하지마. 땀을 흘리든 눈물을 흘리든 일단 행동하고 부딪치기라도 해 봐. 네가 좋아하는 그 잘난 에스프레소 처럼 쓴맛을 좀 보라구! 넌 평범한 인생을 혐오하겠지만, 넌 그런 우월감 가질 자격없어. 그저 누구나 처럼, 외로우면 슬퍼하고 돈을 벌면 기뻐하는거야. 실없이 웃는것을 두려워 하지 마. 넌 지금 게으름조차도 포장하려하고 있잖아. 그건 네가 저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위선일거야. 무엇보다도 넌 오늘 나에게 고마워 해야해. 너 스스로는 너 자신을 비난할 수 없었을테니까. 이정도 악역을 맡아준 것이 나로서는 최선이야.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마. 난 그만 갈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