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지끈거린다. 빈 속에 커피를 두 잔이나 더 마셨고, 그런 위장에 맥주를 들이붓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하다. 보통은 한 번쯤 와서 재떨이를 새 것으로 바꿔 주곤 하는데, 오늘 바에서 일하는 여자 아이는 바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모든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다. 날씨가 추우니 죄다 카페로 기어들어 온 모양이다.
바에는 잘 차려입은 웬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보통 바에는 단골들이나 카페 직원들과 잘 아는 사람들이 앉곤 하는데,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 카페와 어울리지 않게 검은 정장바지에 검은 구두, 흰 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그는 몇 시간 째 시켜 둔 와인 잔을 쓰다듬고 있었다. 여직원이 내 자리까지 오지 않는 건 아마도 저 손님 때문이리라. 그는 바에서 일하는 K양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K양은 근처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고 했다. 직접 들은 건 아니고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다. 아직 앳되 보이는 얼굴이라 사람들에게 자기 젊음을 한껏 뽐낼 법도 한데, 자기 할 일 이외에는 좀처럼 손님들에게 말을 걸거나 함부러 웃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더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주문을 받거나 계산하는 것 이외의 시간에는 늘 뿌쉬킨 같은 희곡 작품이나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의 시인이 쓴 책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K양이 웃어보이는 유일한 대상은 친구도 사장님도 아닌, 내 반대편 끝에 앉아있는 저 외국인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하는 줄 알았는데, K양과 종종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러시아인 같기도 했다. 외국인은 거의 매일 카페에 와 있곤 했는데, 외국 잡지들이 있는 서가 쪽 자리만 고집했다. 나는 그로부터 반대쪽 끝, 그러니까 바에서 가장 먼 구석 자리를 점령했다. 지난 번에 카페 연말 파티 때 술김에 그 외국인과 몇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서로 질문하는 것에만 익숙하고 대답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여기서 무엇 일을 한다는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은 알렉산더였던가 드미트리였던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오늘 K양은 바쁘다. 나 역시 계산하거나 주문할 때 이외에는 K양과 말을 나눠본 적이 없다. 한번은 계산할 때 내가 어디에 앉아있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기에, ‘저기 안 쪽 끝자리..’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내 눈을 쳐다보며 ‘알죠‐.’라고 그녀가 말한 적이 있다. 그게 내가 K양과 나눈 유일한 대화였다. 그때 이후로 나는 K양에게 상당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래서 주로 그녀가 일하는 날에 카페를 찾았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 오는데,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초저녁부터 나와 있었는데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바빠서 미뤄두기만 했던 생각들을 모처럼 풀어내 보려고 무거운 노트북까지 들고 나왔지만, 몇 문장 쓰지도 못하고 메모장에는 괜한 푸념이나 계획 같은 것만 적어놓았다. 글쓰기는 영 틀린 것 같아, 몇시간 전 부터 가져온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죽음과 시간에 관한 프랑스 철학자의 강의를 정리한 책1) 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같은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한문장을 무심결에 읽고 다음 문장을 읽을때면 이전 문장이 파악이 되지 않아 다시 돌아가고, 한참 읽고 있다가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다시 처음부터 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어, 기필코 이 한 문단 만이라도 차근차근 읽고 곱씹어 본 다음에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한과의 관계, 포함할 수 없는 것과의 관계,
다른 것le Differént과의 관계로서의 시간의 지속…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등장이었지만, 모두가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문을 열기 직전에 모든 대화와 음악이 멈췄다. 지하실에 가득차 있던 퀴퀴한 실내 공기가 그녀가 문을 너무 활짝 열어젖히는 바람에 일순간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K양이 자주 트는 데이빗 보위의 음악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다시 자신에게 익숙한 곳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내가 앉은 곳에서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여,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몰랐지만, 일제히 자신에게 향했던 시선 때문에 잠시 얼어붙은 듯 했다. 더 자리를 둘러볼 것도 없이 그녀는 문간의 빈 자리에 외투를 벗어 놓고 앉았다. 나는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이 다른 것과의 관계는 그렇지만 무관하지‐않음non-indifferént이다.
여기서 통시diachronie는 ‘동일자‐안의‐타자 l’autre-dans-le-même라고
할 때 ‘안’ dans와 같다…
갑자기, “안 되겠어.” 하고 내 앞쪽 자리에 앉아있던 여자가 건너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둘은 한참 전부터 그곳에 앉아있었는데 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해 있는 듯 했다.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계속해서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와는 함께 할 수 없어. 처음에 우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보였던 것은, 서로가 서로를 가지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 너는 나를 가지려 하잖아. 나는 나만 가질 수 있어. 네가 날 가지려 하면 나는 나를 버릴 수밖에 없어.”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가 말을 하는 동안 그는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안경알에 여자들 사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반사되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쳐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타자가 동일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기억할 수 없는 것에서 예견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공경.
시간은 이 동일자‐안의‐타자Autre-dans-le-Même이며…
조금 전에 박력있게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시선은 책에 고정시킨 채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시야에 작고 귀여운 단화를 신은 그녀의 발이 들어왔다. ‘내가 앉은 쪽 벽에 걸린 그림을 보려는 것이겠지.’ 아직은 다섯 걸음 쯤 떨어져 있는 그녀였다. 나는 다시 이 수수께끼같은 문단을 들여다본다. 다행히 손가락으로 읽고 있던 부분을 붙잡고 있어서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다시 읽으나 처음 읽으나 의미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또한 동일자와 함께 있을 수 없는 타자, 공시적synchrone일 수 없는
타자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타자에 의한 동일자의 불안정일 것이다…
그녀가 다시 한 걸음 나에게로 다가온다. 이제 한 문장만 더 읽으면 된다. 이 문장만 읽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볼 것이다.
…동일자는 결코 타자를 포괄할 수도, 에워쌀 수도 없다.
두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내게 묻는다.
“과연 화성에서의 삶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