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첩되어 서로를 만나지 못해 지나쳐버리고 마는 이런 이미지들은 2009년 이후 꾸준히 떠올렸던 이미지이다. ‘나’와 ‘당신’의 경계를 분명히 알지 못해 벌어지는 오해와 그로 인한 좌절을 겪으며 떠올랐던 이미지들이다. 오해라는 것이 주로 너무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혹은 너무 뒤늦게 이해하며 생기는 경우가 많아, 공간 안에서 어긋난 위치로 표현되곤 하였다.
마치 작은 카약을 타던 사람이 갑자기 거대한 유조선을 운전해야 하는 조타수가 된 것처럼, ‘나’라는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나는 늘 거추장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장애물을 요리조리 잘 피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나의 끄트머리를 잘 파악하지 못해 늘 겹쳐지고 부딪치고 파괴되어 침몰시키거나 침몰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오해, 그런 뒤뚱거림, 그런 충돌사고는 아마도 애초에 ‘나’ 라는 외곽선이 있는 실체라고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한다. 실체가 없는 추상적 - 애초에 단일한 존재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없는 - 존재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관성으로 시간과 장소를 부여하고 마치 부피와 무게가 있는 물리적 실체로 받아들이다 보니 장애가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와 당신은, 어느 지점을 점유한 채 머물러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몸 바깥으로 자유롭게 넘쳐나거나 드나들며 스치는 바람, 혹은 기운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기온과 기압에 따라 공기가 이동하듯, 뜨겁고 성난 기운과 차갑고 우울한 기운,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서로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는 것뿐, 우리가 믿는 ‘나’라는 것은 스치는 그 기분들에 그저 처하고 지배당한 다음, 그 자리에 남겨지는 자리이고 흔적일 뿐이다. 그저 나에게 머물던 어떤 기운과, 당신에게 있던 어떤 기운이, 나와 당신이라 믿고, 나아가 몸이라는 경계 안에 가두어 ’나‘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