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방

등장인물

젊은 남자
말쑥한 신사
수염을 기른 남자
헐벗은 남자
젊은 여자
백발의 노인
젊은 남자의 아내
폐허 관리인



첫째 날


사각형의 방 안으로 두 남자가 등장


말쑥한 신사 여기군요. 당신이 영원히 있을 곳은.

젊은 남자 여기 있을지 말지는 내가 정합니다.

말쑥한 신사 아니요. 당신은 여기서 지내게 됩니다. 당신이 가져온 공간 아닙니까? 책상이 있는. 사각형의. 하얀 방.

젊은 남자 (방 안을 둘러보며) 그렇긴 하지만… 조금 답답하군요. (갑자기 문이 열린다) 누구요!

말쑥한 신사 거긴 아무도 없어요. 방금 당신이 답답하다고 말하지 않았소?

젊은 남자 그렇게 말했을 뿐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는 않았소. 다시 문을 닫아주시오.

말쑥한 신사 말을 그렇게 안 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문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거요.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그러니, 조심하시오. 영원히 이 방에 머물고 싶다면.

젊은 남자 아니, 이곳에 평생 머물러야 한다는 거요?

말쑥한 신사 평생이라니요? 우리에게 그런 개념은 없습니다. 당신의 한평생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렇게 놀란 눈으로 쳐다볼 필요 없어요. 다들 그렇게 처음엔 놀란 척을 하지요. 자신이 한평생 원했던 공간을 갖게 되었으니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런데… 참 소박하군요. 당신이 원했던 공간이란…

젊은 남자 분명, 이 책상과 의자는… 아니 의자가 보이지 않소!

말쑥한 신사 그야… 책상이 필요하다고 했겠죠. 책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젊은 남자 아니, 의자 없는 책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하지만 이 책상은 마음에 드는군요. (책상을 쓰다듬다가 문 쪽으로 다가가며) 아니, 문이 사라져버린 것 같소!

말쑥한 신사 방금 당신이 폐기하지 않았소?

젊은 남자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 없애달라고 하지는 않았소!

말쑥한 신사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 아마 마음속으로는…

젊은 남자 (화를 참으며) 내 마음을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말이오? 젠장… 내가 이런 방을 원했을 리 없어요. 여닫을 수 없는 방이 무슨 방이란 말이오? (문밖으로 나가려 한다)

말쑥한 신사 어, 저기… (눈을 질끈 감으며)

젊은 남자 (보이지 않는 문에 퉁겨져 뒤로 자빠진다) 이게 뭐요! 나는 갇힌 거요?

말쑥한 신사 이 양반, 성미가 급하시군…. 내가 말했지 않소. 당신이 평생… 아니, 영원히 지낼 곳은 여기라고. 하지만 갇힌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들어왔겠소. 누구나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답니다.

젊은 남자 (바닥에 쓰러진 채로) 누구나 드나들 수는 있지만, 정작 집주인은 나갈 수 없다니. 그게 어떻게 갇힌 게 아니란 말이오?

말쑥한 신사 이미 말했지 않소. 이 모든 공간은 당신의 설계대로 지어진 것이라고.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군요. 열려있는데 나갈 수 없다니. 아마도 당신은 자신을 가두고 싶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도 만나고 싶고…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젊은 남자 그렇다면 설계를 바꾸겠소. 나는 나갈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도록… (다시 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말쑥한 신사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요.

젊은 남자 (손가락을 덴 것처럼 움켜쥐고 펄쩍 뛴다)

말쑥한 신사 그 정도면 충분히 알았겠군요. 저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열린 문을 통해 나간다)

젊은 남자 아니 뭔가 더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쑥한 신사 (젊은 남자의 문 안쪽을) 당신이 바랬던 건 거기 다 있을 겁니다. 영원히…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요.

젊은 남자 (웃음을 터뜨리며) 영원이라니! 웃기는군, 영원!*

말쑥한 신사 퇴장. 젊은 남자가 문밖을 바라본다. 거대한 흰색의 풍경이 보인다.


둘째 날

열린 방. 책상에 누워있는 젊은 남자

젊은 남자 (방백으로) 이상하군, 잠이 오지 않아. 배도 고프지 않고. 그리고 이곳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문밖을 바라보며) 해가 지지 않는 북구의 나라인가. 밤인지 낮인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아. 몇 시간이, 몇 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구나. 누군가 시간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밖에 나가볼 수 있다면 태양이 어디에서 뜨고 어디로 지는지 알 수 있으련만, 대낮에도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이 방이 없…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으렸다… 조심 또 조심. 나는 이 방을 원해! 이 열린 방이 필요하다고! 이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구나. 시간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끼니를 챙겨야 할 필요도 없고, 잠자리를 알아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군. 여기 사람들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서 아예 폐기해버린 거야….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영원히 흘러갈 것도 없겠군. 가만… 시간 없이도 영원이라는 개념이 가능한 것일까? 영원은… 멈추어 있는 것인가 흐르는 것인가? 아니면, 멈추어 있는데도 흘러가는 것인가? 재미있는 주제로군! 이런 생각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아, 이렇게 상상에 빠져있을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지! 내가 온 저 아래… (아니, 어쩌면 위인지도 모를) 저세상에서는 몸이 원하는 온갖 생리적인 욕구들을 해결하느라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했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온전히 정신에만 집중할 수 있겠구나! 게다가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해코지하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야… 저 문만 닫을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라고? 참나, 그렇다면 문을 다시 만들어보자… (한참을 서 있다가) 소용없군. 역시 나를 복종시키려고 무슨 요술을 부린 게 틀림없어. 내 눈에는 보이지는 않는 특수한 문을 달아놓은 게 분명해. 분명 열리는 순간이 있을 거야. 다음에 누군가 찾아오면 그 틈에 나가야지!

선 채로 문밖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젊은 남자 (갑자기 다짐한 듯 일어나 방백으로) 그래,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뭐라도 하자…. 하지만 종이 쪼가리 하나도, 잉크도 보이지 않는군…. 내가 왜 도구들을 챙기지 않았을까. 한심스럽구나! 쳇! 불가능할 것도 없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자. 문장을 하나씩 완성하고. 첫 문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외우고 그 다음 문장을 완성하는 거야. 그래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다 그랬다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닌다

젊은 남자 (갑자기 일어나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비장한 말투로 읊조린다)

영원히 멀어지는 지상의 시간이여

멀어져만 가는 그대는 이제 나와 무관하니

가지말라 애원하지 않겠네

이제 시간은 나에게 머무네

도망치지 않는 충직한 나의 시간은

나와 함께 늙거나 젊어질 마음이 없다네

더는 흘러감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대가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한 발짝 걸음을 떼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네

시간이 달릴 때 변화하는 것은

오직 껍데기들이 사는 세상

변화하는 모든 껍데기와

나는 이제 작별을 고하네…

남자는 갑자기 벌거숭이가 된다

이런, 하하!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젊은 남자 (자조하듯) 그래… 옷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옷은 필요 없어! 가져가라고! 하지만 이 방만은 나에게서 뺏어갈 수 없을 걸? 절대로 잊지 않겠어!

