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제 필립과 산에 다녀왔다. 그저께 짜증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점심때까지만 하더라도 외출할 마음이 없었는데, 하늘이 무척 파랬다. 오랜만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날씨도 그제만큼 춥지는 않아 보였다. 밥을 먹기 시작할 때쯤 지친 표정의 필립이 들어왔다. 지난번 산행 이후로, 그리고 몇 번의 낚시 실패 이후로 새로울 것이 없었던지라,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왠지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싶기도 해서 함께 산에 가자고 했다. 처음엔 시큰둥한 것 같더니, 출발할 때 즈음엔 신난 표정의 필립. 나이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데, 마음은 영락없이 십 대 소년 같다. 새로 작가들이 입주한 이후로, 달라진 분위기에 대해서, 작업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오랜만에 나누며 산을 올랐다. 지도상에서 보면 Naglaklepp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를 향해 약 800미터 고지를 오르는 길이었다. 처음엔 그 높이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중간중간 필립이 진행하고 있는 사진작업을 도와주며 쾌적하게 산행을 했다. 꼭대기까지 가볼 생각이 있냐는 말에, 오기가 생겨 그러자 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눈을 밟고 올라가다가, 정상 부근에는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올라가야 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한 걸음 내딛기도 쉽지 않았다. 푹푹 빠지는 눈에 정강이 아래가 좌우로 뒤틀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냉기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발은 꽁꽁 얼어붙기 시작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싶었다.
정상에 올라 바라보니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한 햇살을 받는 하당거 피오르의 전경이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서편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허연 눈을 뒤집어쓴 산맥은 햇빛에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반대편 하늘이 매우 아름다웠다. 푸른회색빛의 하늘에서 보랏빛으로, 핑크빛으로, 다시 대낮의 푸른 하늘빛으로 이어지는 하늘색 아래로 분홍빛의 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바다는 청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색감의 조화는 본 적이 없었다.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추위를 더는 견딜 수 없어 간단히 요기를 하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는 곧장 하산했다. 어제는 그렇게 산에서 내려와 쓰러지듯 하루를 마쳤다.
오늘은 아주 평화로운 하루였다. 점심부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일기예보대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 작업 중이던 그림을 마저 그리는데 숨이 가빠왔다. 한국에 두고 온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이 이내 무거워지고 가슴이 아프다. 어쩌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잉크로 그리는 그림이 갑갑하게 느껴져서 새로 사 온 부드러운 콘테로 그림을 조금 그렸다. 마르셀의 방에서 가져온 환자용 침대(마르셀의 방은 오래전에 의사의 진찰실로 쓰이던 곳이다.)를 창가 난로 옆으로 옮기고, 그 위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 버드란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 '권태'에 대한 장이었다. 읽다 보니 내가 한국에서 느꼈던 권태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부류의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보니 현관 앞에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빗자루로 눈을 치워내다가 무심코 눈사람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세 시간 동안 눈사람을 만들었다. 모두가 좋아했다. 필립은 아끼는 위스키를 한 잔 내주기까지 했다.
별달리 한 것은 없지만, 마음이 여러모로 넉넉한 기분이다. 내일이면 한국에서 떠나온 지 한 달이 된다. 이곳 주인 한스 씨는 내가 도착 한 날, 한달 쯤 지나면 쫓기는 듯한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질 거라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