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유품들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신 스스로가 특별히 아끼던 소장품이랄 것도 없는 단출한 삶을 사셨기에 따로 챙겨둘 것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이 파이프가 어쩌면 유일하게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나 유아기를 보낼 때에 아버지는 자동차 기술자로서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가 계셨었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해서, 유감스럽게도 가족들 모두다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면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사막여우 일화와 몇 장의 사진들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왜 살아계실 때 더 많이 물어보지 못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중동에서 시간을 보내실때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와 같다. 젊은시절 아버지는 어떤 기질과 취향을 가진 청년이었을까.
파이프의 옆면에는 조그맣게 HardCastle이라는 파이프 제조사의 로고가 박혀있었다. 왠지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사우디 시내의 한 고급 타바코숍에 들러 이 매끈한 영국제 파이프를 집어들고 흡족해하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좀 더 유려한 디자인의 다른 여러 파이프들 중에서도 타바고채임버 바닥 부분에 각이 져 있어 잠시 내려놓아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점을 마음에들어 하셨을 것 같다. 그리고 곡선이 강조된 디자인은 너무 세련되어서, 나무 외피를 그대로 남긴 디자인은 너무 나이들어보여 기피하셨을 것 같았다. 물론 넉넉치않은 주머니사정도 고려하셨을게다. 어쩌면 그곳에서는 저렴한 롤링타바코를 피우다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구입해 오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외국생활을 접고 귀국하는 공항 면세점에서 뭔가 그 시절의 이국적인 기분을 추억할만한 고급의 취향을 가지고 싶으셨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에 비하면, 공장에서 생산된 이십개비 말보로 담배를 피우는 내 취향은 참으로 멋대가리가 없다.
내가 국민학생일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휴일이면 이 파이프로 안방에서 담배를 태우셨다. 담배 때문에 벽지 색이 누렇게 변한다는 어머니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느이 엄마는 맨날 저렇게 잔소리다-‘며 나에게 윙크를 날리시던 모습. 능숙하게 담뱃잎을 파이프에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담던 모습. 기린표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치익-하고 불을 피워, 파이프 안으로 수욱 수욱 불꽃을 당기던 찡그린 표정도 어렴풋 떠올랐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있던 늦둥이 아들을 위해 처음 몇 모금의 연기는 어김없이 도너츠를 만드는데에 써버리셨다. 파이프담배는 어쩌면 아버지가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이자 취미였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파이프에서 THIS 담배로 바꾸신 시점부터 우리 가족 형편이 조금씩 팍팍해졌던 것 같다.
무심코 가지고있던 파이프 속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