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버린 세 가지

해질 무렵, 나는 무덤같은 정육면의 석실 가운데로,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초가 놓여져 있는 공간 속으로 던져져, 어림잡아 해가 뜨겠거니 싶을 때까지, 내부의 산소를 모두 소모할 때까지, 가끔씩 무언가 추구하는 듯한 포즈와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것이 자유일까, 아름다움일까, 명예일까, 아니면 그냥 살아있음일까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러다가 아무 것에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있는거야- 라고 생각하다가, 또 그러자니 너무 고상한게 아닐까, 너무 촌스러운게 아닐까, '무위'를 '위'해 치르기엔 그 댓가가 너무 크지않나 하며, 무위를 위해 치르고 있는 월 30만원의 가치를 떠올리다가, 30만원짜리 프로젝터를 하나 사고싶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던져버리듯 고개를 저으며, 그게 아니라 뭔가 크나큰 이유와 사명이 있는 게 틀림 없어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며 프로젝터 대신 그 어떤 고상한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대가리를 굴리고 또 굴리고, 그러다 도저히 갈피를 못잡겠다는 듯 대충 스륵 넘겨 덮어버리곤, 소파 위에 던져놓고, 그 근처에는 앉지도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어서 버린다. 입을 꾹 다물고 나니 왠지 슬프게도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고독을 위로하는 일 보다 시급한 일은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보다가 재수없게 걸린 초, 내 눈치를 보는 듯, 움직이지도 소리내지도 않고 타고 있는 초, 내가 일 분 일 초 쉬어야 할 숨을 가로채 얄밉게 초 위에 앉아있는 초, 내 속이 타는 줄도 모르고 타고 있는 이 초, 내가 쉴 숨을 왜 네가 쉬냐며, 마치 앞으로 쉬어야 할 한숨들을 이 참에 다 뱉어버리겠다는 듯, 내가 쉴테니 너는 쉬어라, 힘차게 훅 꺼버리자, 라는 듯 꺼버리자, 그렇게 매정하게 초를 끄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것이라는 듯 연기가 피어올랐고 나는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한 낯으로, 불을 끄고나면 적어도 이 방의 평수 만큼은 산만한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것을 어떡해 하고 말해서 버린다.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맨 처음 연필로 애매하고 흐릿하게 앞으로 다가올 어떤 결말을 암시하듯 슥슥 이리저리 흔적을 남기고는, 너그럽고 친절한 시선으로,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슬픈 결말은 아닐꺼야- 라며 일단 안심을 시켜두고는, 그 관념과 그 형이상을 몽롱한 심정으로 즐기다가, 조금만 더 놀게 해달라고 떼를 쓰면, 안돼 이제 그만해- 하고 실랑이를 부리는 여유조차 없이 대뜸, 0.1 mm, 아니 좀 더 굵고 짙은, 0.3 mm 쯤 되는 코픽사의 멀티라이너로, 왜 멀티라이너일까, 아무튼 힘을 꽉 주고는, 애써 부드럽게 그린 것 마냥, 그 선을 그을 때에, 마치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는 듯, 가뿐한 체하며, 가끔은 씨익 웃어보이기까지 하며, 선을 그어, 경계에서 간지럽게 주저하던 이 마음과 저 마음을 떼어 놓은다음, 이제는 너희는 보려고 해도 도저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라고 말없이 말하는 듯한, 궁극의 검정, 스페셜 블랙이라고 뚜껑에 적혀있는, 코픽사의 마커펜슬로 단애와도 같은 명도로, 무한한 백색과 무한한 흑색으로, 둘을 이별시키고는, 애초에 그런 연약한 연필자국따위, 개나 줘버려 하는 듯한 명쾌한 손짓으로, 하지만 왠지모를 미련을 느끼며, 손등으로 슥슥 지워, 입으로 훅훅 불어서 버린다. 쓸데없이 또 시간을 허비하여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