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잊기 위한 그림을 그립니다. 마음속에 맴도는 생각들, 가슴에 응어리진 감정들, 미래에 대한 걱정과 실체가 없는 망상들을 잊기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실타래처럼 얽힌 생각은 그 자체를 시각화함으로서 마음에서 멀어집니다. 지난 일에 대한 후회, 분노, 죄책감, 억울함 등의 감정들은 그림 속 인물에 투영하여 그대로 타자화된 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듯 마음을 산란케 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 불안, 망상들은 복잡하고 정교한 도상을 따라 그리는 과정에서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저의 그림 그리기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끝없이 부유하고 산란하는 마음을 붙잡고 챙기고 다스리는 일종의 명상입니다. 하여 나의 그림은 동시대 예술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이정표를 제시하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인적인 기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공감과 감동, 비판과 냉소, 영감과 자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런대로 나의 작품이 사적인 기록으로서만이 아닌 유의미한 공공의 작품으로서, 또는 공공의 기록물로서 언급되고 기록되고 재생산되고 보존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