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모르게 되는 것

'너는 이미 슬픔에 처하고자 하는 너 자신을 보고 있잖아. 예측할 수 있는 슬픔은 진짜 슬픔이 아니야.'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두가 지 장면, 

하나는 아버지의 장례식. 소리 내 통곡하는 일가친척들 사이에서 이상하게도 나는 어떻게 울음을 터뜨려야 할지 알지 못했다. 소리 내 우는 일은 나에게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삼일장이 끝나는 아침, 장지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나는 비로소 작정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러려고 마음을 먹었던 듯하다. 후련했다. 아마도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슬프고 힘들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울음이 진짜 슬픔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슬픔은 아주 나중에, 예상치 못하는 순간에, 다가오고 끼쳐온다. 

다른 하나의 장면은 뉴욕. 센트럴 파크. 자연사박물관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향하던 어느 숲길을 걷다 생각했다. 포착한 이후에 다시 빠져드는 감정은 마치 한 번 무엇인가의 이름을 알고 나면 그 이름을 다시 부르고 싶어지는 것처럼, 무언가를 소환하고자 하는, 일종의 기쁨이다. 내가 처한 감정이 슬픔이라 부를 수 있어서 느낄 수 있는 기쁨. 진짜의 감정은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무엇이어야 할 것이다. 이름 지어진 감정은 이미, 그에 적합한 표정과 몸짓, 목소리의 떨림까지 뇌리에 각인되어 있고 학습되어 있다. 마음속에 벅차오르는 어떤 이름 모를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그 순간 그 감정에서 빠져나와 버린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거기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슬픔에 처해 있고자 하는 이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