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비행사가 되어보는건 어떨까

"읽어봤니?"

"응."

"다섯편 모두 다?"

"응. 다 읽었지. 정말 뭔가 쓸 작정이야? 생각보다 열심히인걸."

"아니, 뭐 그저 장 수만 늘리고 있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매일 내가 소비하는 커피값이 너무 아까웠을꺼야."

"단순히 커피값이 아까워서 이런 글들을 생산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재미난 일이네. 게을러서, 게으름을 소재로 뭔가 쓰겠다는것이 곧 게으름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어버렸으니. 그런데 몇가지 궁굼한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려나. 이 대화들 속에 혹시 나도 포함되어 있니? 나와의 대화를 염두해두고 글을 쓴 적이 있어? 그것이 아니라면 아주 조금은 속상할 것 같지만, 그래도 물어 봐야지."

"너? 너와의 대화- 글쎄, 음- 글쎄. 시도는 해보았지만, 실패였지. 게다가 누군가의 입을 빌려 말해보려고하면, 매번 단 몇줄도 견디지 못하고 금방 <나>로 돌아와버리더라고. 사랑과영혼이라는 영화 기억나? 거기서 우피골드버그가 남의 몸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우스꽝스럽게 불평을 쏟아놓곤 했었잖아.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의도하지 않은 표정과 몸짓으로, 뉘앙스로 전달되는 듯한 기분이 꽤나 불쾌한 일이더라고. 이것이 창작이었다면, 한번쯤 못된 말투를 흉내내보거나 한심한 이야기를 해보기도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것 조차도 참아내지 못하겠더라구. 결국엔 혼자서 질문하고, 혼자서 대답하고, 혼자서 울고 웃고한 것밖에 안되지. 결국 나에게서 한발자국도 못벗어난 기분이었어. 마치 <자위>하고난 것 같은 불쾌함이랄까."

"어이쿠 세상에! 내 말투가 그렇게 불쾌했었어? 게다가 자위하고난 것 같은 불쾌함이라니. 결국 날 생각하며 자위를했다는거야 뭐야. 후후. 놀라긴- 농담이야. 그렇다면, 애초에 <게으르다>, <게으르지 않다>라는 결론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가보네. 그런데 왜 한참 쓰다 말았어? 그래도 상당히 재미있는편인데- 예전의 네가 쓰던 그 쓰레기들 보다는!"

"하하- 금방 잘도 인용하는군. 모르겠어. 그저 그렇게 누군가 나에게 엉뚱한 질문을 해주고, 대놓고 비난을 해주기를 바래서 그랬는지도 몰라. 실제의 대화속에서는 내가 누군가에게 게으르다는 이야기를하면, 그런 고백이 뭔가 <반성>의 의미로서만 들리는지, 꼭 같이 '위로'나 '격려'의 이야기만을 해주거든. 그게 불만이었던가봐. 누군가 한번쯤은 좀 더 무덤덤하게, 엉뚱하게, 가차없이 대답해주면 좋겠다 싶었던 것이지."

"다섯번째 대화에서처럼 실컷 욕도 한번 얻어먹고싶기도 하고 말이지?"

"응. 맞아. 그렇지. 그 대화를 쓸때에는 정말 누군가와 격렬하게 싸우고 난 것처럼 흥분을 느꼈던 것 같애. 정말 난 어쩌면 상대가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때 까지, 온갖 비난이 목구멍까지 솓구칠때까지 몰고가 버리는 그런 잔인하고 못된 심성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심지어 내가 만들어낸 화자에게까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지. 결국 파란색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런 말들을 듣고 싶었던 거니까. 그래서 여기까지다. 결국, 게으른 것 뿐이고 행동해야 한다는 진부한 결론, 사실 아무 말도 필요없었던것 같은 기분. 그래서 그만뒀지. 아마 그 대화가 내가 할수있는 가장 한심한 형태의 주절거림이었을거야. 현실의 대화에서는 그 누구도 그렇게 비난하는 수고를 해주지는 않지. '죽고싶으면 죽어라' 하고 말야. 과연 그 순간 네가 내 앞에 앉아있었다면, 너는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까?"

"나? 음 그런 네 앞에 앉아있는다는 것은 상당한 수고를 요하는 일일텐데- 훗. 어떻게든 빨리 도망갈 핑계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훗 이번에도, 농담이야. 생각하는 것이 있더라도 아마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껄? 너의 만족을 위해 감정을 무너뜨릴만큼 자비롭지도 않고 말이지. 그리고 내 의견은 너에게 이야기되어질 필요가 없어. 네가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게 있는데, 네 글을 읽으면서, 그 이야기를 해주고싶긴 했어."

"그건 또 무슨소리야? 그 이야기가 뭔데?!"

