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llhovden

일곱 시에 일어나 (일곱 시라니!) 아침을 먹고, 간단히 산책을 했다. 특별한 장소를 찾아갈 필요 없이, 그저 건물 밖으로 나가면 거대한 산과 바다가 기다리고 서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아주 먼 곳이 다가와 있는 기분이랄까. 시시각각 다른 풍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달리 말하자면 이곳 풍경은 바라보는 주체를 멈추게 한다. 걷다가, 일하다가 넋이라는 것을 잃게 하고 그곳을 향해 서서 바라보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가서 나에 대한 찬가를 지어 바치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창문 너머 보이는 거대한 산(다음 날 Hans 씨에게 물어보니 Trollhovden 라는 이름의 산이었다. Troll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산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걸까?)을 그렸다. 대학에서 처음 동양화를 배울 때, 먹빛으로 형형색색의 자연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고민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찍어놓은 사진과 눈앞에 보이는 산을 번갈아 보며 정교하게 그려나가다, 나중에는 손이 가는 대로 그렸다. 풍경을 그리는 마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좀 더 단순하게, 혹은 좀 더 정교하게, 어쩌면 좀 더 감정을 담아 그려볼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으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점심 무렵에는, 옆방의 Naï 라는 작가가 찾아와,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의 전시장에 갈 예정인데 함께 가고 싶은지 내 의향을 물었다. 생각해보고 알려주겠다 했지만, 이미 집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전시에 대해 조금 찾아보니, 특정한 시각에만 드는 자연광과 제임스 터렐 특유의 색감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 전시의 요要인듯 했다. 하지만, 인간의 재주로 창박의 저 눈부신 자연보다 더 큰 감동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함께 생활하는 작가들과 친해질 기회를 놓쳐 아쉽긴 했지만, 이 공간을 더 즐기기로 한다. 

풍경화 하나를 마무리하고 다시 산책을 나갔다. 한스 씨가 건물 앞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몸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다 챙기고, 또 아이들을 매시간 돌보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산책하러 가기에 좋은 코스가 있느냐 물어보니, 어제 안전수칙에 대해 설명할 때처럼, 아주 상세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마을로 나가려던 참에 독일에서 온 작가 Phillipp을 만났다. 아침부터 나와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 한다. 산정에서 무슨 세례라도 받고 나온 사람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는 산 위에서 바라본 풍경의 잔상이 남아있는 듯했다. 나중에 함께 올라가기로 약속하고 Ålvik 마을 중심가로 향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읍' 정도 되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백여 채 남짓, 삼각형의 지붕을 한 집들이 길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며 옹기종이 서 있었다. 새들과 친해져 보려고 빵부스러기를 챙겨 나왔는데, 까마귀며 까치며, 멀찌감치 다가오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래며 달아났다. 고양이도 개도 낯선 동양인을 보고는 경계하듯 어디론가 숨었다. 언젠가 친해질 날이 있으리라. 

한스 씨가 알려준 길을 따라 인적이 드문 마을 오솔길을 걸었다. 근 몇 년간 이처럼 '해야 할 일들'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있었던가? 내키는 대로 걷고, 마음 가는 대로 멈춰 섰다. 사진도 찍고, 풀숲에서 이것저것 만져보고 주머니에 넣었다. 마음이 무척 가벼웠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갑자기 물길이 열릴 때처럼,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자, 무엇이든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루를 온전히 보냈다. 낯설고 생소한 기분. 다른 어떤 것에도 깊게 마음을 쓰지 않았고, 온전히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구상하고, 그리고, 걸었다. 그렇게 조용히 오늘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