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코비치 말코비치

너에 관한 나의 생각도 너의 나에 관한 생각도, 나의 나에 관한 생각도 과잉이이지만 또 인구가 과잉인 만큼, 이미지도 과잉이고, 멜로디도 리듬도 과잉이다. 과잉이기만 하면 모를까- 그 모든 과잉이 버퍼링 할 여유도 없는 리얼타임이라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마치, 내가 담아낼 수 있는 감도는 고작 100쯤 되는데- 자꾸만 어딘가로 떠밀려가고 있어서 무엇 하나 촛점도, 거리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겠는 그런 기분.

왠지 그런 지친 미스터김에게 눈치 없는 누군가는 도산공원 근처에 있는 '느리게 걷기' 라는 웰-빙 카페에 가서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라는 책을 읽으며 강타의 '느리게 걷기' 라는 음악을 들어봐- 라고 권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내게 유용한 느림테라피 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미 만연된 트렌드로서의 가치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게 된다.

매년- 그 해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관련 책자가 베스트셀러 코너를 잔뜩 차지하게 되는 것 처럼, 내게 소중하고 중요해 보였던 가치들도 그렇게 어느 날 마케터들이 물건을 팔아먹기 좋은 키워드로서, 컨셉으로서만 이용되어지다가 단물 다 빠진 껌처럼 금방 또 진부해져 버린다.

전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시대적가치나 갖가지 -이즘들로 부터 초월하고 싶은 욕심은 없다(있긴 해). 하지만 그런 과잉들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독특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일말의 여지 조차도 뺏겨버리는 기분이 들 때엔 참 슬프다.

물론 사람마다 달라서(망할)- 어떤이는 '필사적으로 독특해지기' 로서만 존재감을 획득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이는 '일반화되기'에 진정한 의미로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나처럼 전자인 경우엔- 내 생각과 너의 생각이, 내 생각과 우리 모두의 생각이 비스무리해서 그게 그거고, 거기서 거기 라는 식의 결론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이다. 마치 어딜가나 말코비치씨들이 말코비치 말코비치 라는 말만 하는 세상에 온 것처럼 괴상망측한 기분이 드는 그런.

이런 푸념을 털어놓는 지친 미스터김에게 또 어떤 눈치 없는 누군가는 이런 진부한 충고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린 그저 우리 자신인 것 뿐이야. 우린 각자 스스로가 자신만의 것을 찾아야 해!' 라고. 그렇다면 나는 굳이 우리의 무스타파몬드씨를 인용할 것도 없이 '그러렴-' 하고 대답할 것이고. 그 또한 먼 산을 바라보며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러시던가-'

어쩌면 세심하고 터프한 누군가가 이렇게 타일러 주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독.특.해 진다는 것이 뭐가 얼마나 대단한 것 이길래 그러니? 또 진-부-해 진다는 것을 혐오해야 할 이유는 뭐니? 그저 너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그 '진부함' 이라는 단계로 끌어내리고 싶다는 치기어린 동기- 그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