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브라

아침에 나는, 당인리 오르막길에서 상수역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내려가고 있었어. 뒷바퀴에 바람이 빠졌는지 아스팔트 둔덕을 지날 때마다 자꾸 턱! 턱! 소리가 나더구나.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나는 양화대교에서 성수대교로 가는 한강 산책로에 무료 공기주입기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어.

“20세기 미술”이라는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는, 실존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싸트르와 보봐르의 계약결혼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었어. 하지만 나는 브레송의 사진 속, 싸트르의 비뚤어진 눈빛을 떠올렸지. 이내 쟈코메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어.

집에 와서 남북 정상이 만나 악수하는 뉴우스를 보다 잠이 들어버렸는데, 꿈속에서는 가엾게도 남측의 대통령이 어떤 제복을 입은 어린아이의 총에 맞아 서거하시더구나. 깨어나서도 잠시 동안 그것이 꿈이었는지도 모르고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어.

저녁에 강아지와 산책할 때는 어땠냐 하면, 간밤에 지나쳤던 아가씨가 갑자기 떠오르더구나. 어젯밤 어느 좁은 골목에서 연인과 전화통화를 하던 한 여성에게 이 녀석이 꼬리치며 달려들었었거든. 그 여자는 귀여워하면서도 난감한 듯 날 보며 웃어보였었지. 그런데 녀석은 그 자리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더니 대변을 보더구나. 휴지로 집을 때 녀석의 변이 좀 더 촉촉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우유를 주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했단다.

얼마 전까지 나는 방을 치우고, 지금은 벩-손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우주적 지속의 일부가 신체라는 이미지에 포착된 것이 바로 개인의 정신이고 기억이라는데, 왜 나에겐 오늘 하루 '포착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는 생각에 하루를 돌이켜 보았던 것이야.

우주는 인위적으로 분할할 수 없게끔 스스로 연속되어 있데, 어쩌면 나라는 이미지-신체는, 이미 그것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에 다다른 게 아닐까 싶어. 기억하기위해 노력하지 않는 그 기억들이, 나라는 신체의 자기동일성을 갖게 해주는 것인지도 몰라.

주변의 이미지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소간의 이점利點에 의해서- 선택이 이루어지고 행동하게 된데, 그렇다면 다소간의 이점에 대해 상당한 회의를 갖고 있는 어떤 정신은, 축적된 기억과 순수지각을 비교해야하는 수고를 덜기위해 의도적으로 기억들을 무의식속에서 끄집어 내지 않고 억압하게 될 수도 있는지도 몰라. 내가 무기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라.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게 있는데, 1940년대의 코브라라는 단체는,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의 화가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래. 나는 아까 속으로, 코펜하겐의 ‘코’. 브뤼셀의 ‘브뤼’. 암스테르담의 ‘아’! 를 외치며 웃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