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비스, 트레비스, 트레비스

웃거나 우는 일 보다.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침묵하는 것이 더 어렵다. 어렵지만 그 것을 통해서 느껴지는 어떤 평정심, 어떤 자유로움,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을 느껴본 적 있다면 그것을 위한 노력이 결코 헛수고가 아님을 알게 된다. 침묵을 획득하기 위해 무엇인가로 부터 심각하게 낙심하거나, 상실감에 절망하거나, 애써 그 무엇인가를 초월할 필요는 없다. 낙심이든 절망이든, 초월이든 침묵 이전에 낙심한 표정을 짓기 위해, 절망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초월한 척 하기 위해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냥 입을 닫기 위한 노력과 얼굴 근육을 천박하게 수축, 이완하지 않기 위한 노력, 그것으로 족하다.
한가지 조심할 것은 침묵의 상태를 우울이나 절망 따위의 의미로 조작하려는 나와 나 이외의 세력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 침묵은 긴장감이나 경계심으로부터 비롯되어서는 안된다. 불가에서나 행해질법 한 금언수행 처럼 절대적인 강요 없이, 그저 불필요한 말과 불필요한 감정들을 덜어내면 된다.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면 된다.

가슴 한켠에 쌓여있는 감정들은 왜 항상 해소되어야 할 골칫덩이 이기만 해야할까? 입으로, 손으로 그 짖눌린 감정들을 왜 항상 어떻게든 쏟아내려고만 할까? 급하게 게워낸 그 말들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알고, 때로는 역겹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 감정들을 감당해내기 힘든 이유는 아마도, 그 감정들이 한번도 스스로 풀어보지 못한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일 것이고, 그 감정들을 정돈하고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기엔 너무 약한 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비위가 약한 우리들은 답을 찾고, 정돈하고, 소화시키기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 것을 당장 누군가에게 달려가 게워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혹은 <그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라는 식의 그저 그런 공감을 얻어내면 만족하고 마는 것이다.

파리, 텍사스의 트래비스가 <왜?> 냐는 질문 앞에서 입을 다문 이유는 내 생각엔 그렇다. 쉽게 누군가를 붙잡고 토해버리기엔 그 질문들이 너무나 그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그리고 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그 질문들로부터 한순간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 없이 사막을 헤메는 그의 모습은 가까웠던 모두로 부터 끝 없이 도망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4년전 그날로 부터, 그 스스로로 부터는 단 한순간도 도망친 적 없는 것이다. 난 트레비스가 된 적도 없고, 심지어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일 뿐이지만, 그가 상실감에 혹은 그저 과거를 잊어버리기 위해 그토록 걷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