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다섯 시 반인데도 벌써 날이 어두워서 약속 장소로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에 나탈리가 알려준 대로 대강 오는 방법을 노트에 적어두었지만 급하게 휘갈겨 쓴 터라,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Ledru Rollin 역에 내려 Avenue Ledru Rollin 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될 것을, 반대 방향에서 한참을 헤맸다. 카페 이름은 Le Bistrot du Peintre. 전형적인 파리의 카페처럼, 현관 위에 녹색 필기체의 글씨로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차양 아래로 의자와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노란 전구로 밝혀진 실내도 분위기가 좋아 보였지만, 비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는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오전에는 몽마르뜨를 헤매고 다닌 터라, 의자에 앉을 때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났다.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 나를 흘긋 쳐다본다. 주문을 받으러 온 남자에게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나탈리를 기다렸다. 괜히 보자고 했나 싶을 정도로 몸이 무겁고 피로했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지겨웠다. 그만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직원이 작은 찻잔에 에스프레소를 내 왔다.
내일이면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대체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인지… 연말의 긴 휴가를 외롭게 보내고 싶지 않아 결정한 휴가지가 파리였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 외로움이 조금 덜할 거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의 파리는, 마치 화려한 쇼가 끝나고 난 뒤의 공연장처럼 쓸쓸해 보였다. 도시 전체가 더는 웃거나 떠들 기력이 없어 정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모든 가게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받았다. 커피 한잔에 4.5유로라니! 한 잔을 더 할까 싶어 주머니 속 동전들을 꺼내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급한 성격 탓에, 쓰디쓴 에스프레소는 이미 다 마시고 난 뒤였고 나탈리로부터 조금 늦어질 거라는 연락을 받은 터라,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카페 안쪽에서는 나지막이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쇼팽의 녹턴이었다. 곡 번호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쇼팽을 들으며 비 내리는 거리를 감상하고 있자니, 마음이 더 울적해지는 듯하였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백발의 노인은 코끝에 안경을 걸쳐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손끝으로 책장 위를 빠르게 훑으며 지나갔다. 너무 빨리 읽는 게 아닌가 싶어 자세히 봤더니 판형이 꽤 컸다. 안경 너머로 내가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지 갑자기 커다란 책을 한 손으로 말아 쥐고 얼굴을 가린다. 노란색 표지에는 커다란 고딕체 글씨로 < CHOPIN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더니, 내 앞자리로 달려와 우산을 접어 내려놓는다. 가죽 재킷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내고 젖은 손을 바지에 몇 번 닦아내더니 내 앞으로 손을 쭉 내민다. 나탈리였다. 이메일만 주고받았을 뿐, 이번이 초면이었다. 나탈리는 내 그림에 대한 기사를 자신이 펴내는 잡지에 싣고 싶어 했다. 먼저 이메일로 인터뷰하긴 했지만, 내가 파리에 온 김에 만나자고 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 나도 좋다고 했다. 그녀도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그녀가 멋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모국어일 뿐.
나탈리는 내가 파리에 와서 한 일들에 대해서, 파리의 크리스마스는 어땠는지에 대해, 그리고 내 고향에 관한 얘기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나탈리가 하는 일은 어떤지, 파리 생활은 어떤 지를 물었다. 예상했던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며칠 동안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았던 터라, 평범한 대화에도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는 작은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갑자기 그녀가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라던가, ‘작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고, 또 성심껏 위로해 주었다. 그녀가 ‘다 잘 될 거야’라는 뻔한 위로를 건네는 순간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어쩌면 그 말을 듣고 싶어서 파리까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머릿속으로는 오늘 밤을 그녀와 함께 보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 후회가 들기 시작할 무렵,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다른 약속이 있다며 아쉽지만 일어나야겠다고 했다. 아쉬운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마침 나 역시 피곤하다고, 다음을 기약하자 말했다. 프랑스식 인사를 나누는 것에는 영 서툴러서 그냥 악수만 하고 서둘러 떠나 보냈다.
피곤하기는 하지만 왠지 좀 더 머물고 싶었다. 가게 안에서는 아직도 쇼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님은 나와 건너편의 노신사밖에 없어, 카페 직원들은 앉아서 마감을 준비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곳의 운치를 마음 편히 누릴 수 있으련만, 편안함을 가장하고는 있었으나 왠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빈 찻잔만을 보고 있기가 궁색하여 수첩을 꺼내, 돌아가면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억지스러워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하긴, 비를 피할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다. 카페 안에서 직원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 잔 더 마시겠느냐며 물어오기 전에 계산하고 일어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건너편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이 있는 자리로 가 보았더니 자기 악보를 가리키며 프랑스어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악보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며 눈을 찡그리고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인 듯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모른다고 또박또박 영어로 이야기했지만 막무가내다. 프랑스 사람 특유의 넉살을 떨며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노인의 굵은 손가락이 멈춘 곳에는 아주 작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게다가 악보가 낡아서 글자 부분이 바래 있었다.
s c h e r … z a n d o
그 의미는 모른 채 펜으로 휴지 위에 커다랗게 옮겨 적었다. 늙은 프랑스인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인 양, ‘스케르찬도!’라고 외치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러고는 고맙다며, 합장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두어 번 인사했다. 나는 그저 웃어 보이며,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다시 내 팔을 붙잡고 무언가를 자꾸 설명한다. 커피잔과 내 자리를 번갈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커피값을 내주겠다는 듯했다. 계속해서 사양하자,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카페 직원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직원은 활짝 웃어 보이며, 역시 동양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엉겁결에 낯선 노인에게 커피를 얻어마시게 된 나는 황급히 짐을 챙겨 카페를 빠져 나왔다. 노인은 여전히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
II
오늘 비스트로두빵트흐에는 손님이 없었다. 엠마뉘엘에게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으니, 나를 위해 쇼팽 녹턴 작품 9번을 틀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매일 찾아오는 내 요청을 거절할 리는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면, 내일부터 찾아오지 않을 작정이다. 하긴 내일은 중요한 연주실황 녹음이 있어 이곳에 올 수 없다.
