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나는. 라이프치히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베를리너 슈트라쎄 18/20번지 건물 앞에 서있다. 이곳을 빠져 나오는 동안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너무 긴장을 했던가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길 바라며 내가 빠져나온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길 위에는 나트륨등 조명을 받아 노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어제, 안드레이라는 브라질에서 온 친구가 눈이 많이 내린다며 부산을 떨던 모습이 생각났다. 한걸음 내딛어보니 내 오래된 캔버스화가 저 자신의 높이만큼 눈속에 깊이 파묻혔다. 신발 양쪽 끝이 닳아서 구멍이 나 있다. 조금 걷다보면 양말까지 젖어버릴 것만 같았다. 구멍난 신발을 독일에까지 가져간다며 핀잔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렇게 잠시 길 위에 서있는 동안, 신발이 벌써 얼얼하게 젖어오는 것 같아 나는 툭툭. 두어번 눈을 털고 길을 재촉했다.

12월들어 부쩍 라이프치히에는 눈이 오거나 비바람이 부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외출을 삼가하고 있었다. 눈싸라기가 얼굴을 찌르며 날아드는 폭풍속을 걷다보면 마치 유배지로 끌려가는 죄수가 된 것처럼 비참한 기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유배지로 글려가는 죄수의 기분을 알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마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히스클리프가 된 것만 같았다. 왠지 한 손에 사냥총이라도 들고 있어야할 것처럼. 왠지 이런 비유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사냥총은 어디에 쓰려고? 오늘 새벽의 거리는 조용했다. 길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 나는 더 크고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유난히 좁은 베를리너 슈트라쎄를 빠져나와 큰길에 이르자 도로위에 드문드문 차가 지나다녔다. 빨간색 푸조가 눈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젖은 도로위를 핥고 지나가는 듯. 그 불쾌한소리가 오히려 내 몸이 따뜻하게 해주었다. 눈을 만져볼까? 장갑 낀 손을 휘둘러서 난간 위에 쌓여있던 눈을 쓸어내린다. 그러자, 서로 뭉치지 못한 그것이 눈가루로 변하여 난간 아래 작은하천으로 부서져 떨어진다. 하천은 노인의 손등위의 실핏줄처럼 힘없이 쓸쓸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블렌딘파크까지 이어져 있다. 이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될게다.

간밤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시시한 이야기들. 나는 왜 그런 시시한 것들을 생각하느라 잠을이루지 못했을까. 갑자기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다. 찬 공기가 목구멍 끝까지 가득 차오른다. 이대로 멈출수있으면- 차디찬 심장을 가져보는건 어떨까. 기계로 된 심장을 갖겠다고 지구를 떠나던 은하철도999라는 장편 만화영화 속의 철이가 생각났다. 하지만 난 기계심장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그저 차가운 심장은 어떨까. 머리속에도, 눈가에도, 입술에도 차가운 혈류를 보낼 수 있고, 그래서 차가운 생각, 차가운 눈빛, 차가운 말투 따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숨을 멈추어도 생각은 계속될것만 같다. 순진한 발상. 하지만, 진짜로 숨을 참아볼까- 차가워질 수 있지 않을까. 흐읍! 나는 지난 일주일동안 고작 열 시간도 못잤다. 불면의 밤들. 불면증이라는것은 현대인에겐 거의 필수품에 가까운 신경증아닌가. 나는 현대인인가? 괜히 불쾌하다. 아니 벌써 숨이 가쁘다. 불면의 순도에 대해 생각해본다. 불면증을 핑계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건 진짜 불면이 아니다. 진짜의 불면이라는 것은, 꼬박 침대 위에서만 영원불멸의 미이라처럼 누워만있어야 한다. 이른 아침의 서광을, 그것이 비록 찬란하더라도 잔인한 그 오전의 풍경을 묵묵히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지난밤 마셨던 지독한 에스프레소를 떠올리고 후회하더라도, 아침이되면 아침이니까 다시 한잔 들이켜야한다. 그래 아침이니까! 아- 별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제 숨을 내쉬어야할까. 아니면 더 참아낼 수 있을까. 그럼 이런 은유는 어떨까. 불면의 나는 마치 대양위에 난파된 선박과도 같다. 