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니훼이스

받아놓기만 하고 시작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진척이 없는 일감들만 수북이 쌓여가고 있다.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못봤던 영화들이나 챙겨보며 어슬렁 지내다보니 이제 하나 둘 마감이 다가온다. 혼자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일이 손에 잘 잡히지가 않는다.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예전같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진다. 잘 안되는 탓을 함께 있는 이에게 은연중에 떠넘기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저녁엔 오드리 헵번과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화니 페이스’를 감상했다. 감탄을 자아내는 미모는 물론이거니와 잘난체하지 않는 그녀의 천역덕스러운 연기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예술가들의 소굴같은 파리의 어느 바에서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날아갈듯 몸을 움직이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자기가 자기에게 꼭 맞는 옷을 입고, 일말의 거추장스러운 느낌 없이 그 아름다움을 한 껏 발산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빈에 머물때 동료들과 wirr라는 바 지하에 있던 작은 클럽에서 막춤을 추던 날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서로 가지고있던 어색함을 극복하고 각자 느끼는 그대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던 그 날의 흥겨움. 술과 담배, 땀냄새가 뒤섞인 그 지하 클럽의 퀴퀴한 냄새가 떠올랐다. 내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해 있던 그 시절의 느낌이 그리웠다.

하루를 살며 느끼는 불편은 대게 그런 것이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 편안한 척 하려는 것. 조급증은 열등감에서 비롯되고, 열등감은 나에게 꼭 맞지 않는 크거나 작은 허울을 뒤집어 쓰는데에서 온다. 그렇다고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릴 수는 없는 일. 누군가 옆에 있거나 없거나 나에게 꼭 맞는 옷을 입고 편안하게, 거리낌 없이 생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도 잡아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