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1, 2017

어제는 함박눈이 오더니 오늘 밤엔 비가 세차게 들이친다.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엉망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니 엉망일 것도 없다. 나에게는 어떤 감정들이 남아있는지 가만히 살펴본다. 

그리움. 그리움은 문득문득 찾아온다. 왁자하게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빈 속을 채우려 서울 종로 뒷골목 어딘가를 헤매고 다닐 때 나던 냄새라던지, 행복에 겨워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추던 너의 모습. 천진난만한 미소. 그런 것들이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 온화한 장면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다. 무엇이, 어떤 냉혹한 결심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문득 문 밖에 나설 때마다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어디일까?를 의심한다. 따뜻한 한끼,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맵고 짠 음식, 온화한 재잘거림, 따뜻한 방바닥, 그런 것들로부터 어떻게 떠나올 수 있었을까? 그 착한 마음씨들을 나는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좇아 가는 것일까. 그것은 자유일까? 명예? 성공? 혹은 자존심?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지난 이 년간의 삶을 부정하고서 어떻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그것부터가 난관이다. 

삶은 어쨌거나 잘도 흘러간다. 이상하리만치 순탄하다. 삶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쾌적하다. 걱정할 것이 없다. 어쩌면 걱정할 것이 없어 걱정인지도 모르겠다. 걱정거리가 될 만한 것이 만에 하나라도 나타나면 내 마음은 그리로 가 철썩 달라붙는다. 

어제는 헤르만 헤세의 '방랑' 수기를 읽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향한 헤세는 나무에, 산에, 물줄기에 감탄을 늘어놓는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 주방에 내려왔는데 마침 필립이 거기에 있다. 언젠가 알프스 산맥을 따라 장거리 하이킹을 떠날 계획이 있는데 함께 할 생각이 있느냐 묻는다. 어찌된 일일까. 요즘 들어 이런 일을 자주 겪는다. 마치 앞으로의 내 삶이 이미 어딘가에 치밀한 각본으로 정리되어 있는 듯 하다. 작가는 연극 속 주인공이 의심을 품지 않을 정도만큼 우연적인 사건을 섞어놓지만, 가끔 이렇게 필연을 남겨놓은 것이 아닐까. 실수로. 어쨌든 참으로 멋진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계획을 따라 움직이는 것일테니, 기분따라 움직이는 '방랑' Wanderung은 아니겠지만, 수 백만원 돈을 지불하고 뉴욕에 가서 살아보겠다 하는 계획 보다는 멋진 계획임이 분명하다. 

방랑도 멋진 계획이다. 무한정 걷는 것이라면, 나 역시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