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 Stephanie

Kim

미스터 김은 이곳 자이덴가쎄 Seidengasse 에 사는 몇 안 되는 동양인이었다. 삼 개월 전 그는 독일인, 에바 씨가 임대한 이곳 공동거주 아파트의 작은 방에 들어왔다.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곳은 생활비 부담이 덜한 대신, 인종차별적인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들었다. 그래서 비자를 얻고 나면 꼭 비싼 임대료를 내고서라도 빈 중심의 마리아힐퍼슈트라쎄 Mariahilferstrasse 근처에 살고 싶었다. 김은 전 세계 열네 개의 매장을 거느리고있는 패션디자인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맡고 있었다. 영국에서 경제학 학사를 졸업했지만, 일자리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 한 유럽 내 다른 도시를 찾다가 이곳 오스트리아로 오게 되었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국을 오가야 했던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마땅한 머물 곳이 없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일 년간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이 도시에 정착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한 주소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은행 계좌를 개설할 때 깨달았다. 근처 수퍼막트 Supermarkt 의 직원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비하면 상당히 친절한 편이었다. 회사에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은행 계좌가 있으니 이제 월급을 현찰로 받느라 민망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럭저럭 탄탄한 재정을 유지하고 성장해가는 회사였으므로 스트레스받을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각지에 흩어진 지사의 경영 실적을 보고받고 분석해야 할 때면, 시간대가 다른 탓에 집에까지 일감을 가져와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그렇게 타향에서의 삶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하자, 그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었다. 정착하는 데에 집중하느라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감정들이 하나둘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스터 김은 자연스럽게 주변의 이성들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마리아와 지난 연말 파티 때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이사벨라에게 마음이 끌렸다. 물론 두 여성 다 미모가 출중했다. 하지만 둘 다 남자친구가 있는 눈치였다. 김 씨의 외로움이 더욱 심해진 건, 그해 겨울이었다. 자이덴 거리에 하나둘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커다란 별 모양의 전등이 달렸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방 창문 바로 위에 설치되었다. 그의 방에 인접한 커다란 창문을 열고 나가면 사람 한 명이 설 수 있는 작은 테라스가 있었는데, 그는 그 좁은 공간이 위험하게 느껴져 나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일 밤 그는 창밖의 별을 바라보며 마리아와 이사벨라, 그리고 고국에서 만났던 여자들을 떠올렸다.

도시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다른 유럽 동료들은 긴 휴가를 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회사에서도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 고국에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일찍 예약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여유가 생길수록 자신의 텅 빈 내면이 더 잘 들여다 보이는 법. 그는 매일 밤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자정이 가까워져 올 무렵, 답답한 마음에 테라스로 한 번 나가보려 커튼을 걷었는데, 건너편 건물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공중에 매달린 전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여인의 모습이었다. 체구가 아담했으며 얼굴은 주먹만 한 크기였다. 깊이 팬 푸른 눈과 오뚝하게 솟아오른 코, 코끝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빨갛다 곱슬머리를 뒤로 말아 올린 금발의 여자였다. 추운 날씨 탓에 담배에 불이 잘 붙지 않았는지 라이터 불빛이 수차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춰주었다. 그는 단번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김 씨는 매일 밤 커튼 뒤에 숨어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끔 그녀가 김 씨가 사는 방 창가로 시선을 던질 때면, 들킨 줄 알고 심장이 마비되는 것처럼 꼼짝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훔쳐보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사생활을,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허락한다는 의미는 아닐까?’ 김의 망상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그는 용기를 내어 테라스로 나가보기로 했다. 모두가 고향으로 떠나 텅 비어버린 거리, 외로운 두 사람이 커다란 별 모양의 전등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그런 낭만적인 장면을 그는 매일 밤 그려왔다. 오늘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자정에 가까워져 오자, 건너편 건물의 그녀도 안절부절못하는 듯 보였다. 그는 커튼 뒤에서 오랫동안 망설였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망설이고 또 그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를, 그녀에게 온전히 보여주고 싶었는지 두 시간 동안이나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켰을 때 그는 커튼을 힘차게 걷어 치웠다. 창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오래 사용하지 않아 창문과 문틀 사이가 페인트로 뻑뻑하게 붙어 있었다. 창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건너편 건물의 그녀가 자신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Stephanie