혼자서 한참을 중얼거린다

젊은 남자 됐어. 이렇게 매일 조금씩… 아니, 매일이라는 개념도 필요 없지. 영원히 나의 이 열린 방 안에서 상상하고 글을 지어내겠어. 종이도 필요 없고 책상도… 아니 책상은 아직 필요해! 필요하다고! 그래… 하지만, 이렇게 글을 지어내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나갈 수는 없어도 누군가 들어올 수 있다니, 어쩌면 다행이군. 누구라도 방문자가 있다면, 기회를 봐서 시를 들려주겠어.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예술을 아는 사람 하나는 있겠지…


셋째 날


두 남자가 열린 방 안쪽을 들여다보며 서성인다.


수염을 기른 남자 여어… 여긴가 보네. 틀림없어. 들어가 보자고.

헐벗은 남자 어우, 이야. 이런 데가 있었어?

젊은 남자 (인기척에 깜짝 놀라 문 앞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몸을 가리며) 당신들 누구요?

수염을 기른 남자 (젊은 남자의 몸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어어… 이 친구, 여기가 처음인가 보군. 에이. 놀랄 것 없어! 처음엔 다 그래. 우린 다 허깨비여.

젊은 남자 허깨비라니…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며) 그럼 이게 다 꿈이란 말입니까? 꿈이 맞죠?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젊은 남자의 중요 부위를 쳐다보며) 에이… 가릴 필요 없어. 남자들끼리 뭘.

헐벗은 남자 이 양반 아직도 꿈에서 못 깼구먼. 이게 꿈이 아니고 사실…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치를 본다)

젊은 남자 꿈이든 뭐든… 나가주시죠. 여긴 사적인 공간입니다.

수염을 기른 남자 아니 사적이라면서 문은 왜 열어놓은 건가?

헐벗은 남자 닫을 문도 없던 걸… 누구나 들어오라고 그렇게 해놓은 거 아녔어?

젊은 남자 아니요. 처음엔 분명 문이 있었는데 그만…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웃는다)

젊은 남자 아니요. 그건 실수입니다. 저는 분명 안으로부터 잠글 수 있는 방을 생각했는데.

헐벗은 남자 에이… 실수라니! 그분이…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치를 보며) 실수일 리가 없지. 모두 자네 생각대로 된 거라고. 암.

젊은 남자 그분이라는 게 누구죠? 그 사람이 누구든 만나게 해주시오!

수염을 기른 남자 그럼. 실수일 리 없지… 자네가 생각하는 그분 같은 건 없네. 설령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헐벗은 남자를 바라보며) 그나저 … 자네 저 세상에서 건축을 공부했던가? 이 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헐벗은 남자 건축이라. 허허. 그렇지 내가 집 좀 지었지. 아-아주 미니멀하구만. 아무것도 없잖아. 공간 그 자체에 집중한 게지. 집주인이 아주 마음이 복잡한 사람인가 봐. 다 비운 걸 보니까. (안경을 넘어 음흉한 눈빛으로 젊은 남자를 쳐다본다) 그렇지? 집은 멋지게 지어놓고는 막상 그 안에 사는 자기 자신은 배려하지 않은 게야. 미니멀리즘 건축이 그렇지 뭐. 실용적이지가 않아!

젊은 남자 저는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습니다.

헐벗은 남자 에이… 그럴 리가! 나도 여기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걸? 이런 데 올 줄 알았더라면 아주 튼튼한 궁궐이라도 설계했을 텐데….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치를 본다) 헌데, 젊은 양반 취향이 아-아주 대단하구먼. 단순한 구조이긴 하지만 마감이 아주 좋아. (벽을 탁탁 치며) 게다가 튼튼하게 잘 지었는걸?

젊은 남자 (기분이 조금 좋아져서) 이런 텅 빈 공간을 하나 갖는 게 꿈이었죠. 살림살이도 최소한으로 하고 싶었는데… 마침 침실도 부엌도 필요 없게 되었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도 않았는데 피곤하거나 배가 고프지 않다니… 당신들도 그렇나요? 저 바깥에는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나요? 그나저나,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되었나요? 밤인가요? 낮인가요? 여름인가요? 겨울인가요? 이 방 안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웃는다)

수염을 기른 남자 시간을 그렇게 알고 싶어 했으면, 그게 뭐더라… 그 벽에 걸려있는… 두 개의 침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거 말이야….

헐벗은 남자 시계! 시계를 갖다 놨어야지! 있어 봤자 소용없겠지만 말이야.

수염을 기른 남자 소용없고말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아무것도 없다네. (책상을 들여다보며) 그런데… 이 책상은 왜 필요한가?

헐벗은 남자 그야… 앉아서 궁리할 용도겠지. 생각이 많은 양반이라니까.

젊은 남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려고 갖다놓았지만, 의자를…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웃는다)

수염을 기른 남자 작가 선생이셨군! 그런데 작품은 어딨나?

젊은 남자 이곳에서는 도구를 구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말인데, 밖에서 종이와 잉크를 좀 구해다 주실 수 없는지요? 필요하시면 이 책상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내가 나가는 것을 도와주시오!

헐벗은 남자 아니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 창작이 가능한가? 경험을 하려면 밖에 나가야지! 나가지도 못하는데 말이야.

수염을 기른 남자 하여간 요즘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머리로 다 해결하려고 한다니까.

헐벗은 남자 하지만 형님, 여기서는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수염을 기른 남자 (때리는 시늉을 하며) 아, 거, 참…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저 아래 사람들 말이지! 아니, 위였나?! 어느 쪽이여?

젊은 남자 사실은 어제 시를 한 편…

수염을 기른 남자 (말을 자르며) 나가서 사람을 만나야지. (안쓰러운 표정으로) 젊은 사람이… 사랑은 안 하는가?

