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함이라는 건 무엇일까. 내 삶의 신성은,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 느끼는 신성함과 같을까. 어떤 사람에게서 신성함을 느꼈을 때, 그가 신성함을 보이는 행동을 내가 한다고 하여, 그 신성을 나 역시 획득하게 되는 것일까. 혹은 그 신성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신성하다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신성한 사람은, 신성함을 자랑할 필요도, 신성함 자체를 의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발설해야 하는, 자랑해야 하는 행동은 이미 불완전하고, 또 불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함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보이지 않아야 하고 내색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신성함은 흉내 내서 이룰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와 하나가 된 무엇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성한 사람은 경계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두드러진 경계를 만들어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 그림에서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그런 사건인 것이다. 그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아는 척 말하거나 글을 쓰거나 설명하거나 자랑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경계를 가린다는 표현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경계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 말해야 할까. 경계가 형성되지 않는 사람.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 있는 사람. 표면적인 이유나 변명에 집착하지 않고, 커다란 목적. 자신의 삶에 가장 중대한 목적. 그것 하나에 매몰되어, 그것 이외의 것에는 무반응, 무관심,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에 가장 행복해하는 그런 사람. 껍데기를 벗어버린 사람. 여기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 여기에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사건이 있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궁극적인 행복의 요체가 숨어있다. 아니, 행복은 아니라, 평정일 것. 궁극적인 마음의 평화.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평화. 마음의 평화. 그런 삶. 그런 삶을 이룰 수 있는 규칙들을 세우고, 그런 삶을 이룰 수 있는 습관을 하나씩 들여가면 그것으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창작 형태. 창작 도구. 언제 어느 때건 영감을 얻어 기록할 수 있는 그런 패턴의 삶. 시간과 장소가 허락될 때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영감들을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작가 생활. 그럴 수 있다면, 일을 해도, 달리기를 해도, 어머니와 있어도, 누가 내 시간을 침해해도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런 포맷을 만들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