긍정적이고 쾌활한 생의 대발견을 위한 대-항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대항해의 결말은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만큼이나 진부하고 뻔하다. 단지 영화에서처럼 주인공이 극적으로 구조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과감하게 비극으로만 돌진하는 플롯이라는 점에서, 점수를 좀 더 줄수있는 정도랄까. 형이상학적인 대양 위에서, 출렁거리는 질문들 위에서, 그것을 비웃는듯 초침소리에 맞추어 - 내 이케아 탁상시계와 스와치 손목시계는 유난히 초침 소리가 크다 - 출렁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암초를 만나 우드득! 허무라는 이름의 폭풍을 만나 우드득! 그대로 배는 가라앉아버리고, 나는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해수를 온몸으로 느끼며 홀로 대양위를 떠다녀야 한다. 마치 노르웨이 신화 속 인어, 싸이렌과 마주치듯 그렇게 꼭 같은 지점에서 침몰하고 마는 것이다. 대양위에 하나의 점이 되어, 포말이 되어, 그대로 고독이라는 상징이되어, 비극적으로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오후에 건조되고, 자정에 출항하여, 동이 트기전에 난파되어버리는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우드득- 우드득- 부서지지는것 만큼은 피하기 위해, 허무하게 가라앉지 않기 위해 집을 나왔으니까. 우드득! 우드득! 소리내어 발음해보려다가 그만, 푸우- 참았던 숨을 터뜨린다. 역시 스스로 차가워지는건 불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애초에 숨을 멈추어볼까-가 아니라 숨을 참아볼까- 였더라고. 조금 우스웠다. 괜히 항해라는 은유를 쓴걸까. 정말로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나는 평생 배에 오른적도 없지 않은가. 싸이렌에 대한 신화를 읽어본적도 없지 않은가. 역시 우스웠다. 하지만 왜? 스타벅스이 사이렌의 상징을 쓰고있을까. 그것 역시 알수 없다. 그러고보니 커피를 마셔야할 시간인데. 거의 다왔다. 하천을 따라 걷다보니 라이프치히 동물원이 나왔다. 동물원 입구에 그려진 동물들의 형상이 어둠속에서 보니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미신적인 이야기나 애니미즘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질까봐 고개를 획- 돌렸다. 아니 사실 내가 가고자 하는 블렌딘파크는 동물원 뒷편에 있기 때문에, 획- 하고 돌아가야 하는것이 맞긴 하다.

새벽 6시 정각. 드디어 블린덴파크의 입구이다. 이곳, 블린덴파크는 라이프치히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원이었다. 물론 기숙사에서도 가장 가까운 공원이기 때문에 산책하러 많이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내가 이곳을 특히나 좋아하는 이유는 몇가지 있는데, 우선 이곳은 그 지리적 형태가 너무 초현실적이다. 마치 거대한 우주선을 위한 비행장같다고 할까, 아니면 거대한 신전같다고 해야할까. 거의 하늘만큼 넓게 펼쳐진 잔디밭, 그리고 그 잔디밭 주위로 자라있는 커다란 고목들이 마치 그 한가운데에 뭔가가 내려서기를, 한없이 장엄한 무엇을 영원처럼 기다리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다시 바다-라는 은유를 사용해도 괜찮을까. 유럽대륙 한가운데에서 볼수있는 유일한 바다. 아니 그 무엇이든, 지금 저 나무숲을 뚫고 지나기만 하면 내가 보고싶은 그 풍경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게다가 오늘은 그 황홀한 대지위에 차곡차곡 눈이 쌓여있을테니 얼마나 더 아름다울것인가! 그래, 저 검은 나무숲을, 어둠속을 뚫고 지나갈수만 있다면!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그 숲의 입구에 가만히 서있었다. 내 앞에 늘어선 고목들이 늦은 오후처럼 찬란했던 신전의 기둥이 아닌, 까맣게 늘어선 위압적인 성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 설마 난 지금 무섭기라도 하다는 것인가. 이런 감상적인 두려움은 도데체 얼마만인지! 그 컴컴한 숲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죽음과 관련된 상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다른 경쾌한 비유를 떠올릴 수 있다면 수월할것 같았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며칠전에 보았던 노스페라투의 핏기없는 얼굴의 백작이 걸어나올것만 같았다. 허허. 유럽에 와있다고 당장 소복입은 귀신이 아닌 드라큐라를 떠올리고 있다니! 참. 우습게도 나는 '이건 너무 유치하잖아!' 