젊은 남자 사랑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제가 어제 영원에 관한 시를…

헐벗은 남자 (말을 가로막고) 저 문 바깥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겠네! 여기 열린 방에 숨어서 말이지!

젊은 남자 (체념한 듯) 하지만…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요….

수염을 기른 남자 (헐벗은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에이… 이 친구 헛살았구먼. 우리가 보일 리가 없잖아! 생각해봐! 그리고 밖에 나가봤자 소용없어. 뭔가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도구가 없다구. 여긴 오직 마음뿐이야!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마주 보며 웃는다)

젊은 남자 그렇군요. 그래서… 다들 그렇게 벗고 있는 것이군요.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의 옷이 사라진다.


수염을 기른 남자 아니 이 친구! 어허.. 참. 제법일세. 우리 옷을 벗겼어!

헐벗은 남자 우리 옷을 벗겼어! (웃는다)

젊은 남자 하하하! 잘 됐군요. 허깨비들에게 옷은 필요 없지요!

수염을 기른 남자 눈치가 제법이군. 작가 양반! 필요치 않은 것은 사라진다네. 그런데, 우리 옷까지 벗길 필요는 없지 않았나?

헐벗은 남자 (몸을 더듬으며) 난 이게 더 나은걸. 고맙네!

수염을 기른 남자 하지만 모오-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네. 원하지 않는 것을 없애버릴 수는 있지만, 이 세계에 그 무엇도 덧붙일 수는 없다구. 그러니, 창작이니 뭐니 새로운 뭔가를 만들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네.

헐벗은 남자 뭔가 만들 수 있는 곳이 있긴 한데…. (수염을 기른 남자의 눈치를 본다)

수염을 기른 남자 어이, 이 사람이. 괜히 바람 집어넣고 있어. 인제 그만 가자구. 세 늙다리 남자들이 이렇게 좁은 데에 모여 있으니 거시기하기도 하고… 사적인 공간이라지 않나. (문밖으로 나간다)

젊은 남자 (두 남자가 나가는 틈을 타 문밖으로 나가려다 튕겨서 나자빠진다)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뒤를 돌아보며 웃는다)

수염을 기른 남자와 헐벗은 남자 퇴장.




넷째 날


문밖에 젊은 여자 등장.


젊은 여자 저기요….

젊은 남자 (벽을 마주 보고 누운 채로) 제발… 나를 가만히 놔둬요.

젊은 여자 저기요… 들어가도 되나요. 얘기 좀 나누려고 해요.

젊은 남자 (젊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가 누그러져) 무슨 일이요?

젊은 여자 오래는 머물지는 않을 거예요. 도와주려고 왔어요.

젊은 남자 (한 손으로는 중요 부위를 가리고 문 앞으로 마중 나가며) 먼저 물어보시는 걸 보니 이곳에도 교양인이 있는가 보군요. 들어오시죠.

젊은 여자 (남자를 통과하여 방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어요. 스스로를 공간에 속박시키는 게 아니라면… 어디든 드나들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공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대단한 정신력이에요.

젊은 남자 대단한 정신력이라니. 무슨 말이죠?

젊은 여자 대단한 정신력이고 말고요. 마음만 먹으면 이런 것쯤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니까요….

젊은 남자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젊은 여자 벌써 잘 알고 있군요. (문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저 문도 당신이 필요 없다고 여겨서 사라져버린 것 아닌가요? 혼자서 영원히 머문다는 것이 두려웠겠죠. 책상만 덩그러니 있는 걸 보니 의자도 당신이 지워버린 것 아닌가요?

젊은 남자 그건… 애초에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젊은 여자 (웃음) 조만간… 이 열린 방도 필요 없다고 느낄 거에요.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나와 같이 광야에서 살게 되겠죠.

젊은 남자 광야라니… 그렇다면, 저기 보이는 그대로 바깥도 텅 비어있단 말입니까?

젊은 여자 아직 한 번도 바깥에 나가본 적 없어요? 아, 나갈 수가 없는 거로군요.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분께 전해드릴게요.

젊은 남자 그분이라니… 대체 그분이 누구죠?

젊은 여자 (미소 지으며) 그보다는… 당신 얘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요. 도대체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알고 싶어요.

젊은 남자 별것 아니에요… 작품을 제작하고 있어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젊은 여자 (놀란 눈으로) 하지만 여기엔 아무것도 없잖아요. 창작은 불가능할 텐데….

젊은 남자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머릿속에서 작품을 만들죠. 저도 이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벌써 여러 편의 시와 소설의 첫머리, 두 점의 그림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답니다.

젊은 여자 대단하군요!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들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다니. 아주 아름다운 시와 그림이에요. 지금 당신이 구상하고 있는 소설의 첫머리도 굉장히 흥미롭군요!

젊은 남자 여기 사람들은 칭찬도 비난도 아주 천연덕스럽게 하는군요. 제 작품을 아직 보여드린 적도 없습니다만….

젊은 여자 (젊은 남자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가며) 여기 있잖아요.

젊은 남자 (손이 닿기 전에 물러서며) 작품에 대해 구상을 하는 시간 이외에는… 감정을 연구합니다.

젊은 여자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걸요?

젊은 남자 연구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 혼자 있다 보면, 마음속에 추억과 더불어 여러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죠. 그 어떤 감정을 처음 피어오르게 만든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을 이곳에 불러옵니다. (허공을 응시하며) 그 대상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다투기도 하죠. 그러다 보면 그 감정이 더 예리하게 돋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 그 감정만을 따로 떼어내서…

젊은 여자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젊은 남자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떼어낸다는 것은 마치…

젊은 여자 아뇨… 떼어내는 게 아니라, 혼자서 그게 가능하냐는 거죠.

젊은 남자 물론이죠. 하지만 감정에 대해서만 몰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는 기억 속의 조각들을 짜 맞추곤 합니다. 먼저 생각나는 기억들로부터… 그 주변의 기억들을 하나씩 불러오는 일이에요.

젊은 여자 (웃는다)

젊은 남자 왜 웃는 거죠?

젊은 여자 아니에요. 계속하세요.

젊은 남자 아무튼 오래전의 기억을 불러와 짜 맞추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 아, 참. 지금이 몇 시죠? 이곳은 아마도 북극에 가까워서인지, 아무리 오래도록 문밖을 보고 있어도 해가 지지 않아요. 그림자가 문 반대편으로 지고 있는 모양인데… (문 쪽을 가리키며) 저쪽이 남쪽인가요?

