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처음으로 먹을 갈고 붓을 잡아 선을 긋는 법을 가르쳐주셨던 분은, 재작년 유월에 타계하신, 남천 송수남 선생님이시다. 어디가서 그 분의 제자였다고 말 할 수 있을만큼, 오랜 시간 배웠던 것도 아니고 생전에 한 번도 따로 찾아뵙고 인사드린 적도 없지만, 어쨌든 수묵을 다루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보고 배웠던 분이기에, 또 이제는 더이상 만나뵐 수 없기에 내게는 더 각별하게 느껴지는 스승이시다.
선생님을 떠올리면, 우선 그 따뜻한 미소가 먼저 떠오른다. 햇병아리같은 손자뻘의 우리들이 한없이 귀여운 마음에 그러셨겠지만, 도리어 우리는 그런 교수님이 더 귀여우시다며 킥킥거렸더랬다. 헌책방 앞 비닐장판으로 덧댄 평상 위에 런닝셔츠 차림으로 앉아서 지나가는 애들에게 다정하게 말붙이고 사탕하나 건네주는 그런, 이웃집 할아버지같은 푸근한 인상의 선생님. 남천 선생님은 생전에, 간결한 붓의 획과 번짐 만으로 산수와 사군자를 그려, 6-70년대 현대수묵운동을 주도하셨던 분이기도 하다. 그런 명성과 업적에 비해 한없이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셨기에, 아마 우리는 친근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존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일학년 일학기 사군자 첫 수업시간을 떠올려본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등장하신 선생님은, 두툼한 손을 저어 일단 학생들을 자리로 불러 모아 놓으신다. 별다른 부연 없이, ‘자, 보세용-’ 하며, 주변에 있던 붓 하나를 골라 화선지 위에 슥슥 망설임 없이 매화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둘레로 옹기종이 모여 앉아 금방 조선시대에서 시간을 거슬러 내려온 풍채좋은 선사의 붓놀림을 보기라도 하는 듯, 숨을 죽이고 지켜봤더랬다. ‘자 이렇게 가지는 까실까실하게, 꽃은 여리여리하게, 하는거예요잉!’ 하며 순식간에 매화그림 체본을 하나 떠 놓으시고는, '다음시간까지 이백장 그려오세용!’ 하며, 교실 밖으로 홀연히 손을 흔들며 나가시는 것이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우리는,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좋아하면서도 과제가 많다며 불평하기도 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먹을 갈았다.
선생님이 좋고 수묵의 검정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차근차근 원리와 기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식 실기수업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수묵화를 잘 그릴 수 있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기운생동 氣韻生動이니 골법용필 骨法用筆 이니-하는 '육법'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같은 법어나 선문답처럼 당연하고 두루뭉술하게만 느껴졌다. 선배들은 종종 술자리에서 적어도 십년은 그려야, 나 사군자 좀 그리오.-라고 말 할 수 있다는 식의 말들을 후배들에게 하곤 했는데, 머리 굴릴 생각 말고 연습에 정진하라는 충고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연륜이 없으면 내 그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구나- 하며 비뚤어진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후로도 백묘나, 산수화 수업을 통해 수묵화에 흥미를 갖고 수업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이내 '먹은 다루기 힘들고 또 고루하기만 하다.'는 식의 불평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도 물과 섞이면 얇은 화선지 위에서 춤을 추듯 퍼져나가는 먹의 분방한 성질머리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먹의 자유로운 물성이 내게는 큰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오늘 갑자기 송수남 교수님을 떠올리며 수묵에 대해 글을 쓰게된 건, 엇그제 파주 열화당 책박물관에서 구입한 월전 선생의 수필집, <월정수상> 덕분이다. 수묵 작업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선생의 글을 읽다보니, 갑자기 먹 향을 맡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게 벼루와 붓을 꺼내어 생각없이 이런 저런 것들을 그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창시절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구상과 스케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또 정교하게 칠하던 내 스타일따위는 잊어버리고, 애인에게 그려줄 버드나무 그림이나 밥상머리에 붙여놓을 그림 따위를 무심히 그리다보니 불현듯 새롭다! 재밌다! 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이 굳이 반듯한 선으로 표현되어야 할 필요도, 또 그 반듯함이 내 고유의 무엇일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십수년전 남천 선생님이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몸소 보여주고 가르치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런, '그림을 그릴때의 천연덕스러운 마음’ 이었던게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