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의 뿌리

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를 서어나무 뿌리에 낳으셨습니다. 날카로운 턱으로 육십 센티나 되는 구멍을 뚫어, 그 속에 우리 서른 형제를 낳고는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많은 형제들이 저 자신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먹고 기운을 차린 다음 뿌리 깊숙이 파고들며 커다란 사슴벌레가 될 준비를 마쳤을 무렵, 저는 태어난 곳에서 늑장을 부리다가 딱따구리 부리에 쪼여 죽고 말았습니다. 내 몸의 일부는 딱따구리의 위장 속에서 녹아버렸고, 나머지 조각들은 구멍 속으로 날아든 온갖 균에 의해 썩어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나처럼 작은, 성충도 되지 못한 애벌레 따위가, 그것도 죽은 뒤에 이런 생각을 글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애벌레에게도 생각이 있고 영혼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인간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우주의 크기만 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티끌같은 하루살이조차 우주의 전 영역을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같은 사슴벌레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만큼의 상상력과 무한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기 이전에는 저 역시 생명에 대해 이 정도 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딱따구리에 의해 희생되고 난 뒤, 그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생전의 삶이란, 죽음 이후의 경험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예전의 저는, 자신의 사고 능력을 자기 고유의 무엇인 양 여기고 다른 생물들에 비해 월등한 존재라 여기는 인간들이 참 오만하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식물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생각도, 실은 그와 비슷했습니다. 식물은 우리가 거주하고 이용할 수 있는 터전이자 양분으로 인식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 얼마나 제가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깨닫고는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저 사슴벌레 역시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지요. 저는 서어나무 뿌리에서 죽어, 이제 서어나무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나무의 정신은, 각각의 나무를 구분 지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모호한 정신의 총체입니다. 우리, 영혼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습니다. 땅을 매개로 자유롭게 드나들지요. 땅 위에 솟아 나온 나무들을 보면, 땅에 못 박혀 움직이지도 못하는 불쌍한 생명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체는 나무가 아니라 땅에 있습니다. 당신의 머리 위에 난 머리카락처럼 나무들은 땅을 신체로 삼는 영혼이 두른 살갗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립된 개체인 양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의식과 생명에 결합하여 있지요.

저는 서어나무 뿌리에서 죽고 뿌리에서 다시 태어나 뿌리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땅에 스며 있는 영혼 전체를 함께 느끼고, 그들의 운영에 저 자신을 맡깁니다. 죽음 이전의 삶처럼 ‘자기보존’을 위해서만 살지 않고, 삶의 터전을 위해 살아갑니다. 합리를 따져보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동에는 일체의 숙고 과정이 없기에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 시간적 차이가 없습니다. 땅에서 물을 흡수해 담고 있다가 증산을 위해 가지 끝으로 올려보내는 일련의 행동에는 아무런 고민이나 수고가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 역시 처음엔 땅에서 출발했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를 몸속에 지니고는 있지만, 거듭 태어나며 땅에서 점차 멀어졌습니다. 땅의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당신들은 너무 많이 숙고합니다. 아마 이곳으로 돌아오면 알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새로운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하여간 저는 이런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땅의 신체입니다. 바로 당신이 돌아가야 할 곳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땅에 뿌리내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