젊은 여자 (크게 웃는다) 당신은 정말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인가요? 천천히 알게 될 거예요. 왜 계속해서 여기일 뿐이고, 왜 계속 지금일 뿐인지….

젊은 남자 그래요… 아무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군요… 뭐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처음에는 아주 작은 기억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요. 시계라고 칩시다. 시계에 얽힌 하나의 사건을 떠올려보는 것이지요.

시계를 처음 사던 날이라던가… 시계를 잃어버린 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는 거죠. 마치 뿌옇게 서리가 내린 창문을 닦아내듯 희미한 부분을 조금씩 투명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어릴 적에 나의 형이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았던 시계를 물려받은 적이 있어요….

젊은 여자 그 시계를 당신이 제멋대로 색칠하고 망가뜨렸죠.

젊은 남자 맞아요! 그런데 어느 날 형이…

젊은 여자 그 시계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차마 사실대로 말은 못하고 잃어버렸다고 말해버렸죠? 그러다가 형에게 흠씬 얻어맞았고요?

젊은 남자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어떻게 이미 알고 있는 거죠?

젊은 여자 당신은 이 열린 방에서 추억을 곱씹고 있었군요. 그런데, 감정이라는 건 누군가와 함께 느껴야죠! 지금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순간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나요?

젊은 남자 (성난 목소리로) 있다고 해도 더는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젊은 여자 어머나, 당신은 나와 이야기하는 게 싫어졌군요? 내가 이 방을 어서 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궁금해요. 마음속 깊은 곳에 잠겨있다가 끌어올려 진 감정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이 방을 나와 광야의 사람들을 만나면, 더 생생한 살아있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쾌한 기분이 더 생생한 것처럼 말이죠.

젊은 남자 (문가로 다가가 여자를 배웅하며) 당신에게 충고를 바란 적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요술을 부려 내 마음을 읽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를 바깥으로 끌어내려는 속셈인 것 정도는 알겠소. 나는 이 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으니, 인제 그만 돌아가시죠. 그리고 제발 나갈 때 내 몸을 통과하거나 하지 말아요!

젊은 여자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이 이 매력적인 열린 방을 끝까지 지키길 응원하기 위해 온 것이에요. 요술 같은 건 없어요. 광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모두의 마음속에 있어요. 당신처럼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것이 없지요. 그도 그럴 것이 숨을 곳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무엇도 숨길 마음조차 없는 사람들이에요. 자기 것이라는 게 없으니, 상처받을 자기도 없는 셈이지요.

젊은 남자 (조금 누그러져서) 상처받을 자기가 없다니,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살지요?

젊은 여자 무엇으로 살다니요?

젊은 남자 자기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구요.

젊은 여자 글쎄요… 자기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아서… 나라는 개념도 사라져버렸나 봐요. 이곳에 시간이란 개념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죠. 생각해봐요.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고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아요. 당신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을 일도 없지요. 늙거나 다치지 않으니 자기를 보호하느라 신경 쓸 필요도 없고요… 그런 세상에도 ‘자기’라는 것이 필요할까요?

젊은 남자 이상하군요. 개인성이 없는 사회라니… 광야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가요? 얼마 전에 왔던 사내들은 좀 무례하던걸요.

젊은 여자 물론 아직 자기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요. 당신도, 나도, 어쩌면 그들도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하죠. 그들은 마치… 모두 동일한 사람 같아요.

젊은 남자 그럼 우리처럼… 아니, 나 같은 사람을 당신은… 아니, 그들은 이상하게 여기겠군요.

젊은 여자 저 아래 세상에서였다면 그랬겠죠.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달라요. 누가 무엇을 하건 관심이 없어요. 당신도 이미 알겠지만…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요. (웃음) 당신이 아직도 이 열린 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긴 하죠.

젊은 남자 그게 누구죠? 그가 당신들이 말하는 그분인가요?

젊은 여자 당신은 참 성미가 급하군요. 이곳에서는 좀 더 느긋해질 필요가 있어요. 조만간 그분이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젊은 남자 그가 이 세계를 만든 사람인가요? 이 세계의 관리자인가요?

젊은 여자 (웃음) 이 세계에 그런 절대자는 없어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사람도 없고요.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한 사람 같아요. 여기는… 아직은 이해가 잘 안 되겠죠.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다고 생각하면 돼요… 어쩌면 우리는 정말 구름인지도 몰라요. 아무튼… 그는 당신을 아주 만나고 싶어 해요.

젊은 남자 명확한 얘기는 없고 뜬구름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군요. 도대체 그 사람이 언제 온다는 겁니까?

젊은 여자 이제 가봐야겠군요. 또 보게 될 거예요.


젊은 여자가 문 반대편 벽 뒤로 퇴장




다섯째 날


열린 방 안으로 백발의 노인 등장


백발의 노인 오오… 아직 그대로 있군! 소문대로 대단하군.

젊은 남자 (본체만체) 이번엔 또 누구시오? 방을 구경하러 왔으면 조용히 보고 나가시오.

백발의 노인 허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아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건 자네지! 말해보게나 이 방을 언제쯤 포기할 수 있겠나?

젊은 남자 방을 포기하다니요? 나갈 수도 없는데 어떻게 포기합니까. 방이 나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백발의 노인 자네가 방을 필요로 하는데 어떻게 방이 자네를 포기하나?

젊은 남자 예… 방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 문이 열려있으니… (고개를 돌려 노인을 보며) 있으나 마나 한 셈이로군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으시면 노인께서도 여기 며칠 머무르시지요.

백발의 노인 자네는 방이 왜 필요한가? 이런 곳에서. 밖으로 나가보긴 했나? 아 참, 나갈 수가 없겠군.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이 여길 드나든 것으로 알고 있네. 그들이 이곳에 관해 얘기를 좀 해주던가?

젊은 남자 (다시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예…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무언가 생각난 듯 노인을 바라보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군! 그분!

백발의 노인 (웃음) 나는 그저 광야의 한 노인일 뿐일세. 그 사람에게 볼일이라도 있는가? 여기서는 모두가 그 사람일세. 모든 사람과 동시에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에게 물어보게. 내가 기꺼이 자네가 찾는 그분이 되어주겠네.

젊은 남자 좋소. 그렇다면 먼저,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백발의 노인 지상의 언어를 빌어 얘기하자면, 자네는 지금 대자연의 거대한 영혼의 일부가 된 것일세. 전체의 일부이지만, 전부인 것이나 다름이 없지. 이곳은 자네가 살던 가시적인 세계의 이면이라고 할까… 우리 쪽에서 보면, 자네가 있던 세계가 이면이네만… 말하자면 우리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동력원일세.

