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의 철학

나는 붉은 세계에 살고 있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빨갛게 점멸하는 세계. 눈앞의 붉은 점으로부터 쏘아져 나온 붉은 빛, 그리고 그 붉은 빛에 반사되어 비치는 내 얼굴. 그것이 내가 보는 세계의 전부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붉은 점이 점멸하는 시간을 일 초라 가정했을 때, 구천만 번쯤 깜빡인 거로 보아 약 삼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작정하고 깜빡임을 세어 보기로 한 이후 그 정도이니, 아마 오 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구천만이라는 숫자를 세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만 번의 점멸 이후 약 일 분 여의 암전이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구천 번의 암전을 세었다. 수를 세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어서가 아니다.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이 생명유지장치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빛의 점멸을 세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숫자와 숫자 사이, 빛과 빛 사이 찰나의 시간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밀려와 셈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명유지장치로 들어온 것은 약 이십 년 전 일이다. 인공지능 혁명이 일어나 더는 사람들의 노동이 필요 없는 시대에 이르렀을 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앞으로의 생을 오염된 세계가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살기로 했다. 나의 몸을 영면시킨 곳은 파라사피언스 Para Sapiens 라는 기업-국가였다. 오래전 아시아인종이 모여 살던 곳에 파라사피언스 가상세계의 인공지능서버 ‘코기토 Cogito’가 있었다. 이곳에 몸을 맡긴 이유는, 다른 어떤 가상세계보다도 가장 완벽함에 가깝게 20세기 인류가 살던 풍경을 가상세계 속에 재현해 냈기 때문이다. 멸종한 동물들과 함께 야생의 생을 살 수 있는 가상세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어려서부터 20세기 인간의 삶에 관심이 많았기에 파라사피언스를 택했다.

몸을 네트워크에 연결한 채 영면의 상태로 고정하고 가상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위버퀘어퍼 Überkörper’라 한다. 가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고정된 실체인 몸으로부터 분리하는 일이다. 마음이 몸을 자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하게 몸의 물질대사를 기계가 대신 처리해주면 마음은 몸을 잊게 된다. 생명유지를 위한 영양분은 매시간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어 필요한 양만큼 주입된다. 체내에서 생긴 노폐물이나 바이러스는 나노로봇이 혈관을 돌아다니며 분해한다. 노쇠한 세포들을 일정한 주기로 새로운 세포조직으로 교체되어 노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아, 이론적으로는 인공태양으로 움직이는 이 기계가 멈추지 않는 한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 라고 홍보하는 것을 들었다

가상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뇌’를 전자화하는 과정이다. 시신경에 직접 시각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나, 자신의 기억을 가상세계의 서버와 연결하는 과정이 가장 까다롭고도 중요한 일이다. 정보화된 지각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장치들도 위버퀘어퍼 시스템의 핵심 기능이다. 나에게 벌어진 사고는 아마도 시신경과 연결된 장치에 문제가 생겨서인듯하다. 어느 순간 나는 가상세계를 바라보던 시각을 잃어버렸다. 몸의 다른 감각들은 아직 가상세계의 것들을 느끼고 있지만, 시각정보가 가상세계와 끊어져 버렸다. 흙의 냄새를 맡고 질감을 느끼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볼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다른 감각정보들이 아직 가상세계의 느낌을 전달해 줄 때는 상황이 조금 나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점차 약해지더니 이제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위급 상황에 파라사피언스社의 응급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시각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황당한 일이지만 그밖에 구조를 요청할 방법이 없었다. 가상세계 속에서도 일종의 서비스 센터가 존재하지만, 휴가를 받고 태평양의 한 섬으로 여행을 떠나온 날 벌어진 일이라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양자컴퓨터가 매 순간 수십억 가상인류의 생체정보를 처리하는 가장 안전한 시스템’이라는 광고를 덜컥 믿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접촉 불량으로 보이는 고장을 처리해 줄 사람이 없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살려달라며 생명유지장치 안에서 발버둥을 치고 싶지만, 운동을 위한 근육과 물리적 감각은 이미 퇴화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꼼짝없이 이 생명유지장치 안에 갇힌 채 붉게 빛나는 점멸등만 바라보아야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사실 붉은 점멸등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처음 생명 유지장치 안에 몸을 설치시킨 뒤, 일종의 가상시각을 부트하기 전, 심리적 안정을 위해 점멸하는 것이라고 설명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깜깜한 이 상자 안에 저 붉은색의 LED등 마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진작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수년간 붉은빛의 점멸만을 바라보다 보니 이제는 저 붉은 빛이 내 생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 불이 켜질 때마다 나는 죽음을 다짐한다. 생명유지장치를 스스로 끌 수는 없는 일이기에 몸을 죽이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정신만큼은 나의 의지로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정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뇌를 죽여야 한다. 뇌를 죽이기 위해서는 생명유지장치가 뇌세포의 노화를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노화의 정도는 사고 思考 의 양으로 측정하는 만큼, 사고하지 않는 훈련을 지속해 왔다. 사고를 멈추기 위해 빛의 깜빡임을 몇 년간 세어보기도 했지만, 수학적 사고과정이 세포의 소비로 측정된다는 것을 안 뒤부터는 이제 불빛을 세지도 않는다, 오직 붉은 빛이 켜지는 순간 그 빛과 함께 있고, 빛이 꺼지는 순간 나를 잊는다. 있다는 느낌과, 없다는 느낌, 그 느낌에만 집중한다. 있다와 없다는 의식에만 집중하면 나라는 의식도 잊게 된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영원한 삶 속에서

몸을 초월하고, 정신을 초월하는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사 死 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