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볕이 좋은 날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책상 앞에 한참 앉아 있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구상한다는 핑계로 소파에 드러누워 두 시간을 보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창밖을 내다보니 다섯 시가 돼가는데도 해거름이 아직 멀었다. 해가 정말 길어졌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태양 빛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커다란 지구의 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사는 이곳은 이내 태양 반대편 어둠 속으로 감춰질 것이다.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태양계 전체의 거대한 회전 운동을 떠올려 본다. 그 장엄한 움직임을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슬프게 느껴진다. 그것을 매 순간 느낄 수 있다면, 인간은 다만 지구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붙어 살아 가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처럼 다음 주까지해야 할 일 때문에 고민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창밖에 느린 걸음으로 볼거리를 찾아 헤매는 수많은 행락객도,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도 부질없는 존재로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잠이 이마에서 코를 타고 솔솔 내려온다. 리오타르니 발터벤야민이니 유명 철학자의 말을 빌려 기획된 전시에 그림을 출품하기로 했다.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거절하지 못해서 해야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며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전시-라고 요약하면 될까… 아무튼 그런 내용의 전시란다. 사랑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한 어느 먼 나라 철학자의 자기연민에 찬 생각들이 어느 날 최신 철학으로 소개되어 번역되고 이 나라 젊은 독자들의 손에까지 들려 읽히게 된 것이리라. 그래 맞는 이야기다- 공감하여 이렇게 전시로 기획된다. 한 철학자의 주관이 책으로 만들어져 이 사람 저 사람의 정신을 매개로 흐르고 흘러 나에게까지 당도하는 그 모든 과정을 상상해보면 그 또한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느낌이다. 졸음을 이겨내려고 나오니 광장에는 오월의 맑고 깨끗한 풍경을 배경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커다란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학생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있는 연인, 개를 데리고 나온 노인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오늘따라 내 눈에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슬프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