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빅은 여전히 흐리다. 일주일 중 하루 정도 해가 나고, 나머지는 주야장천 비가 내린다. 어제는 낮잠을 조금 자고 아침까지 그림을 그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밤새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로부터 점차 단절되고 있다. 혹은 나 스스로 단절시키고 있다. 몇 년 전에도, 또 그로부터 몇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기분. 조금 지나면 아마,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 기대하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느낌. 혹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어디로든 옴짝달싹 튀지 못하는 딱딱한 내가 녹아내리고 또 무화 되는 느낌. 방랑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선명한 경계도, 묵직한 무게감도 필요치 않다. 그때그때 다른 모습이어도 상관없으리라. '나'라는 건 이토록 불명료하고 또 가변적이다. '나'로서는 이런 흐리멍덩하고 불명료한 상태가 무척 편안하다.
반면 특별한 관계는, 깊은 관계는, 오래 지속한 관계는, 하나의 성격을 가진, 상대방이 기대하는 올바른 '나'의 상이 생겨버리고, 또 그 기대를 저버리기가 무척 어렵다. 어쩌면 그렇게 무한한 신뢰를 갖고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형성된 '나'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숙한 인격', '어른스러움'인 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잘 녹아든,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라는 말에는 늘 그 자리에서 가정과 사회를 위한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어른'이라는 자가 이랬다저랬다, 혹은 무책임하게 자리를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성격을 바꾸어 버린다면, 신의를 져버렸다거나, 덜 성숙하다거나, 철이 덜 들었다는 얘기를 듣기 십상일 테니까.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해 볼까. 이러면 어때, 저러면 어때, 긴장을 조금씩 풀리는 듯한 하루. 내키는 대로 하루를 보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어깨에서부터 등까지가 시큰거려 그림을 오래 그릴 수 없다. 누워 있어도 편하지 않다. 스트레칭을 조금씩 해봐야겠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