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 無化

전시가 열리는 날이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이 며칠 전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수백 미터나 줄이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거대한 강물이 흘러내려 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유명 작가의 전시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사람이 모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예술 애호가들뿐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끈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전시의 제목은 <Nihilation> 즉, 무화 無化 였다. 전시를 개최한 작가는 평생 온갖 종류의 검은색을 사용해 온 것으로 유명했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했던 전통적인 잉크를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전 세계의 모든 검은색을 수집해 그만의 독특한 검정을 만들어 그림의 재료로 사용했다. 21세기 초 영국의 과학자들이 개발해 상용화한 벤타블랙*을 그림의 주재료로 사용하다가, 노년에는 가시광을 100% 흡수하는 절대검정을 작가 스스로 개발해 내 더욱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 사람들은 그가 표현한 절대 검정을 마주하면 모든 걱정 고민을 그 안에 던져버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 와중에 최근 절대검정보다 더 짙은 검정을 개발해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것도 몇 해 전 암흑물질을 검출해 낸 스위스의 입자 물리 연구소와 공동으로 일을 추진해 왔다고 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작가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저명한 입자물리학자였다. 아니, 최근에는 과학자 이외에 예술가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작가는 입자물리연구소와 함께 암흑물질인 액시온을 상온에서 안정적으로 가둬 둘 수 있는 거대한 중력상쇄장치를 개발에 성공했으며, 일반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 시설을 이곳 스위스 제네바의 입자가속기 위에 설계하게 된 것이다. 이 원통형의 거대한 건물은 전시장이기 이전에 최첨단의 입자물리 실험장치였다.

또 하나 오늘 전시에 수만 명의 관객이 몰린 이유는 어제 있었던 베르니사주 vernissage 행사 때문이다. 저녁 아홉 시에 시작된 베르니사주 행사에는 작가와 함께 전시를 기획한 입자물리연구소의 주요 과학자들과 예술계 인사 스무 명이 초대되었다. 일반적인 전시와는 다르게 국가적인 행사이기도 하여서, 일반인과 미디어의 출입이 통제된 채 진행됐다. 그런데 문제는, 스무 명의 VIP 인사들이 하루가 꼬박 지난 지금까지도 전시장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VIP가 입장한 이후 일반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까지 입구가 통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지시가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들어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일반 전시 관람객 이외에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온 사람들과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사람까지 더해져 관객 수가 수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예고된 입장 시간이 다가오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느라 여기저기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일어나 생긴 여유 공간이 채워지면서 오래 기다렸던 사람들이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가려고 밀치다가 하마터면 앞줄의 사람들이 넘어져 깔릴 뻔한 위험한 상황도 연출되었다. 사람들은 오래 기다린 만큼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들떠 상기되어 있었다. 검은색을 좋아하는 작가의 팬들인 만큼 수만 명의 관객 역시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와 있었다. 원통형의 건물 역시 까만 색이어서 거대한 사원으로 입장하는 신도들이 연상되었다.

드디어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마치 우주 공간처럼 검은 세계가 펼쳐졌다. 안으로부터 아무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겁낼 법도 한 그 공간 속으로 사람들은 용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주일 전부터 기다리던 사람들은 마치 종교시설에 입장하듯 경건한 자세로 입장했다. 아직 줄 중간에 서 있는 관객들은 까치발을 들고 멀리 보이는 검은 원통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였다. 이상한 일이 있다면, 들어가는 사람이 수백 명쯤 되는데도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인지 오로지 전시장에 들어갈 생각 뿐인 듯했다. 자기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지듯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데도 아무 의심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사실, 이 검은 공간에는 전시 제목 그대로 <무無>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가 아니면 들어설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 달 전에 시설이 완공된 후 최초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작가도 거기 없었고, 그를 따라 들어갔던 설계자들도 거기에 없었다. 어제 입장한 VIP 인사들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입장하기 시작한 관객들도 들어서는 그 순간 사라져 버렸다.

이 전시장은 암흑물질을 전시하려는 목적에 맞게 미세한 입자도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두꺼운 초합금으로 지어져 있었다. 암흑물질을 가두고 있는 만큼 그 어떤 빛 입자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는, 절대적으로 단절된 공간이었다. 성간을 여행하는 우주선에 쓰이는 재질로 지어져 지구 위에 고립된 우주를 연출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건물 지하에는 100km에 달하는 입자가속기가 매설되어 있었고, 입자 충돌로 인해 생기는 암흑물질을 정교하게 걸러내어 지상의 전시장으로 공급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건물이 완공되고 얼마간은 설계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암흑물질로 채워지고 있는 칠흑 같은 공간을 보며 작가와 과학자는 흡족해했다. 그러던 중, 누구도 과학적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거대한 질량의 입자들이 암흑물질 속에서 검출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모여 아주 작은 블랙홀이 작은 우주 안에 생성되기 시작했다. 작가와 과학자들은 인간이 절대 탐험할 수 없는 블랙홀을 우연히 구현해 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정도의 블랙홀은 자신들이 지어놓은 최첨단 시설로 충분히 가두고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일반 대중에게 암흑물질이 아닌 블랙홀을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 모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전시 오픈을 하루 앞두고 가장 먼저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누구도 블랙홀의 성장을 멈출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관객들은 거대한 탑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가기 시작했다. 입장을 기다리던 수만의 관객들이 순식간에 검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초합금으로 만들어진 건물도 이미 그 중심부의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너져내리고 있다기보다는 찌그러지고 있었다 이제, 그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주변에 서 있던 나무와 돌, 자동차와 집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제 풍경 전체가 블랙홀의 중심부로 액체처럼 흘러들어 갔다. 빨려 들어가는 모든 물질이 찢어지고 폭발했다. 붉고 푸른 빛을 내며 타다가 마지막에는 검은빛으로 수렴되었다.

조만간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자의 잉크도, 책도, 그리고 책을 들고 있는 당신도 미세한 입자로 분해되어 아주 작은 점으로 빨려들어 갈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생각도, 시간도, 이야기도 모두 무로 화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