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신 와중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조용한 객차 안에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오늘 이렇게 용기를 내어 승객 여러분들 앞에 선 이유는…”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오자 승객들의 눈빛이 분주하게 소리의 근원을 찾아 움직인다. 긴장된 듯 약간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을 정도의 맑은 음색이었다. 사람들 시선이 향해 있는 곳에는 의외로 말끔한 정장 차림의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점잖은 모양의 여행용 가방이 세워져 있었는데, 평범한 행상이 들고다닐 법한 그런 가방은 아니었다. 가방 앞 주머니를 열기 위해 뻗은 그의 팔 소매 끝에 작은 사과모양 커프스 단추가 번쩍였다.
“바로 이 사과깎이를 소개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남자가 들고있는 사과깎이는 보통의 감자깎이처럼 이중 필러가 달러 있었지만, U자형으로 이어진 다른 한 쪽에 사과를 고정시킬 수 있는 부분이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과깎이의 생김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관심 밖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자기 하던 일에 몰두한다. 관심을 보였다가 괜히 판매자의 눈에 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잘 차려입은 중년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들이 사과깎이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그는 조금 실망한 듯 했지만, 몇 번 마른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더니 힘차게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자 요즘 감기 많이들 걸리시죠? 환절기에 여러분의 건강을 챙겨줄 비타민! 바로 이 사과 안에 들어있는…”
“다음 정차역은…”
“…챙기시라고 제가 이 사과깎이를…”
“사당!”
“…특히 우리 주부님들…”
“사당!”
“사과!”
“역입니다.”
“…불편하셨습니까? 이 사과깎이로 주부님들…”
“내리실 문은..”
“단, 20초! 딱!”
“오른쪽입니다.”
“…됩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을 설명하고 있던 와중에 다음 정류장을 안내하는 방송이 뒤섞여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귀에는 이제 그의 말이 아무 의미 없는 전동차 소음과 다를 바 없었다. 사과깎이 시연을 위해 가방 속에서 사과를 찾고 있었던지, 달콤한 과일 향이 객차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그 향기의 출처를 따라 다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지하철 내 불법 판매 행위를 발견했을 시 신고 바란다는 승무원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돌린다.
사과깎이 장수는 그 안내 방송에 기가 죽어 한 손에 사과를 들고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역 내로 휘어져 들어가는 객차의 흔들림에 따라 쭈그리고 앉아있던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바로 그때, 그의 손에서 사과가 떨어져 나와 데굴데굴 출입문 앞으로 굴러가 버렸다. 이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환승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 무리가 쏟아져들어왔다. 사과는 발길에 채여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더해진 사람들로 이젠 발 디딜 틈도 없는 객차 안에서, 남자는 한 손에 사과깎이를 들고 잃어버린 사과를 찾아 돌아다녔다. 아마도 그 사과가 마지막 남은 한 알이였던 모양이다. 여기 있나 싶으면 다시 저리로 굴러가 버리고, 저기 있나 싶으면 또 반대로 굴러가 버렸다. 시커먼 회색 옷차림의 사람들 사이로 붉은 사과 알이 숨바꼭질하듯 돌아다니며 남자를 애타게 했다. 방금 들어온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이씨- 아이씨- 하며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제법 신선해 보였던 사과는 이리 긁히고 저리 채여 생기를 잃어버렸다. 누구 하나 그 끈적거리는 더러운 사과를 주워 주인을 찾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과깎이 장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바닥을 기어다녔다. 그의 몸이 사람들 사이에서 깎여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렵사리 사과를 붙잡아 드디어 한꺼풀 벗겨내는가 싶으면 또 지하철이 흔들려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과를 찾아 기어가고 미끄러지고, 치익- 하고 문이 열리면 또 아이씨! 아이씨! 그렇게 또 벗겨내고 떨어뜨리기를 수차례. 그 사이 지하철은 다음 환승역에 도착해 있었다.
가득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객차 안에는 처음의 그 말끔했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 손에 사과깎이를 들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 사과 껍질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남자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사람처럼 절망적인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그때 닫혀있던 문이 다시 열리고 누군가의 신고로 들이닥친 순찰원들이 그를 팔을 붙들고 객차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의 손에는 깨끗하게 벗겨진 사과 알맹이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