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화론

내가 그림에 사용하는 재료는 종이와 붓과 검은색 안료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이 재료들을 전통재료라 하기도 합니다. 종이는 지, 붓은 필, 검은색 안료는 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무엇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종이는 희고 안료는 검다'라는 것입니다. 흰 종이에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붓은 그리려는 형상에 알맞게 적당히 굵고 적당히 긴 것이면 족합니다.

붓에 검은색 안료를 묻혀 흰 종이에 바르면 선명하고 단단한 자국이 남습니다. 붓털에 힘을 주어 가느다란 검은 선을 긋기도 하고, 부드럽게 하여 넓은 면적을 칠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붓을 움직여 나타난 형상은 모호한 구석 없이 명쾌하고 간결합니다. 나는 그 느낌이 좋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붓을 잡은 내 손끝이 그리고자 하는 바로 그 길로 붓이 지나가 검은 자국을 내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재료, 물질과 상호작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숭배하지 않고, 그것과 싸우거나 대결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사용합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형상을 잘 그려낼 수 있는 재료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가 그리려는 형상은 사람의 형상입니다. 사람의 형상은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바라는 사람의 형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몸매의 특별하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을 특징으로 그립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려고 골격과 동세가 잘 보이는 검은 몸을 하고 있고, 특별하지 않은 얼굴을 그리려고 표정이 없는 얼굴을 그렸습니다. 즉, 특별하지 않은 몸을 가진 특별한 사람을 그립니다. 표현은 위에서 말한대로 검고 분명하고 명쾌한 형상이면 좋습니다.

사람의 형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존재에 관한 질문들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 자연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의 감각과 경험, 기억을 동원합니다. 그러므로 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람이므로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 관한 이야기, 즉 사람이라는 존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을 둘러싼 자연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즐겨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나에게 '나'라는 사건이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입으로 전해지고 몸짓으로 전해집니다. 또 글과 그림으로도 전해집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말로 전해져도 글로 읽혀져도 또 그림으로 보여져도 상관 없습니다. 그림으로 그려져야 할 필연은 없습니다. 말로 전하면 좀 더 생생하게, 글로 전하면 좀 더 진지하게, 그림으로 전하면 좀 더 간편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전달이 편리하고 상황에 적절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렇게 개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