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지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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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단면'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치 그 행복의 과실을 찾기위해 그것이 숨겨져 있을거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그것이 감춰져있을 법한 비밀상자들만 무한히 창조해내는 과정과 다름없지않나-하는 생각을 담은 그림이었다. 모두가 ‘행복'을 찾고 있는데 사실 그 행복이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었다고 하면 너무 싱거워서 누가 찾으려 들겠는가. '좋은 것'이라고 알려진 것들 주변에는 항상 그렇게 '어렵게 획득할 수 있는 과실'이라는 식의 거추장스러운 오해들이 존재한다.

동양화에는 '일품(逸品)'이라는 미술비평 개념이 있다. 비 전문가가 보면 너무도 쉽게 그려진 듯한, 일필휘지의 그림들에게 주는 최고의 찬사이다. 쉽게 말해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정신을 담은 그림을 찬탄하는 말. 주로 화법을 두루 섭렵하고 자기 화론을 정립한, 혹은 그것 조차도 뛰어넘어 이제 무심한 경지에 이른 老화가들의 작품에 붙는 찬사이다. 이를테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歲寒圖. 일품(逸品)이라는 것은, 그림 그 자체 보다도 그 老화가의 인생과 지적, 정신적 삶의 경지에 대한 경의와 존경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일생을 무대 위에서 보낸 댄서가 고희의 나이에 무대 위에 다시 올라 숨을 헐떡이며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그 춤의 역동성이나 리듬감을 평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삶 자체에 대한 감사와 경의의 표현으로서 기립박수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말로, 젊은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대오각성하여 무아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또 누군가 지천에 널린 행복이라는 열매를 마음껏 베어 물고는 나는 정말 행복하다-며 미친듯 춤을 춘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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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노력'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애초에, 젊은이들의 경솔함을 꾸짖기 위한 도덕적 훈화이거나, 꺾여 쓰러지기 쉬운 치기어린 자존심을 달래주고 기운을 북돋우기위한 격려의 차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양의 고통이었던 것이 누군가에겐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생채기일 수도 있다. 고통의 양은 그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여, 절대적인 잣대로 누군가에게 '이만큼의 고생’ 끝에 가서야 '낙樂'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행복함을 증명받기 위해) 쓸데없이 고통의 단계를 지나 올 필요가 없다. 행복은 지천에 널려있다. 단지 아무데나 있는 것을 어렵게 구했다고 생색낼 수 없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