슈테파니는 그라픽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알프스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위해 이곳 빈으로 작년에 이사해왔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 특유의 티 없이 맑은 미소와 소탈한 성격은,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대개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슈테파니는 자신의 이마와 어깨, 그리고 팔뚝에 나 있는 주근깨를 부끄러워했다. 별것 아닌 일에도 너무 쉽게 폭소해버리는 천진한 성격 탓에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자신의 잇몸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괜한 일에도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였다.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늘 시골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리웠다. 심지어는 배설물 냄새가 지독한 목장에서 소 젖을 짜던 일이 그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면, 이내 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이 그리워졌다.

특히 단짝 친구였던 마티나가 그리웠다. 마티나는 크로아티아에서 온 활달한 친구였다. 영상 예술가가 꿈이다 보니, 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진 작품들을 슈테파니에게 보여주었다. 디자이너인 그녀보다도 더 많은 최신의 작가와 작품들을 알고 있어, 함께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었다. 마티나는 학기가 끝나갈 무렵, 어떤 동양인 작가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세계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라고 했다. 슈테파니 역시 마티나 때문에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방학이 끝날 무렵엔 마티나 만큼이나 그의 작업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런 멋진 작업을 하는 사람의 실제 모습은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방학이 끝나자, 그녀는 수소문하여 그 동양인 아티스트가 사는 거리를 알아냈다. 작고 흥미로운 컨템포러리 갤러리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5구역이었다. 그곳에 살면 디자인을 공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지난 학기 때 지내던 방을 정리하여 자이덴가쎄에 방을 얻었다. 한 달에 팔백 유로라고 적힌 계약서를 보고는 잠시 망설였지만, 영감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돈은 아깝지 않을 거라며 자신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집세를 감당하기 위해 근처 커피숍에서 일해야만 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갤러리에는 늘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는 듯 보였지만, 막상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슈테파니는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자신감이 없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무기력증까지 생겨버렸다.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건너편 건물에 사는 그 동양인 아티스트였다. 밤 열한 시에 돌아와서도 그 작가의 작품을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을 놀랍도록 독특한 발상으로 시각화 해내는 그의 능력을 닮고 싶었다. 그녀는 창문 너머를 늘 주시했다. 그가 사는 방에 불빛이 켜지는 날이면 그녀도 밤늦도록 그 불빛에 의지해 무언가에 골몰했다. 그가 사는 건물은 중앙의 창문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테라스처럼 꾸며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사 올 당시에는 당장에라도 그 동양인 작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는 늘 창문에 커튼을 드리운 채 작업했다. 공교롭게도 그 작가가 사는 아래층에도 웬 동양인 남자가 살고 있어서, 창가를 아른거리는 그 개구리처럼 생긴 남자를 한동안 그 멋진 작가로 오해한 적도 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지만, 슈테파니는 고향에 가지 않았다. 방학 동안 어떻게든 그 아티스트와 연락을 해 볼 심산이었다. 창가의 불빛만으로도 전해지는 그의 존재감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지만, 직접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 어쩌면 이미 친구나 다름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거리에는 바이나흐텐 Weihnachten *장식이 달리기 시작했다. 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갔었기에 도시의 화려한 바이나흐텐 장식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창문 바로 앞에 장식이 걸렸다. 그녀는 그것이 좋은 징조라 생각했다. 바이나흐텐을 며칠 앞두고 그녀는 작가의 우편함에 메모를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의 작업을 열렬히 좋아하는 학생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자신이 당신의 앞 건물에 살게 되었으니 이런 우연이 또 어디 있겠느냐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니, 오늘 밤 자정에 테라스로 나와 한 번만 손을 흔들어줄 수 없겠느냐-는 낭만적인 말을 끝으로 메모를 남겼다. 이보다 더 귀여운 요청은 그 어떤 팬으로부터도 받아본 적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무례한 요청은 아니었을까 불안해하며 자정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킨다.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고 건너편 건물을 바라본다. 작가는 약속대로 커튼을 걷고 테라스로 걸어나왔다. 웬일인지 아래층의 개구리 같은 남자도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슈테파니는 오직 그를 향해, 자신이 가진 진짜의 아름다움, 시골 출신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