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정체

홀로 완전함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일까. 사람은 둘이 만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완성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종종 한다. 그 사람들은 인간이 혼자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깨달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환상이 아닐까. 둘이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눈빛만 보아도, 아니 눈빛조차 보이지 않는 먼 거리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개별자로서 느낄 불완전함과 불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개인으로서 불완전성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완전함에 이르렀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완전함에 대한 기준이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 고독을 느끼며,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누군가를 필요로하지 않으며, 그 시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개인으로서 완전함에 이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개별자로서의 완전성은 절대적인 선인가. 누구나 성취해야 할 목표인가?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홀로 있음을 두려워하는 순간, 불안을 느끼고, 외로움을 잊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대가, 소모해야 하는 정신력, 고독을 느끼는 지구상의 인구가 스스로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괜스레 소비하는 에너지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스스로의 고독을 삼키고 견뎌낼 수 있도록 훈련되었다었다면, 그만큼 자원과 에너지가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타인과 위험하게 관계 맺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시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왜 사람들은 고독감을 견디지 못하는가?  고독감은 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가게 하는가. 사람 안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유전적인, 아니면 호르몬의 작용이 있어서,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어떤 정신적인 연대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주 어렸을 때, 어떤 계기에서인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곁에서 죽음을 경험했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다거나, 자살 충동을 느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일기장에 생각들을 정리해 나가다가 그 단어에 이르렀던 것 같다. 전후 맥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자살에 대한 얘기였다. 아마도 텔레비전에서 어떤 연예인의 자살을 다루었던 건 아닐까 싶다. 관객을 염두해 둔 자살은 진정한 자살일 수 없고, 완전한 자살을 위해서는 자신의 자살 사실을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목격자나 관객이 있는 자살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살이 아니라는 것. 왜 그런 생각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는 와중에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혼자 있는 이에게는 관객이 없다. 자신의 삶을 구경하고, 그에 대해 무엇이든 참견해 줄 관객.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관객이 없으면 의미도 없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 바라보고 해독하며 비평이든 칭찬이든 해주어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상대방이 눈앞에 없더라도, 우리는 내면에 수많은 관객을 상정하고 그들에게 의견을 묻고 삶의 결정들을 내린다. 가깝게는 가족에서, 주변 사람들, 국가, 사회적 편견에 자신을 비추어 행동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을듯 하지만, 상상 속의 관객은 대개 책임을 묻는 심판관으로서 역할을 한다. 고독감을 느낄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공감이다.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듣는 이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기만 해도, 혹은 그저 그 얘기를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기만 해도 위로받았다고 느낄 만큼, 고독감을 느끼는 존재는 나약하다. 고독한 존재는 왜 그토록 누군가의 공감을 필요로 할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공감을 표하고 스스로 위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타인을 만나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친구는, 자기 얘기를 잠시 멈추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오 분 정도 참고 들어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친구라 가정해 보자. 친절한 우리 친구는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요즘 무슨 고민 있어?’ 고독한 이가 얼마나 듣고 싶어 했던 질문인가? 고독한 자는 열심히 그동안 자기가 고민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1. ‘그래 맞아 나도 그런 기분 느껴본 적 있어’,
2.’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3. ... 대답 없이 자기 얘기를 한다.

