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사고에 대비하여 보험을 들어놓는 것처럼,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면서 일단 남들이 하는 것들은 어느 시점에서는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불안과 초조. 이러이러한 삶을 선택하면 이러이러한 미래가 예상된다. 그러니 이러이러하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에서 ‘이러이러’ 한 삶의 가치들은 역사에 의해, 통계학자들에 의해, 현자들에 의해, 정부에 의해, 기업들에 의해, 학교에 의해, 집단에 의해, 부모에 의해, 친구들에 의해 전해진다. 그 가치들은 그것을 주장하는 개인이나 사회 나아가 민족, 인류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 그런 각기 다른 복잡한 요구, 욕구, 가치들에 따라 사람들은 잘도 살아간다.

그 가치의 힘을 비교해봤을 때,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가 한 민족의 가치나 사회의 가치, 집단의 가치, 혹은 부모가 추구하는 가치를 넘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가치가 가진 역사가 전래된 가치의 그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무리 기운이 넘치는 젊은이라 하더라도 당장에 극복할 수 없는 건 시간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이 든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젊은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 또한 시간뿐이다.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연륜을 격파, 극복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시간을 창조하는 것 뿐이다. 완전히 새로 쓰여지는 역사를 만들어 기존의 것과 비교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라는 건 아예 다른 종이 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기에,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자라나는 가지가 되는 것이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같은 밑동에서 태어났으나 이제 나는 너와는 다른 쪽으로 가지를 뻗을 것이며, 우리가 뿌리로부터 빨아들여 공유하는 수분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쓰일 것이다. 내가 뻗어가는 가지는 당신과는 다른 별을 가리키고 있으니 제 갈 길을 가시요.- 라는 식으로.

제 갈 길을 가는 가지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시간이다. 이제 막 틔운 움이 어디까지 뻗어 나갈 지, 어느 방향으로 자라나게 될지를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은 분명 저쪽으로 가고자 하여도 제 몸이 붙어있는 큰 가지가 방향을 틀면 휘청거리며 너도 별수 없이 이쪽으로 가고 있었구나- 하는 오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으려면 아주 느리게 아주 조금의 영양분을 빨아대며 끈질기게 자라날 수 있는 근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