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아침에 눈을 뜨고 가뿐하게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면 안에서부터 썩어버린 통조림을 흔들 때 처럼 머릿속에서 잠이 덜깬 망상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털썩 쓰러져 버렸고, 길을 걸을 때엔 한 걸음 내딛을 때 마다 뭔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는 떨그럭 거리는 상념들이 껌 처럼 꼴사납게 내 바짓가랭이에 엉겨붙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대화 라는 것을 시도해보려고 하면, 마치 좌초된 유조선을 삼키기라도 한 것 처럼 침샘에서 꾸역꾸역 벤진이 세어나오는 것 같아 차마 입을 열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돌아온 처음 일주일 동안 만큼은 어땠는가, 아침에 일어날 때엔 마치 형광등이 켜질 때 전류가 필라멘트를 지나며 나는 듯 한 상쾌한 비명을 지르며 일어날 수 있었고, 걸음을 걸을 때엔 마치 미처 발을 내딛어보지도 못한 채 공중에서 뒤뚱거리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의 몸 처럼 가벼웠고, 말을 할 때엔 는 마치 기원전 1만 5천년전 에스빠냐 알타미라 동굴벽화 속 들소의 그림 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는가. 마치 지구에서의 보낸 일주일 이기라도 한 것 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일주일 사이에 형광등은 썩은 통조림으로, 닐 암스트롱은 발바닥에 엉켜붙은 껌으로, 에스빠냐 초원의 싱그럽던 들소는 좌초된 유조선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 일주일 동안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안쓰럽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이사람, 저사람에게 다시 나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독일의 불쾌하게 내리는 비처럼 포말의 형태를 마다않고 뉘앙스를 풍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가소롭게도 나에게 '인간관계'란 그저 내 존재감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형성' 된다고 믿는 것인지라, 이미 뭔가가 나로인해 오염되었거나, 뭔가가 나에게 감염되었다는 망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체 독일식 포말과 껌붙은 닐 암스트롱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오염과 감염 양 염의 주범은 '관계' 그 자체가 아닌 '관계를 향한 의지' 그 자체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냉장고에서 패스트푸드를 꺼내오듯 굳이 신화를 빌어 올 것도 없다. 라디오 헤드의 '데어, 데어' 뮤직비디오에서 숲으로부터 도망치던 톰 요크가 나무로 변해버려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처럼. 내가 다시 달아나지 못하도록 내 몸에서 뿌리가 자라 지반 위에 감금되어버린, 그런 기분인 것이다. 내게 있어서 달갑지 않은 그 뿌리가 자랄 수 있게 해주는 '자양분'으로서의 상징은 정확하게 '인간관계'로 대치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유의할 것은 (들뢰즈가 사물의 의미를 지시나 의도 혹은 기호작용이 아닌 이웃한 항들과의 이웃관계에 의해 정의하듯) 이 '자양분-뿌리-나무' 의 계열화가 '순환'이나 '생명'의 의미로 해석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양분(관계)-뿌리-나무(로 변해가는 톰요크)'의 계열화로서, 즉 '구속' 내지는 '부자유'로 해석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바라는 것도 많지)
하지만, 불쾌한 비유와 상징을 난발해 가며 한 껏 멋있는 채 이야기 한다고 해서 '철 없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라는 식의 냉엄한 말에서 비껴 갈 수는 없는 법. 그러므로, 지구에서의 일주일이 마치 형광등이 켜질 때 에스빠냐 들소를 배경으로 닐 암스트롱이 뒤뚱거리는 것 처럼 황홀한 순간이었다 해도, 더 많은 날들을 나는 통조림을 머리에 인 채 상념이라는 족쇄를 발목에 차고 벤진을 질질 흘리고 다녀야 할 것이 분명하므로, 계속해서 나는 독일식 포말과 껌 붙은 닐 암스트롱과의 관계를 겸손하게 포행하듯 탐구해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