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eg

꿈에 시달렸다. 많은 아는 사람의 얼굴이 등장했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잠이 모자란 기분이었지만 한국에서만큼 떨쳐내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일어나야 할 이유가 더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일어나 창밖의 풍경을 다시 보고 싶고, 상쾌한 기분을 맛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못한 샤워를 하고 주방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부지런한 필립이 나보다 먼저 나와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어제 제임스 터렐의 전시가 어땠느냐는 질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금 아쉬웠다고 한다. 한국에서 올라프 엘리아슨 전시를 관람했을 때 나 역시 사람이 많아 아쉬웠다고 호응했다. 자연스럽게 여러 대화로 이어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몇 해 전 오스트리아에 머물며 외국 친구들 사이에서 겪었던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의 작가라면, 어쩐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는, 연대감 같은 게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대화 중에 나는, 이곳에 오니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또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다며, 서로 격하게 공감했다. 어휘가 부족하고 문법이 제멋대로여도, 마음이 통하는 경우엔, 이렇게 대화하기 쉽고 편안하다. 이곳에서 무엇을 할 계획이냐 묻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필립은 자기가 방콕 레지던시에 있을 때의 경험을 얘기해줬다. 가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고, 그러다 전혀 예상치 못 한 재료와 도구로 비디오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나보고 새로운 컬러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한다. 안될 것 뭐 있나!

오전에는 이곳에 오기 전에 끝마쳤어야 할, 벽화를 그리고 디자인했다. 직접 칠하는 대신, 이미지를 디자인해서 그들이 완성하도록 할 계획이다. 어서 새로운 그림을 스케치하고, 새로운 재료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조금 하기 싫은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 무엇도 급할 것 없다. 

점심 무렵에는 레지던시가 속해있는 올빅Ålvik 마을의 공업박물관(민속박물관에 가까운) 을 방문하기로 했다. 내가 없을 때 정해진 일정이었지만, 흥미가 생겨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를 인솔해 준 사람은 Bjørn Otto 씨였다. 목소리가 좋다-했는데, 알고 보니 노래하는 음악가였다. 다 함께 (오늘 아침에 Mai 라는 친구가 떠났다!) 마을 초입에 있는 민속박물관으로 향했다. 100년이 넘은 건물이며,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살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시대별로 각기 다른 방이 꾸며져 있었다. 호기심 많은 작가들 답게, 건축에 대해, 장식에 대해, 사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오토씨는 흔쾌히 설명해주었다. 

올빅이라는 마을은 지금은 관광객들이 종종 찾는 작은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공업단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노르웨이가 몹시 가난했던 20세기 초반, 처음 수력발전을 위해 공장이 들어서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철강 산업이 발달하면서, 마을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는 나치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라 한다. 당시 송수관을 폭파시키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잔해가 전시되어 있었다. 공장 근로자들이 사용했던 오래된 타자기와, 각종 실험도구, 빛바랜 사진들을 구경하며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만져보고 물어보았다. 

박물관 2층에는 1920년대, 40년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방이 꾸며져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생활용품들이 많았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아궁이의 역할을 하는, 석탄으로 음식을 덥히는 가열기구가 있었고, 그 열을 오래 가두기 위한 여러 주방용품,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보관하기 위한 시설들... 물건마다 그런 모양이어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응접실로 보이는 어떤 방 한쪽에는 작은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는데, 산책을 하며 본 풍경들, 잡지에서 본 사진을 따라 그린 그림, 만화책에서 본 그림, 등 재미있는 스케치가 많았다. 박물관에 가면, 어떤 '사람'의 흔적을 느끼기 쉽지 않은데, 그림을 보니 확실히 어떤 개성을 가진 인격체가 살았다는 것이 실감 나게 느껴지는 듯했다. 손으로 그린 그림이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것처럼, 나는 한참 동안 그 스케치북을 들춰 보았다. 

박물관 견학은 생각보다 굉장히 유익했다! 오토씨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나중에 든 생각은, 박물관 보다, 자신의 집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 뮤지션이기도 하면서,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를 레코딩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교회 건물로 쓰던 곳을 집으로 살고 있다더니, 과연 집 한가운데에 커다란 연주회장이 꾸며져 있었다. 그의 스튜디오와, 그가 수집한 악기들을 보고, 들었다. 그라모폰에서 만든 오래된 축음기를 시연해주기도 했는데, 처음 들어본 기계식 축음기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기로 작동하는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목관악기에서 나는 듯한 따뜻한 음색이었다. 작년에 오슬로의 가정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집 안에서의 생활을 사랑하는 듯했다. 아무것이나 대충 사들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세심하게 물건을 들이고 관리해 온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가 내어준 커피를 마시며 이곳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하고, 유쾌하고, 또 누구에게도 무해한 그런 대화였다. 오토씨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른 작가들과 좀 더 친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함께 있는 이들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친한 친구인 것처럼 느껴졌다. 

작업실로 돌아와, 저녁까지 벽화 도안을 마무리했다. 내일부터는 정말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일은 필립과 산을 오르기로 했다. 작업은 내일 모래부터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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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하는 내내 노르웨이 작곡가 Edvard Grieg의 음악을 들었다. 바그너처럼 비장한 느낌도 있고, 쇼팽처럼 서글픈 느낌도, 드뷔시처럼 낭만적이기도 하다. 선율이 무척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Bergen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혀있다고 하니, 베르겐을 방문하면 그의 묘지를 찾아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