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작품 속 인물들은 왜 늘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처음 받아보았습니다. ’그러게, 왜 그럴까?‘ 처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요. 눈을 감은 것이 아닌걸요. 정말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나요? 어, 그렇네요!” 얼마 전 인터뷰 때에는, 같은 질문을 받고서 문득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화초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화초에는 얼굴이 없잖아요. 어디가 정면인지, 어디를 바라보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 의아하게 느껴져서 쓰기 시작한 짧은 시였습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설프게 대답하고 만 것이 후회되어,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고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어릴 적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었던 저는, 바라봄을 당하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버스를 타면 누군가가, 아니 그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을 거라는 확신에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되는 일도 있었고. 스무 살이 넘어 처음으로 구했던 이태원 공동 작업실에서는 내가 작업실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몇 시간이고 소변을 참는 일도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발표해야 할 때면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며 안으로 쪼그라들고 마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늘 부담스러웠고, 그 누군가가 없는 밀폐된 곳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가상의 관찰자를 끊임없이 상정하고 그 그림자와 싸우고, 논쟁하고, 변명하고, 그로부터 숨기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 속에 그런 외부의 관찰자에 대한 상징이 자주 나오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겁니다. 나를 관찰하는 타인, 그 시선에 움츠러든 나를 관찰하는 나 자신, 또 그 모든 일들을 거시적으로 관찰하는 어떤 존재. 이러한 시선으로부터의 탈주, 바깥의 바깥, 외부의 외부의 외부-와 같은 주제들은 저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습니다. 추후 이런 연속적인 빠져나옴에 대해 또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수줍은 많은 소년이 세계 속에 던져저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실패를 거듭하며 그 안에서 조금씩 자기 존재감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어른이 되어가며 어릴 적의 수줍은 성격은 많이 고쳐나갔습니다만, 여전히 저는 사람들의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저는 얼굴이 없는 것들이 좋습니다. 식물을 바라볼 때, 자연을 바라볼 때 그것에 얼굴이 없어서 비로소 편안히 그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위에도, 나무에도, 산에도, 호수에도 얼굴이 없어 그것을 바라보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불편함이 없어 그제야 나 자신을 세상에 편안히 비추어보거나 흘려보낼 수 있다고 할까요. 긴장하지 않고 바라보기가 가능한 그런 환경에서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밤이 작업하기에 좋고 겨울이 산책하기에 좋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식물과 달리 사람의 얼굴은,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구멍과도 같아서,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마치 블랙홀 속으로 정보들이 빨려 들어가듯, 하고 있던 말도 잊어버리게 되고 또 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기곤 합니다.
얘기가 길었습니다만, 저는 그래서 그림 속 인물들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마치 자연처럼 자기 자신에게 골똘하고, 자신의 사유에 몰두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몰입해 있는 존재는 아름답고, 그들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설 때, 골똘히 자신의 일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싱긋 미소가 지어지는 것처럼 그림 속 저의 인물들도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을 잊을 만큼 자기 자신에게 빠져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림 속 인물의 삼매경에 조금은 질투의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치-‘하고 고개를 돌려 이제 자기 내면의 일에 빠져들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로 가득 차서 전시장을 빠져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관객분들께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