첫 번째 대답의 경우 일견 이해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 고독자는, 자기 기분이 절대 상대방이 느낀 고독과 같을 리 없다고 불신할 것이다. 두 번째 대답의 경우, 일견 위로받는 것 같기도 하지만, 너무 쉬운 대답이므로, 아마 내 얘기를 잘 안 들었을 거라 여기며 실망할 것이다. 세 번째의 경우, 아마 괜히 얘기했다는 생각이 들며, 사람들을 만나 얘기해 봤자 아무 소용 없구나! 하며 허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친구는 정말 세심하고 다정다감하여, 고독자가 얘기한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도 모두 반응하고, 재차 묻고, 확인하고, 작은 부분에도 정성을 들여 공감을 표해줄지도 모른다. 그런 친구가 있다면, 아마도 굉장한 호감을 느끼게 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고, 또 어쩌면 항상 같이 있고 싶다고 여기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을 소유할 수 없고, 타인에게 끝없이 나를 주입할 수 없다. 그 친절한 타인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게되면, 그 친구에게 집착하게 되고 내 얘기를 찰떡같이 들어주는 그 귀가 없으면 나의 삶은 무의미해져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완벽한 공감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주 가끔, 어쩌면 일생에 한두변, 대화 중에 완벽하리만치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혼자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는가? 혼자서도 완전한 기분에 이를 수 있다면, 또 그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렸을 때 내가 반했던 사람은 늘, 자기 자신에게 심취해 있는 사람이었다. 시끄러운 쉬는 시간 교실 안에서 자기 공부에 몰두해 있는 우등생을 볼 때, 수업이 모두 끝나고 빈 농구장에서 홀로 레이업 연습에 몰두해 있는 친구를 볼 때, 도서관에서 무언가 상념에 젖어있다가 다시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여고생을 볼 때,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늘 부럽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또 한편으로는 동물을 볼 때 비슷한 류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모든 것에 무심하며,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에만 몰두 해 있는 듯한 고양이를 볼 때면 늘 그런 느낌이 든다. 어느 강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백조를 보았을 때 에도, 사슴을 보았을 때 에도, 멧돼지를 보았을 때 에도 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리 와’ 하고 아무리 관심을 끌려 해도, 멧돼지를 마주쳤을 때에는 죽은 듯 가만히 서있었지만,  나같은 인간 따위에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유유히 자기 길을 가버리는 동물들을 보면 늘 아름답다고 여긴다. 하다못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우듬지 나무들을 보아도, 그렇게 외부의 자극에 저항하지 않고 흔들려버리고 마는, 무심코 자기 생장을 이어가는 그 생명들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끼고, 그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나는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틀림없이 그들에게 있는 무엇인가가 없다. 무언가 비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물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가끔 한숨을 쉬며 ‘다 부질 없다’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공을 괜히 건드리며 노는 고양이가 ‘에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하며 허무감을 느끼고 있을 지 확신할 수는 없다.

고독감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왜 혼자 있을 때, 혹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조차, 외로움을, 허무함을 느끼는가. 고독감을 받아들이고 그저 나무처럼 가만히 그 무엇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가만히 있을 수 없는가? 하루종일 눈에 밟히는 이런저런 사물들을 바라보며 조금 걷거나 누워서 하루를 보내고 시도 때도 없이 잠드는 고양이처럼 살 수는 없는가? 왜 아무 일 없는 하루 중에도 불안을 느끼고, 연락처를 뒤적이며 통화버튼을 누를지 망설이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어디엔가 내 마음과 같은, 공감을 느낄만한, 재미를 느낄만한 시각적인 자극 거리가 없는지 찾게되는 것인가.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는 날에도 왜 나는 새벽까지 뜬눈으로 잠들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이 고독감의 정체를 알고 싶다.

고독은 무엇일까? 고독감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있던 본래적인 성질의 감정인가? 고독감은 언제 어떻게 나에게 스며드는가? 이런 생각들을 해본다. 고독감과 외로움은 어떻게 다른가? 물론 홀로있는 모든 순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버스를 타고, 운전을 하고, 곧잘 한다. 하지만, 정말 고독감을 느끼는 순간은 잠들기 직전이 아닐까. 해야 할 일과를 마치고, 더 이상 즐길 거리도 찾기 힘들고, 물론 요즈음에는 끝없이 그런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아니 찾아내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무엇을 보고 즐길 지 추천해 주지 않는가, 침대 위에 몸을 누이고 불을 끄면 불면이 시작된다. 비로소 내 마음이, 내 정신이 이 몸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나는 오로지 잠들지 못하는 이 정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 진정으로 불빛이 사라진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뭐 그리 새삼스러운가. 혼자서 나의 하루가,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의 존재가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진짜 고독이 시작된다.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도 생산되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 오늘 하루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로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무언가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일찍 잠들어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지 하는 질문에 이르게 되면,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방안을 서성이고, 창가에 앉아 빈 거리를 바라보고, 잠을 이룰 수 없어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에 이르게 되고마는 것이다.

  • 고독감의 시작은 허무를 깨닫는 순간, 무의미를 느끼는 것.

  • 왜 허무한가? 왜 무의미한가?

  • 왜 삶이 무의미하면 안되는가?

  • 삶에 왜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 삶이 원래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고독감이 해결되는가?

고독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떤 조건으로서 부여된 성질이라면, 어쩌면 조금 쉽게 그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태어나기 전,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영혼의 총합의 상태에서, 나라는 몸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대신, 너는 전부로서의 영혼에서 영원히 혼자가 되어야 한다. 라는 주의 내지는 경고를 감수하고 나라는 정신이 몸을 타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불평할 수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