젊은 남자 모든 생명… 그렇다면 왜 이곳엔 식물이나 동물은 보이지 않나요? 속세를 살던 내가 생각해도 인간이 대자연을 거느릴 능력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백발의 노인 좋은 질문이오. 인간이 특별한 것은 그 특유의 자의식 때문이라오. 저 세상에서의 자의식이 너무도 또렷했기 때문에 마치 빛의 잔상처럼 이곳에 와서도 자의식이 남아있는 것이라오. 반면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동물과 식물들은 죽음 이후 곧바로 이 거대한 백색의 공간에 스며들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오. 사실 이곳에서 우리 인간들은… 조금 창피한 존재라오.

젊은 남자 그럼 인간들은… 아니 사람의 영혼은 여기서 무얼 합니까.

백발의 노인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네. 우리는 그저 잔상일 뿐이니까.

젊은 남자 노인은 아무래도 나를 여기서 꺼내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감독관 같은 일을 하는 것 아니오? 지난번에 온 여자도 당신을 아는 모양이던데….

백발의 노인 우린 만난 적 없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네. 말하지 않아도… 내가 자네를 이곳에서 꺼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네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그 사람이 나인 것을 첫눈에 알아보았고 말이야. 자네도 이미 이 세계 사람들과 같은 영혼에 속해있다는 것일세.

젊은 남자 그렇다면 왜 나에게만 이런 방이 주어진 거요?

백발의 노인 보통은 이곳에 올라올 때, ‘자기’라는 것을 버리게 되지. 마지막 순간에는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니까 갑자기 너그러워진달까… 아니 어떤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몸을 가진 삶의 끝이 곧 모든 것의 끝이라 믿는 순진한 인간성 덕분에, 다음 생에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 거라 감히 생각하지 못한다네. 내세를 믿는 사람조차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는,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기에 십상이지. 숨이 끊어질 때의 육체적인 고통이 그들의 정신을 마비시켜버린달까. 하지만 자네는 (방 안을 둘러보며) 이런 공간을 가지고 온 것을 보니…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급작스러웠던가 보군. 그게 아니라면… 늘 죽음을 염두에 두었을 게지.

젊은 남자 (자랑스러운 듯)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의 고통이 오히려 저 세상을 살며 느꼈던 정신적인 고통보다 크지 않았죠. 맞아요. 아주 신속하게 모든 것이 끝났죠… (그 순간이 떠오른 듯 눈을 질끈 감는다)

백발의 노인 아무튼 자네처럼 무언가를 이 세계로 가져온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불필요한지를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네. 거대한 성을 가지고 온 자도, 심지어 죄 없는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온 자도 있었지만, 다 무용함을 알고는 이 세계에서 지워버렸다네. 나는 이곳에 도착한 영혼에게 인간 세계의 잔상이 얼마나 불필요한지를 조금 더 일찍 느끼게 해주고 있다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면 편법을 쓰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결정할 문제일세.

젊은 남자 돌아올 수 있는 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백발의 노인 광야로 나와보게나. 그럼 알게 될걸세. 우리에겐 비밀이 없다네. 모두가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네. 자네는 자신을 감추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광야의 사람들은 자네의 마음 속속들이 느끼고 있다네. 자네가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우리에게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네.

젊은 남자 왜 나의 모든 것을 열어 보여줘야만 하죠? 나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요. 누군가의 위로도 필요 없고요. 불행을 느낄 권리도 있지 않나요? 당신들이 느낀다는 그 아픔도 사실 지극히 인간적인 도덕적인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 또한 버려야 할 인간적인 잔상 아닌가요?

백발의 노인 자네도 이미 우리가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네. 우리가 자네를 걱정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는 이미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네. 자네가 괜찮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네를 염려한다는 생각이 자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 자네가 정말 괜찮다 말할 수 있을까? 이 열린 방은 그래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야. 겉모습을 감출 수 있을 뿐, 아무것도 감추지 못해….

젊은 남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실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열린 방에 숨어있건 광야를 떠돌건 어느 한 편에만 영원히 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한 거예요….

백발의 노인 여기에 있으면 저기가 좋아 보이고, 혼자 있으면 함께 있고 싶어지고, 또 함께 있으면 홀로 있고 싶고? 그래서… 여기도 저기도 아닌 곳에 있고 싶다?

젊은 남자 그런 셈이죠.

백발의 노인 참으로 인간적이군! 자네가 이 열린 방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겠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이야. 내가 너무 성급했네. 자네 스스로 이 방을 부수고 나오기를 기대하네….

젊은 남자 그럼 저를 이대로 놔두시겠다는 건가요?

백발의 노인 자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네.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그렇다고 억지로 자네를 이 방에서 끌어내 광야로 내모는 일만큼 위험한 일도 없을 것 같네.

젊은 남자 이제는 저를 범죄자처럼 대하시는군요. 이곳 사람들도 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백발의 노인 내가 말하는 위험이란, 자네에게 닥칠 위험을 말하는 것일세. 저 아래 세계에서 자네에게 벌어졌던 불행한 일이 여기에서도 벌어지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고개를 떨구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며) 내가 너무 많은 얘기를 했군! 혹시라도… 광야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볼 생각은 없나? 열린 방을 그대로 둔 채로 말이지. 자네가 원하면 이 방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걸세. 나갈 수 있도록 조처를 해 두겠네.

젊은 남자 드디어 이 세계의 관리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나갈 수 있게 해주시는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백발의 노인 (웃으며) 자네는 이 방을 나오게 될 걸세! 광야에서 보세!


백발의 노인 퇴장




여섯째 날


광야에서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마주친다


젊은 여자 반가워요! 드디어 나왔군요! 열린 방은 이제 없어진 건가요?

젊은 남자 오… 아니오. 문밖을 나갈 수 있게 해 주신다기에 그렇게 한 것뿐이오. 방은 아직…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린다) 남아있을 거요. 하지만…

젊은 여자 (남자의 시선을 돌려놓으려는 듯 큰소리로 기뻐하며) 그렇군요! 잘됐어요! 마침 오늘 지상에서 초대된 자의 연설이 있을 예정이에요.

젊은 남자 지상에서 초대된 자라뇨? 죽지 않고도 이곳에 들어올 수 있나요?

젊은 여자 물론 불가능한 일이죠. 지상의 인간 중 극히 일부의 현명한 사람들만 이곳으로 초대해요. 물론 죽여서요.

