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조를 잃어버린 것일까.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모른척 너스레를 떨며 문장을 써내려가던 그 재미를 잃어버렸다. 무엇인가 쓰지 않고 내버려두니 쓰는 마음이 퇴화해버리는 것일까. 이러다 영영 단 하나의 문장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무엇이든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거나 그리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다행히 누군가를 만나 궁금해하지도 않는 그간의 고민들을 소상히 털어놓아야만 직성이 풀리고 마는, 못된 버릇은 어느정도 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은 여전한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뭔가 그림을 통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되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쓰지 않는 것에대한 불만과 불안은 여전히 남는다. 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써보도록 하려고 한다. 허세든 날조든, 의미없는 혼잣말 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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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또 한가득 들이 부었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잠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머니와 식사를 하고 오후 네시 쯤 작업실에 기어들어와 있지만.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다. 어쩌면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뭔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이 내게는 일종의 휴식인 것 같다. 일전에 보았던 영화 녹색광선의 주인공처럼 어떤 극적인 계기를 기다리며, 결국에는 그 무언가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까지를 감내하며 보내는 이상한 휴식.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에 녹색광선같은 극적인 무언가가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계기를 지어내고야 말겠지만)
하여간, 영화를 보는 내내 프랑스에 가서 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 독일에 가려고 했을때도 비슷한 충동에서였다는 것은 애써 모른척 하며) 무익해보이는 주제를 가지고도 무용하다고 서로를 무시당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여 어른과 아이가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과 각박한 마음으로 서로 이기려 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납득시키려고 애쓰지 않는 모습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영화는 영화일뿐이겠지, 하면서도 부러워서 오랜만에 '도피'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디에 있건 중요한 건 마음이다. 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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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고 작업실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는 일련의 패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쩍 자주 하는 생각이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과 점 사이를 무한하게 반복하는 어떤, 선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시간으로 느껴지고, 특별히 기억할만한, 어떤 사건으로서의 점이 등장하여 경로가 바뀌지 않는 한, 그 선-운동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아무리 겹쳐져도 두께를 가질 수 없는 아주 얇고 가느다란 시간이다. 반면,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선-운동조차 없는 하나의 멈춰진 점으로 느껴질 뿐인데, 그 점에서의 시간은 닫혀있지 않고 무한하게 열려있는 공간의 느낌을 갖게 한다. 그렇게 이질적인 두 시간대에 대한 추상을 가지고 지나간 달력상의 수 개월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끝을 알 수 없이 열려있는 검은 공간 위로 유성우처럼, 순간 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흔적으로서의 시간이 깜빡거리는 이미지를 얻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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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감상자 사이의 거리로 따지자면, 미술작품은 문학이나 음악에 비해 작가가 감상자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것 같다. 예술사에 대한 조예가 부족하여 그저 뜬구름 잡는식의 느낌- 일 뿐이지만, 글을 읽는다- 는 것과 음악을 듣는다- 의 두가지의 감상행위에 비해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 는 행위는 좀 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나 할까. 자기 전에 누워 이불 속에서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과, 화이트큐브 전시장에서 또각또각 자기 자신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마저 의식하며 감상해야 하는 작품, 그 정도의 차이, 그런 거리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뭐랄까 전시장 안의 미술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뭔가 대접받으려고 한 껏 어깨에 힘을 주고있는 모양새여서, 어쩌다 전시장에서 '나는 너무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작품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조소- 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나는 너무 똑똑해서 너희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꺼야-' 라는 식의 작품을 만나게 되어도 냉소- 하고 말게되는 그런 느낌. 그런 형편. 그런 짧은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