음반사에서 연락이 와서 녹음을 진행하는 게 얼마 만인지, 내 실력을 아직까지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무척 고마운 일이다. 나를 위해 뉴욕에서 녹음할 때 쳐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했던 스테인웨이 피아노를 파리까지 공수해 온다고 하니, 나도 그 노력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게다. 프로듀서가 젊은데도 꼼꼼한 구석이 있어, 피아노 연주에 적합한 장소를 찾느라 지난 일주일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어제는 겨우 섭외한 파리 시내의 한 성당에서 만났는데, 소리가 가장 잘 울리는 곳을 찾아 성당 구석구석을 박수를 치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주를 위한 준비는 끝났다. 이제 연주자인 나만 준비하면 된다. 작품 번호 9번은 너무도 잘 알려진 터라,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조차도 틀린 부분을 쉬이 알아채기 마련이다. 실수할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악보를 들고 나왔다. 카페에는 웬 동양인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신경이 조금 쓰이긴 했지만, 그 역시 쇼팽을 좋아하는지 가만히 음악을 따라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제 9번의 1, 2, 3을 집중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카페 안에서 녹턴 1번 내림 나단조 곡*이 흘러나온다. 가볍고 구슬픈 첫 주제가 끝나고 두 번째 주제를 따라 읽어가는데 건너편 자리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관광객인 듯 한데 이런 동네 카페에 앉아서 무얼 하는 것일까. 동양인 특유의 앳된 얼굴을 가진 청년의 얼굴에는 우수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가끔 무언가 후회하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그것을 잊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내면에 차오른 우수를 직시하듯 비에 젖은 도로 위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호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세어본다. 아마도 커피값을 계산할 돈이 충분한지 확인하는 것일 게다.
2번 내림 마장조†가 시작될 즈음, 밝은 표정의 한 여자가 우산을 받쳐 들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도 어두운 안색을 거두고 밝은 표정으로 여자를 맞이했다. 조만간 추락하게 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는 작은 희망. 그것이 바로 2번 곡의 분위기이다. 그는 이제 완전히 그녀에게 집중해 있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홀로 있는 남자는 자신의 불행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의 불행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덜 나쁜 상황에 안도하고 그것을 행복이라 여긴다. 하지만 보라, 아름다운 여성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희망과 행복을! 청년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축하의 의미로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아주 작은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녹턴 3번, 나장조‡가 흘러나온다. 첫머리의 박자는 알레그레토로 마치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연주해야 한다. 장식음이 많아 처음엔 꿈꾸듯 나른하고 행복한 오후의 정경이 떠오른다. 건너편 남자는 아까의 우울한 기운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밝은 표정으로 여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젊은 남자의 활기찬 태도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이제 곡의 두 번째 주제가 시작된다. 나단조로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마치 단꿈에 빠진 사내를 흔들어 깨우듯 화려한 아르페지오가 온화한 공기를 흩트려 놓는다. 유령처럼 그의 주변을 맴돌며 불안한 마음을 조장한다. 청년은 마치 이 3번 곡을 몸으로 표현하려는 것처럼, 갑자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턱을 괴며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한다. 행복감만으로 가득 채워진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남자에겐 언제나 일치시킬 수 없는 모순된 욕망이 있다. 자신의 세계로 무단으로 침입한 여성을 반가워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러 온 이방인을 대하듯 여자를 밀어낸다. 자신에게 지고지순 사랑을 베푸는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그녀와 함께 정주하며 위로받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만 유독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연인을 내심 무시하면서도, 그녀에게 인정받는 것만이 일생일대 가장 중요한 성취인양 행동한다.
갑자기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남자는 조금 당황한듯한 표정이 되어 엉겁결에 그녀를 떠나보낸다.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뭔가 잘 해결되지 않은 눈치다. 여자가 떠난 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남자는 다시 일어설 힘조차 없어 보인다. 노트를 꺼내어 뭔가 적는가 싶더니, 이내 카페 안 직원들 눈치를 살핀다. 이 사내는 혹시 커피값을 치를 돈이 없는 게 아닌가? 나는 가여운 이 젊은 청년을 구제해주고 싶었다. 그를 통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녹턴 작품 9번에 담긴 감정을 온전히 회상할 수 있었으니, 구제해준다기보다는 사례라 하는 편이 마땅하다.
꾀를 하나 내었다. 낡아빠진 내 악보에서 작은 글자를 보여주고 읽어달라 할 셈이다. 늙어 시력이 나빠진 노인의 독서를 도와준 대가로 커피 값을 대신 내 주겠다면야 달리 사양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3번 내림나단조 두 번째 주제 부분의 스케르찬도 scherzando 라는 글자 부분을 일부러 조금 구겨서 잘 보이지 않게 한 다음, 점잖게 그에게 손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