젊은 남자 죽인다고요?

젊은 여자 그럼요! 이곳에 오려면 일단 죽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이미 죽을 운명에 처한 자의 목숨을 잠시 빼앗는 것뿐이니까.

젊은 남자 잠시 빼앗는 거라면…

젊은 여자 맞아요.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다시 돌려보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면, 목숨을 다시 붙여서 돌려보내죠. (남자의 눈치를 살펴보며) 하하!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을 저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낼 일은 없으니.

젊은 남자 그러고 보니, 죽었다 살아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요.

젊은 여자 (웃으며) 인간의 시간으로 약 이천년 전쯤에 한 사람을 돌려보낸 적이 있죠. 물론 그 이후에도 여러 현명한 자들을 돌려보냈지만… (한숨을 쉬며) 요즘 인간들은 어찌나 바쁜지,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거나 태워버리더군요. 무덤 속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여기로 돌아온 자들도 많아요.

젊은 남자 (황당한 표정으로) 이곳으로 초대할 사람은 누가 어떻게 선별하는 거죠?

젊은 여자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죠…. 산 자들 가운데에서 현명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있으면, 모두 함께 그의 한평생을 검토해요. 과연 이곳에 초대할만한 사람인지...

젊은 남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더니… 이곳 사람들도 부지런하군요.

젊은 여자 (남자를 이끌며) 어서 가요!


모여 있는 사람들 곁으로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다가간다


광야인1 오! 당신이로군요!

광야인2 열린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는 그분?

광야인3 지상에서 온 예술가!

광야인4 예술가야말로 진정한 선구자이지!

광야인1 그러고 보니 오늘의 연설은 여기 이분이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광야인1, 2, 3, 4 (웃는다)

젊은 남자 (당황한 표정으로) 열린 방에서 온 사람이 제가 맞습니다만, 그런 선구적인… 수준의 예술가는 아닙니다.

광야인4 아무튼 그… 열린 방을 철거한 것을 축하하오!

젊은 남자 (놀란 눈으로 여자를 쳐다본다)

광야인1, 2, 3 축하해요!

광야인3 그 흉물스러운 방을 볼 때마다 얼마나 지워버리고 싶던지!

젊은 여자 (광야인3을 흘기듯 바라보며) 아직 열린 방은 그대로 있다고 해요….

젊은 남자 (안심한다)

광야인2 하지만 광야로 나온 것만으로도 축하받을 일입니다!

광야인1, 3, 4 그럼요 축하받을 일입니다!

젊은 남자 (어쩔 줄을 몰라 그저 웃는다)

광야인1 그럼 백발의 노인이 방에서 나오는 걸 허락해 준 모양이군…. 그나저나, 그 방은 언제쯤 부술 작정이신가? 그 날을 우리도 함께 축하해 주고 싶네만.

젊은 남자 나에 대해 잘도 알고 있군요.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광야인1 우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 있는 광야인2나 광야인3이나 광야인4나, 다 같은 마음일 거요.

광야인2, 3, 4 모두가 모두의 마음속에!

젊은 남자 당신들은 여기에서…

광야인3 쉿! 지상에서 초대된 자의 연설이 시작됐어!


지상에서 초대된 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다.


지상에서 초대된 자 오와… 오와…

광야인4 이제 올라오고 있군.

지상에서 초대된 자 오오우… 와아우…

광야인1 거의 다 올라왔어.

지상에서 초대된 자 (갑자기 눈을 번쩍 뜬다)

광야인2 이제 깨어났어!

지상에서 초대된 자 (갑자기 일어나 하늘을 향해 팔을 뻗으며) 위대하신… 하느님… 대자연의 정령… 만물의 창조자… (생각이 나지 않는 듯 잠시 멈추더니) 생명의 아버지! 대지의 여신이시여!

광야인1 다 갖다 붙이는구먼. 저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좋을 것을.

광야인2 저들 눈에는 우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이렇게 가까이 모여있는 줄 모르겠지.

광야인3 쉿!

지상에서 초대된 자 여기 당신의 아들이 거룩한 부름을 받고 돌아왔나이다!

광야인4 아니 왜 항상 우리를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는 게지?

광야인1 목소리가 아주 또랑또랑 하네. 역시! 하지만 조금 작은 소리로 얘기하면 좋으련만!

광야인3 쉬잇!

지상에서 초대된 자 당신의 아들이 지상을 떠돌며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왔나이다! 들리시나이까아! 여기에 저와 함께 계신다면 당신의 모습을 제게 보여주시옵소서! 어디 계십니까아아아!

광야인4 역시 인간들은 의심이 많아서 탈이야.

광야인2 자네가 여기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해보게. 온 광야를 헤집고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다들 꿈에서 깨야 한다면서 말이야. 나는 자네가 지상에서 파견한 광인인 줄 알았다니까. 허허.

광야인3 쉿! 쉬이이잇!!

지상에서 초대된 자 (광야인 3쪽을 돌아보며) 아아! 들립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광야인3 (깜짝 놀라 입을 막는다)

광야인1, 2, 4 (광야인 3을 보며 웃는다)

지상에서 초대된 자가 광야인3 쪽으로 다가와 다시 무릎을 꿇는다.

지상에서 초대된 자 … 제가 지상에서 보낸 오십육년이라는 시간은 짧았지만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여전히 인간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이 아닌,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위대한 대자연이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참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고통 속으로, 끊임없는 탐욕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물질에 매몰된 가련한 존재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대한 창조자께서… 아니 대지의 여신께서 지상의 한 인간에게 일러주었던 위대한 깨달음을 기억하십니까? 당신께서 그 선지자의 마음속에 심어놓았던 진실의 씨앗은 이천년이 지나는 동안 뿌리내리고 열매 맺었으나, 사람들은 이제 그 열매가 너무 흔해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저 열매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맛과 향을 즐기기에만 바쁘더이다. 자기 안에 다시 그 씨앗을 심어 열매를 틔워보려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지상의 인간들은… 충분히 타락했습니다.

젊은 남자 (젊은 여자에게) 저 사람이 말하는 선지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군요. 저 사람 얼굴도 낯이 익고요.

젊은 여자 (웃음) 굉장히 안타까운 얘기인데… 왠지 웃음이 나는군요. 이천 년 전 선지자와는 확실히 말투가 다르군요. 우리도 정말 어색해요.

