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먹었는지 목줄에 메인 개마냥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샤워만 다섯 번.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얼음만 찾아 마시니 식도가 얼얼해지며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침부터 벽에 큰 종이 한 장을 붙여놓았다. 당장 그려야 할 그림이 있다. 밑그림도 다 있으나, 도무지 시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더위는 핑계일 뿐, 그리기가 싫었다. 그리기 싫다는 느낌이 든 것은 아마도 처음일까. 하고 싶은 것이 일이 되면 하기 싫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상업적인 요청에 의한 그림을 그릴 때도 일이라 느꼈던 적 없었는데 이제 제법 일처럼 느껴진다. 다 돈 때문이다.
올해는 그림을 꽤 팔았다. 왜냐하면, 올해부터 팔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할인도 해주고, 묶음으로 팔기도 하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붙잡고 적극적으로 팔았다. 그걸로 상반기를 먹고 살았다. 그토록 오래전부터 바라던 삶이, 그림으로 먹고사는 삶이 가능한 일임을 확인한 터라 기쁘기도 하고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갔던 것도 사실이다.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목돈'이라는 걸 꿈꿔보기도 했다. 하지만 번 만큼 (기다렸다는 듯) 나갈 곳도 점점 많아지기만 하더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게 아니라 십 년간 정성을 다해 숙성시킨 와인을 쏟아붓는 느낌. 맥이 빠진다. '목돈'이라는 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더 약아빠지고 얼마나 더 절실하게 매달려야 할지는 눈에 보이지만,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기는 싫다.
그리고 싶은 그림보다 그려야 할 그림이 점점 더 많아진다. 어쩌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없는 것일까. 창작 의욕을 잃어버리고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매너리즘이라면 매너리즘이 맞고, 발전이 없는 것이 슬럼프라면 슬럼프가 맞겠다. 무엇이 되었건 멈추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구상하고 그리는 일이 아니라 돈벌이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오늘도 전시장에서 소개받은 웬 사모님께 연락이 와, 어떤 그림을 사겠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팔 수 있을지 짧은 순간에 재빨리 궁리하는 나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그림을 팔아서 무얼 하겠다는 건지…
막상 그림을 팔고, 환산된 금액을 손에 쥐고 나면, 그 그림을 그린 것이 마치 (수중에서 금방 사라지고 말) 돈을 위해 그린 것처럼 느껴져 어쩐지 기운이 빠져버린다. 그림은 갖고 있어도 불안하지 않지만, 계좌에 들어와 있는 환산된 금액은 늘 불안하게 한다. 그림은 두고 있으면 사라지지 않지만, 돈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월급을 받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나에게 큰 의미가 없는 노동력의 댓가로 받은 돈은, 먹고 마시는데에 써도 아깝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이 아닐까) 하지만, 그림을 팔아서 번 돈은 다르다.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해 걷어내야 할 쓸데없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생산한 가치를 팔아 생긴 이득은, 더 큰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만 쓰면 좋겠다. 아무튼, 올 여름은 정말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