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두려움. 어떤 침묵. 어떤 불발탄.

만원어치의 소비. 아메리카노, 물은 되도록 적게. 그 다음엔 더블 에스프레소. 마지막으로 땅콩과 버드와이저. 그것을 소비하는 동안, 혹은 그것을 지불한 댓가로 생산 해 낸 것은 고작 Untitled 1.txt, Untitled 2.txt 그리고 Untitled 3.txt. 각각의 페이지에는 '적을 제조하는 법', '가보지 않은 영토', '그것들을 지금의 내 입장에서' 라는 따위의 문장들이 두서 없이 타이핑 되어 있다. 핸드폰을 연다. 엄지손가락으로 액정을 문지른다. 그리고 다시 닫는다. 너무 낡은게 아닌가. 다시 핸드폰을 연다. 받은 메세지함. 다시 엄지손가락. 다시 닫는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어떤 여자아이를 바라본다. 제인버킨의 어릴적 머리스타일.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나는 몇 몇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짧게 쓰자' 라고 말해버린다. 그 한마디 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갑자기 제인버킨과 눈이 마주친다. 눈길을 피하자 이번엔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라는 문장과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 액정에 써진 어떤이의 이름과 눈이 마주친다. '당장 그 이름을 책상위에 던져놓고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단념한 채 제인버킨과 이별해야 겠다' 라고 생각한다. 황급히 던힐과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파워북과 어댑터를 가방에 넣고, 시계를 차고 자켓을 입는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반대편 의자 위에 읽다만 플라톤. 만원을 지불하고. 뒷문을 통해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오늘은 유난히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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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눕는다. 벽 가까이 코를 대고 돌아 눕는다. 눈을 껌뻑이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다. 연휴 마지막 날. TV소리가 시끄럽다. 싸구려 쇼 프로그람에서 어떤 코미디언의 방정맞은 웃음 소리. 방청객들도 같이 따라 웃는다. 익숙한 환호 소리. 베게 속으로 얼굴을 구겨 넣는다. 이번엔 홈 쇼핑 채널. 쇼호스트의 방정맞은 목소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번엔 오래된 홍콩영화. 알수 없는 언어. 과장된 효과음. 다시 홈쇼핑 채널. 그리고 다시 싸구려 쇼 프로그램. TV소리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다. 잠을 잘 수가 없다. 가만히 눈을 껌뻑이며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번쩍이는 TV수상기 앞에 무덤처럼 누워계신 아버지는 그렇게 쓸쓸하다. 채널을 바꿀 때 마다 꾹꾹 리모컨을 누르는 그의 엄지손가락은 그렇게 외롭다. TV소리가 그친다. 날카로운 기침소리. 궁색한 침묵. 누추한 고요. 갑자기 비가 내린다. 그러자 전봇대 옆에 세워져 있던 음식쓰레기가 소각 되는 소리. 그런 것은 없다. 되도록 정확한 발음을 위해 입술을 조목조목 움직여 '그런 것은 없다' 라고 다시 한번 소리 없이 발음 해 본다. 외로움을 극복한 죄로, 슬픔을 멸시한 죄로, 사랑을 폐기한 죄로, 나는 말하는 법을 빼앗기고, 불안을 빼앗기고, 우울을 빼앗겼나.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영토. '그런 것은 없다' 라고 또 한번 말하고 나서 '그렇다면 희극이어야 할까' 라고 천진하게 묻는다. 대답이 없자 나는 '이것 또한 외로움인가'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