지상에서 초대된 자 … 지상의 인류가 가진 문제는 역시나 그들의 육체였습니다! 나보다 앞선 선지자께서 말씀하셨듯… 그들에게 시급한 문제는 바로!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몸을 초월하는 것이었음을! 재차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습니다! (박수 소리를 기대했다는 듯 텅 빈 광야를 둘러보고는) 이제 더는 인간이 육체의 제약을 느끼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틀림없이 계신, 위대하신 대자연의 영혼처럼! 모두가 모두의 마음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마음먹은 대로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수억 명의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듣고 나누게 된 것입니다! 지상으로 자라난 식물이 그러하듯, 인간도 이제 자원을 낭비하며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대자연이 창조한 위대한 생명체인 식물들처럼, 그들도 이제 기술의 힘을 빌려 정주하는 생명체로 거듭난 것입니다!

광야인1, 2, 3, 4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폭소한다)


지상에서 초대된 자의 연설이 계속되고 광야의 군중들은 하나둘 흩어진다.


젊은 남자 왜 끝까지 듣지 않고 돌아가는 거죠?

젊은 여자 당신도 들었잖아요.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고 초대한 자가 기대 이하의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다들 실망해서 돌아가는 것이죠.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기술의 힘을 빌리겠다는 건, 인간을 다시금 물질에 구속시키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잖아요. 차라리 육체에만 갇혀있는 편이 낫죠. 지금 인류는 이미 너무 많은 물질에 기대고 있어요.

젊은 남자 흥미롭군요.

젊은 여자 무엇이?

젊은 남자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당신들… 아니, 우리는… 인류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세계에 있으니까요.

젊은 여자 (웃음)

젊은 남자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젊은 여자 (굳은 표정으로) 당신은 돌아갈 수 없어요.

젊은 남자 (놀란 표정으로) 무슨 말이죠? 분명 그분은 열린 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어요!

젊은 여자 물론 그러셨죠. 당신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하지만 당신이 그 방을 나올 때 그 방은 사라졌다는군요.

젊은 남자 사라지다니요! 약속과 달라요! 천상의 사람들조차 기만할 줄 아는군요?

젊은 여자 여보세요. 아무도 당신을 속이지 않아요. 속일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에요. 당신이 방을 나설 때, 이 방에 남아 있어 봤자 아무 소용없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시를 들어 줄 그 누구도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고 그랬잖아요.

젊은 남자 (체념한 듯) 잘 알고 있군요. 네, 그랬겠죠.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방을 나올 때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나 보죠.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은 아무 소용 없었을 테고요.

젊은 여자 방을 잃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요.

젊은 남자 영원히… 광야를 떠돌며 사는 삶이 무슨 의미인가요?

젊은 여자 삶의 의미라는 건… 지상에 잠시 머물 뿐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장치일 뿐이에요. 그들은 주어진 수명보다 지나치게 더 오래 살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들은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지나치게 안전한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런 인간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삶의 의미라는 걸 고안해 낸 것이죠. 지상에서 당신이 하던 일이 예술이라 했나요? 보세요… 그저 서로 조금씩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 온 인생을 바치는 예술이라는 것이… 당신이 이곳에서 내려다보기에도 그토록 의미 있는 일처럼 보이나요?

젊은 남자 예술작품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게 얘기하더군요.

젊은 여자 (웃음) 적어도 예전의 인간들은… 자연을 찬미할 줄 알았어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묘사해내는 데에 전력을 다했죠. 우리가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이나 물빛을 포착하고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들을 우리는 좋아했어요. 저 아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내는 예술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우리도 존경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인간은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놓고 예술작품이라 추켜세우더군요. 틀림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마치 뭔가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뭉개버린다거나 하면서…. 우리가 말하길 지극히 인간적인 쓰레기를 만들어 세워놓고는 서로 칭찬하기 바쁘더군요. 그들은 예술이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올수록 아주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아요. 당신도 그런 예술작품을 만들 생각인가요?

젊은 남자 (미소) 이 세상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다면서요….

젊은 여자 (부끄러운 듯) 맞아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죠. 여기에서는 뭔가를 꼭 이루지 않아도 괜찮아요.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 것은 한정된 삶에서나 의미 있겠죠. 이 세계에서 당신이 무얼 하건 누구도 비난하거나 칭찬하지 않을 거예요.

젊은 남자 하지만, 영원한 시간이라니…

젊은 여자 영원한 시간이 어떤 것인지는… 영원한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될 거예요.

젊은 남자 영원… (갑자기 생각난 듯) 맞아요. 영원에 대한 시를 지은 적이 있어요!

젊은 여자 당신이 영원을 두려워하는 건 사실, 반복을 두려워하는 것이에요. 아침에 일어나 저녁이 될 때까지 매일 되풀이 되니 두려운 거죠. 하지만 이곳에는 반복되는 게 없어요. 해가 뜨거나 지지 않아요. 계절이 바뀌지 않아요. 주변의 모든 것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있을 거예요. 작은 세계는 계속해서 회전하죠. 더 작은 세계일수록 더 빨리. 하지만 여긴 한계가 없는 거대한 세계예요. 공전도 자전도 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모든 것을 품고 있죠. 모두가

젊은 남자 모두의 마음속에….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젊은 여자 제가 당신을 조금 도와드려도 될까요? (손을 남자의 머리 위로 가져간다)

젊은 남자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다) 마음대로 해요.


엎드려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젊은 남자 나… 이상한 꿈을 꿨어.

젊은 남자의 아내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무른다) 무슨 꿈이었는데? 그냥 잠시 엎드려있는 줄 알았는데 아주 푹 잤네.

젊은 남자 영원한 시간… 글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 이상한 꿈이었어. 당신도 나왔던 것 같아. 열린 방… 그래, 내가 죽어서 어떤 세계에 들어갔는데,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았어. 그곳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어.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다 같은 생김새였던 것 같아.

젊은 남자의 아내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해? 거기가 천국이래?

젊은 남자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꿈에서 깨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젊은 남자의 아내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아니! 어떤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젊은 남자 그런 꿈이 아니야…. 거기는 시간이 없는 곳이라고 했어. 해가 뜨거나 지지도 않고 계절도 없는… 회전하지 않는 세계라고. 아무것도 변하는 것 없으니 권태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 했어.

젊은 남자의 아내 그런 세계라면… 끔찍할 것 같은데? (남자의 배를 쿡 찌르며) 지금의 몸무게 그대로! 영원히! (웃음) 당신은 뭐든지 쉽게 질리잖아.

젊은 남자 그러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계라니.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잠을 자거나 먹을 필요도 없데….