"넌 말야. 누군가의 <공감>을 바라지 않아. 물론 <이해>를 바라지도 않지. 그래서 내 의견은 이야기되어질 필요가 없다는 거야. 틀렸어? 이미 너도 알고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너의 입장과 처지에 대해서 <쉽게> 공감하는 것을 바라지 않거든. 너는 결국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너만의 입장과 처지를,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너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고 고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 너에게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어. 경계에 대한 집착을, 영역에 대한 강박을 그리고 높고 희박한 곳에 세워진 너의 왕국을 말야. 이렇게 내가 너로부터 45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있지만, 왠지 '너'라는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위압적인 입구에 서서 초인종을 눌러야만 하고, 출입허가서를 작성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지. 네가 좋아하는 '시민케인'이라는 영화 생각 나니? 꼭 그 영화속 미스터 케인이 세웠던 제나두의 성처럼 말야."

"아! 그 비유 마음에 들어. 그럼 나도 죽기전에 '로즈버드-' 따위의 말밖에는 남길것이 없겠네- 하하. 아니지 좋아하면 안되지. 그런데 그렇다면, 난 왜 그런거지?"

"니가 왜그런지 내가 어떻게 아니? 웃겨. 역시 넌 너의 글에서처럼, 곧바로 쏟아져나오는 독설적인 말들을 좋아하는구나. 그렇다면 이제 성의 입구는 통과한 셈인가? 들어가도 되겠어?"

"물론이고말고."

"다시한번 말하지만, 넌 그저 누군가에게 <아유- 나는 너무 게을러>라고 투정부리듯 이야기하고 싶었던거지만, 상대방이 너의 이야기를 듣고서 <어쩜 나도그래!>라고 외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거야. 그 누구와도 너와 같은 등급의 고민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은거야. 네가 글을 쓰고싶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결국 같은 이유야. 넌 다른사람들의 소설 속에서, 네가 너의 사상의 왕국에 쌓아둔 <고유번호를 메겨놓은 값진 생각>들이 그저 값싼 공산품으로 밝혀지는 것이 두려운거야. 네가 진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대중소설 속에서 발견하는 순간 너는 네가 어렵게 발견한 것들이 모두 위작이었다고 탄식하게 될테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넌 다자이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서 가장 깊은 탄식을 했던것 같은데."

"아! 그래 인간실격!"

"신났군. 이제 너의 침실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선 셈인가? 이제 칼을 뽑아야 할 타이밍인가! 네가 너의 게으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좀 더 단순하고 명쾌한데에 이유가 있는거야. 하지만 너는 그 문제를 다른 사람은 물론 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수준의 문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자꾸만 감추어두고 싶은 것이지. 별것도 아닌데 말이지! 너는 너의 보물들을 누군가가 쉽게 발굴해내어 금방 해독해 내는것을 너는 원하지 않으니까. 너 자신 조차도 말이지. 결국, 네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문제들은, 사실 네가 가장 잘 알고있는 셈이지. 그리고 그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지."

"이런- 완전 참패한 기분인걸."

"공감을 모르는 너같은 녀석에겐,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야> 라는 말 보다 더 잔인한 말은 없지. 그런면에서 다섯번째 화자는 너의 불순한 의도를 어렵게 비난하긴 했지만 좀 더 차분하게 말했어야해."

"어이쿠, 지금 너와의 대화가 거의 완결편인 셈이구나. 결론으로서 손색이 없었을텐데 아쉽다. 미안하지만 당장 내 창작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마지막 화자가 되어주면 안되겠니? 그래. 알고있어. 사실은 별 일 없고, 별 것 없지. 게으르다는 고민 때문에 죽거나 하는 사람은 없을테지."

"그래. 내가 말했잖아. 인생 별 것 없지."

"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말아줘.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생이 너무 끔찍해. '누구나 다 그런거야' 라는 격언 따위를 위안삼아 '다 그렇게 사는거야' 라고 결론을 내려버리고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말야. 내 생이, 진부해지고, 불필요한 파편처럼 느껴지고, 소모적인 공산품처럼 느껴지는것은 너무 끔찍하다구. 나도 알아, 내가 발버둥치듯 비껴선 그 자리가 사십억의 인구가 겹겹이 늘어서 있는 그 대열에서 얼마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 너무 잘 알지. 그래서 단순히 게으름 조차도 내겐 고난이 되어야 하고,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 조차도 고행이라고 여겨야만 하는 이유였던거야. 그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이지! 난 왜 이모양일까-"

"고만고만하게 사는것이 무엇이니? 진부한 것은 무엇이고, 불필요한 파편은 어떤거야? 대체, 사십억의 인구가 겹겹이 늘어서 있는 통계학적 이미지는 어디서 얻어진거냐구? 네가 그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믿고있는 근거는 뭐지? 너. 우주인이야? 달나라에서 왔니?"

"그래 어쩌면 그 오만방자한 우주적시각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것인지도 몰라. 우주비행사가 되어보는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