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인

한 마을에 젊은 화가가 살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의 소질을 알아본 부모는 그가 미술가의 길을 걷도록 기꺼이 도와주었다. 스무 살이 될 무렵, 근방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술 대학에 입학하여 교수들의 총애를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미래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너는 잘 해낼 거야.’ 라는 주변의 말만 듣고 젊은 화가도 자신의 미래를 낙관하였다.

졸업 후, 젊은 화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격려해 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의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젊은 작가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은 더는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처럼, 그는 아무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안쓰럽게 여긴 스승이 잘 아는 전각 장인을 소개해 줄 테니 가서 전각을 만들어보라 권해주었다. ‘그림에 낙관을 찍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의심하면서도 젊은이는 도장을 만들러 나섰다.

스승이 일러준 주소로 찾아가 보니, 학교 앞에 웬 작은 유리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학교 앞 건널목을 십 년 동안 거의 매일 지나다녔으나, 그런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안 청년은 황당하다는 듯 머뭇거렸다. 거의 매해 가게가 바뀌는 목 좋은 곳에 있는 건물 끝, 아주 작은 전각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철 손잡이가 닳고 닳아 유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문에 달린 창 너머로, 한 대머리 노인이 책상 앞으로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누군가 그렇게 열중해 있는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본 터라, 청년은 노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으레 구경꾼이 창 너머로 보곤 하는지, 노인은 청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젊은 작가는 용기를 내어 유리문을 밀었다. 유리문이 바닥에 솟아 나온 턱에 걸려 쿵 하는 소리를 냈다. 집중하고 있던 노인이 깜짝 놀라며 청년을 쏘아보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문을 당기라고 손짓해 보였다.

젊은 화가는 미안한 표정으로 문을 당겨 노인의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들어서자 노인에겐 충분했던 공간이 갑자기 숨 막힐 듯 좁아 보였다. 직전의 작은 소동에 행여 작업하던 도장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노인은 알은체도 없이 커다란 돋보기를 대고 자신의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도장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노인은 청년을 바라보고 ‘어디, 용건을 말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낙관을 하나 파러 왔습니다. 아는 선생님 소개로…”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책상 주변을 살피더니, 시험 삼아 도장을 찍어보곤 하는 흰 종이를 꺼내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 아직… 어떤 이름으로 만들지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가격이나 한번 알아보려고…”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청년을 쳐다보았다. 생각 없이 찾아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청년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시선을 창밖으로 거두어주었다. 젊은 화가는, 자신의 작품과 어울릴만한 이름이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알고 있던 한자도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노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일어서려는 청년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종이 위에 글자를 적었다.

청년은 노인이 볼펜으로 눌러 쓴 한자를 소리 내어 읽어냈다.

“무 無… 명 名… 인 印…”

노인은 잘 읽었다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그 ‘이름 없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긴장했던 청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자 노인도 활짝 웃어 보였다.

“좋은 이름이네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도장은… 무엇으로 하죠?”

노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잠깐 기다리라는 듯 오른손을 들어 보이고는 왼손으로 책상 아래에서 검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꺼낸 적 없었는지 누렇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노인은 거친 손으로 한번 닦아 내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청년 앞으로 내밀었다. 상자에는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고운 빛깔의 도장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젊은 화가는 마치 완성된 작품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꺼내어 만져 보았다.

짙은 회색에 매끈한 돌처럼 보이는 것은 물소의 뿔로 만든 것이라 적혀 있었다. 검고 매끈한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동물의 뼈라고 하니 왠지 께름칙하여 도로 내려놓았다. 옥으로 된 도장은 왠지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일까 염려되어 건너뛰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도장도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짙은 갈색에 물결치듯 나무 주름이 새겨진 도장이 마음에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벽조목霹棗木이라고 적혀있었으나 어떤 나무인지 청년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눈치챈 듯 노인은 손가락을 들어 청년의 등 뒤를 가리켰다. 젊은 화가는 등 뒤에 무엇이 있나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워낙 좁은 공간이어서 어정쩡하게 일어서서 의자를 앞으로 당겨보았다. 그제야 의자 뒤에 세워져 있던 웬 썩은 나뭇가지가 눈에 보였다. 노인은 나무를 달라며 손짓을 했다. 청년은 나무를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노인은 다시 종이에 적었다.


벼락맞은 대추나무 120


뒤의 숫자가 가격임을 알아챈 청년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청년도 노인처럼 이제 말없이 말하는 법을 배운 듯했다. 나아가 자신이 빈털터리임을 증명하듯 몇 장의 지폐뿐인 지갑을 열어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노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심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들고 있던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서 검지만한 가지를 잘라냈다. 청년은 내심 놀랐지만,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덜컥 도장을 만들어놓고서 돈을 내놓으라며 덤터기를 씌울 사람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노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기계의 전원을 켜더니, 잘라낸 가지 끝을 평평하고 매끈하게 다듬었다. 순식간에 거친 나뭇가지가 제법 도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평평한 면에 이름을 새기려는가 기대하고 있는 청년에게, 노인은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도장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해 하며 빈 도장을 받아든 청년에게 노인은, 자신이 조금 전 써 놓은 글씨를 다시 한 번 가리켜 보였다.

“무… 명… 인…”

청년은 다시금 소리내어 노인이 지어준 이름을 읽었다. 몇 번을 다시 속으로 되뇌더니, 그제야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노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장 파는 노인은 이제 귀찮으니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갑자기 정색하는 노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청년은 성의를 표하려고 지갑을 뒤적거렸다. 노인은 그마저도 성가시니 이제 썩 꺼지라는 듯한 표정으로 돌변해 있었다. 젊은 화가는 한 손에 벽조목 도장을 움켜쥐고 도망치듯 도장집을 빠져나왔다.

남자는 그날 이후, 자신의 그림에 ‘무명인’을 새겨 넣었다. 누구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던 그가, 이제는 매년 커다란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절대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도 무명인이 찍힌 그림을 그린 작가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도 작가가 누구인지 딱히 궁금해 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무명 씨가 그렸다는 이유로 더욱 유명해진 젊은 작가의 작품은 당대 가장 유명한 갤러리와, 수집가에 의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