젊은 남자의 아내 어제 당신, 배고파서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잠들어서 그런 꿈 꾼건 가봐! 배고프지? 밥 줄까? 당신은 그래서 그 세상에서 남기로 했어? 영원히?

젊은 남자 아니, 처음엔 나에게 작은 방이 하나 있었어. 문이 없는 방. 안에 있으면 너무 좋고 편안했는데, 그 방 안에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하더라고.

젊은 남자의 아내 그 여자가 나오라고 꼬셨겠지.

젊은 남자 어! 어떻게 알았어?

젊은 남자의 아내 몰랐어? 나도 당신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거?

젊은 남자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대자연의 영혼이라나… 그런 말을 내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니… 웃긴다. 아무튼, 방에 있건 바깥에 있건, 영원한 생이라는 게 끔찍한 건 마찬가지인데 방에 있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영원한 편이 나을 것 같더라고.

젊은 남자의 아내 그래. 그래서 내가 항상 말하잖아. (머리를 마사지하며) 이 고집스러운 생각 주머니에서 좀 빠져나오라고. 만약 다시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당신은 항상 그런 (놀리는 듯한 말투로) 미니멀-한 세계를 좋아했잖아. 여기에서 사람들과 지지고 볶고 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해서 항상 산으로 바다로 나가고 싶어 하는 거 아냐? 대-자연 속으로!

젊은 남자 글쎄… 내가 생각했던 영원과는 다른 영원을 사는 그들의 모습이 정말 편안해 보이긴 했어. 영원히 같은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그런 반복적인 하루가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는 세계라면….

젊은 남자의 아내 오… 뭔가… 그 유명한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네. 그 인공지능이 남자 주인공을 우주 공간 속으로 던져버리는 장면.

젊은 남자 맞아, 멈추지 않고 영원히 날아가 버리는… 우주 공간에 던져진 기분이었어. 생각해 봐, 어쩌면 우리는… 죽는 날이 정해져 있어서 이토록 뭔가 남들에게서 자꾸만 빼앗으려 하고 밟고 일어서려고 애를 쓰는지도 몰라. 자아실현이니 삶의 목표니 하는 것들을 울부짖으면서 말이야.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닌데 말이야.

젊은 남자의 아내 맞아, 사람들이 배가 부른 거지.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 마주 보며) 그래서, 만약 지금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그렇게 할 거야?

젊은 남자 음… 하지만 그런 세계는 너무 따분할 것 같아. 해탈한 사람처럼 마음이야 백지장처럼 하얗고 깨끗해질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 어렵게 뭔가를 이뤄내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도 없을 테고. 어렵게 얻은 것을 잃는 고통도 없겠지. 그건 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하지만…

젊은 남자의 아내 그래서… 돌아갈 거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면?

젊은 남자 그렇다면…

젊은 남자의 아내 그렇다면?

젊은 남자 돌아가 볼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일어선다.


젊은 남자 이런!

젊은 여자 좋아요. 잘했어요.

젊은 남자 이게 무슨 짓이요!

젊은 여자 당신이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아서 꿈을 꾸게 해드렸어요.

젊은 남자 아니! 바로 지금이 꿈속이오! 다시 돌려보내 주시오! (눈을 감고 자신의 따귀를 때린다)

젊은 여자 소용없어요!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당신은 방금 여기에 남기로 했어요. 그러니 이제 받아들이세요.

젊은 남자 아까는 돌아갈 수 없다면서요! 그렇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다 필요 없어요!


젊은 남자가 광야를 가로질러 뛰어간다.

젊은 여자는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반대 방향으로 퇴장한다



일곱째 날


남자는 지상의 시간으로 여러 날을 달려 광야를 벗어나 폐허에 도착한다.


폐허 관리인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젊은 남자 (지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기는 어디인가요. 저 폐허들은...

폐허 관리인 자네처럼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지상의 물건을 지참하고 왔다가 내버린 것들을 폐기하는 곳일세. 얼마 전에 자네가 버린 열린 방도 이곳에 도착했지.

젊은 남자 그것이 어디 있소! 나는 그 방이 필요합니다! 잃어버린 문짝도!

폐허 관리인 (혀를 차며) 미안하지만, 그 문짝은 이미 해체되고 없네. 자네의 물건들은 생각보다 단순한 물질이어서 금방 분해할 수 있었네. 지금은 그래도 수월한 편이라네. 예전에는 지상의 인간들이 온갖 것들을 다 가져왔으니까. 거대한 피라미드를 가져오질 않나, 흙으로 된 수천 명의 인물상을 가지고 오질 않나… (폐허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저기 자네의 열린 방이 있구먼. 저 책상도 아마 자네 것이지?

젊은 남자 오! 맞아요! 나의 책상! 그렇다면 저 책상이라도 주시오!

폐허 관리인 그걸 가지고 뭘 하려고… 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덧붙여서는 안 되네. 해체만 가능하지.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작게 분쇄해서 다시 지상으로 돌려주는 일이지.

젊은 남자 그럼 내 책상은 내가 분해하게 해주시오!

폐허 관리인 그것도 안 되네… 자네 마음속에 이미 책상을 분해해서 만들고 싶은 무언가가 보이는구먼. 창작은 안 되네! 다만…

젊은 남자 다만?

폐허 관리인 창작 비슷한 걸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젊은 남자 그게 무슨 일이든, 나에게 일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 지옥 같은 영원한 평화 속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폐허 관리인 단 하루만 사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하지만 자네가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네.

젊은 남자 저는 노동을 원합니다.

폐허 관리인 거, 참. 성미가 급하구먼. 자네가 할 일이란… 분해한 물질들을 지상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야. 그 물질들을 이곳의 흙과 함께 빚어 거대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덩어리는 자네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네. 어차피 이 세계 바깥으로 던져질 것이니, 어떤 모양이 되건 상관없지. 어차피 지상에 떨어질 때 여러 조각으로 부서질 테니까. 자네가 만든 것이 무엇이든, 지상의 사람들은 볼 수 없겠지. 사라지고 말 것을 만드는 일인데도 괜찮은가? 자네는 예술가라지?

젊은 남자 좋습니다!

폐허 관리인 한번 시작하면 영원히 그만둘 수 없네. 그래도 괜찮은가?

젊은 남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좋습니다!

폐허 관리인 그렇다면, 저기 자네의 열린 방부터 부수도록 하지.


젊은 남자가 자신이 가져왔던 열린 방을 부수기 시작한다.

지상으로 보낼 유성을 빚어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