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봐리를 읽었다.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삶이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이기에 이리도 사람 심리에 (특히나 여성의) 밝은지, 의학지식에는 어떻게 그리 해박한지,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 가장 많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담아놨는지를 감탄하며- 연보를 들춰본다. 책을 읽다보면 -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 작품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에 몰입하다가도, 작품에서 빠져나와 글쓴이의 인물과 정경에 대한 묘사나 놀라운 비유 등에 대한 경탄으로 이어지는 일이 더 많다. 그리고 이내 그 작자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누구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는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따위의 사적인 부분이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삶 속에서 나와의 유사성을 찾아 좀 더 인간적인 면모를 찾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런 위대한 글을 쓸 정도의 기구한 삶을 살았으리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 위대한 자를 인간계로 끌어다 놓고, 그 역시 평범하고 안전한 삶을 살았으니 나라고 이런 작품을 못할 것 없지 않나 하는 얕은 위로를 얻기 위함일테고, 후자의 경우라면 역시 이런 위대한 작품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지- 하며 저 높이로 작가를 추켜올리고는 그의 위치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며 또 다른 식의 위로를 얻기 위함이리라. 이 둘 모두 같은 창작자로서 질투심을 다스리기위한 방책일 것이다.
가끔 인터뷰를 할때면 나는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사라져버리고싶다'라던가, ‘작가의 설명은 작품을 감상하는데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사실 작품 뒤에 숨겨진 생각들이라는 것들이 워낙 비실비실하고 소박한 것들인데다가, 내 삶이라는 것도 지나치게 평범하기 그지없기에, 괜히 그들이 가지고있을 기대나 환상을 무너뜨리고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이유이다. 이게 다, 작가는 뭔가 유별나고 특별한 삶을 살고 있어야한다는 내 오랜 편견에서 기인한 비뚤어진 생각 때문이다. 최근에서야 내 삶이나 작품이나 있는 그대로 보여져도 상관 없다는 식의 생각이 자리잡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 졌다. 하여 글도 그림도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고 쓰고 그리는 것이, 요즈음 최대의 관심사. 하여간 보봐리 독후감을 쓰려다가 영 다른 글이 되어버렸다.
*사진은 오늘 들었던 파주 열화당 책박물관에서 발견한 오래된 책. 누군가 수십년전 꽂아둔 낙엽이 그대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