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

계절이 변할 때, 주로 달라진 공기의 맛을 느끼게 되는 즉시 나는 유럽 어딘가의 골목들을 떠올린다. 고향도 아닌, 겨우 하루, 한 달, 일 년 머물던 그곳을 그리워한다. 그 골목의 공기가 떠올려주는 풍경이라는 건 지극히 평범한 장면들이다. 이를테면 비엔나 지글러 슈트라세의 한인 슈퍼에서 장을 보고 자이덴가쎄로 꺽어지는 모퉁이 라던가, 할테슈트라세 아파트 오층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참, 파리 8구역 샹젤리제로 가는 길 어딘가의 현금인출기 앞이라던가 하는 식이다. 그토록 그리워 할 만한 특별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 아닌 데도, 그런 순간이면 늘 오싹 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마음이 순식간에 그 곳에 가 있다. 오늘은 무심코 라나 덜 레이의 노래를 들었는데, 흐느끼는 듯 한 그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리의 9월 어느 오후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뜻도 잘 모르면서 당시에 지독하게 들었던 탓일 게다. 오늘은 유독 그 이국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직접적이어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 볼 정도였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바로 이런 이상한 기분에 처할 때인데, 보통 어떤 색다른 특별한 경험을 위해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달리, 나는 바로 그 이국의 공기를 느끼고 싶어서-인 것 같다. 그 공기는 나와 관련된 그 어느 것의 향기도 실어다주지 않는 공기이며, 그렇기에 그 공기를 향유하는데에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무색무취의 공기이다. 지금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 내가 거기 없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