라는 불평의 힘으로 그 감상적인 두려움을 무찌르고 검은 성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큼성큼 걸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태연하게 걷기 시작했다. 괜히 대담하게 걷는다는 생각이, 여전히 그 어떤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것을 반증하고 있는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두렵긴 했던가보다. 갑자기 태연하게 걷는것도, 대담하게 걷는것도, 심지어 그저 걷는것 조차도 복잡한 프로세스처럼 여겨졌다. 얼마쯤 왔을까 나무사이로 뭔가가 열리듯 환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미소까지를 지으며 그곳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블린덴파크.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풍경 탓에 <드디어>라는 단어를 나는 아얘 잊어버린 듯 했다. 나는 눈에 힘을주고 탐욕스럽게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상상했던 풍경은 약간 푸른빛이 감도는 우수에 젖은 설원이나, 동양화풍의, 여백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그런 고즈넉한 설원이였는데, 뭔가 그런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술감독이나 연출자를 탓할수도 없었다. 이 낯선 풍경에 대해 불평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할테니까. 사실 나는 애초에 풍경따위를 보고 감동 받는 일에 대해서 쓸데없는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든 영화 속에서든 작가가 '대자연'에 흠뻑 취해 찬미해 마지않는 그런 대목을 만나면 시큰둥하게 넘겨버릴 정도였으니까.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저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깨달음을 얻게된 주인공 알료사가 대지위에 엎드려 키스하는 명장면에서나, 혹은 까뮈의 수필 <티파사의 결혼>에서 그가 태양 아래에서, 압셍트의 향기 속에서, 과일을 깨물며 묘사한 찬미의 구절들 말이다. 아마도 그건 가본적도, 가져본적도 없는 감상에 대한 질투일 것일테고, 그것에 대한 욕심이겠지. 그래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일생일대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장면을 가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갖게되면, 가질수 있다면, 혹시 지난 며칠간 느꼈던 외로움이나 서러움같은것을 단번에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가진다>는 말인가. 도데체 그 텅빈 공간을 바라보며 무슨말을 해야하고 무엇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모른다. 알료사처럼 당장 대지위에 엎드려 키스를 해볼까. 아니면 까-뮈를 흉내내볼까. 하지만 '압셍트의 향기'라는 것의 근처에도 가본적없지 않는가. 설레는 기분은 이미 간데없고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마치 한밤중에 높은 성벽을 지나, 귀중한 어떤 것을 훔쳐내기라도 할 것 처럼 점점 더 초조해지기만 했다. 아니, 나는 왜 섣부르게 '일생일대의' 라는 한정사 따위를 생각해 냈을까. 갑자기 불길한 느낌. 도데체 무슨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그렇게 절대적으로 홀로 거대한 풍경앞에 서서 어쩔줄 몰라 하고 있었다.

몇분이 지나도록 멍하게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더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할만큼 집중해 있었다. 달도 없고 별도 없는 구름 낀 하늘인데도, '12월의 새벽하늘'이라고 하기엔 너무 밝은 하늘. 그리고 그 빛깔은 거의 황토색에 가까웠다. 황토색의 하늘이라니! 나는 한번 실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내려온, 내 시야에서 가장 먼 곳을 응시했다. 그 곳에는 내가 방금전에 지나왔던 검은 성벽이 수평선을 따라서 먼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미 지나온 풍경이라서 그런지 왠지 낯설지 않고 믿음직했다. 다만 나무들은 수평선에 가까울수록 나무가 아니라, 그저 검은 띠에 가까워 보였다. 그것도 발기발기 찢어진채로. 그리고 다시 그 아래 하늘만큼 넓게 펼쳐진 잔디밭. 잔디. 잔디? 그것은 잔디밭도 아니고 하늘의 반댓말인 <땅>도 아니었다. 차라리 텅빈 하늘이 계속 이어져있다라고 할까. 잔디밭 위로 쌓인 눈이 하늘빛을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번엔 실소가 아니라 탄성을 질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전체를 조망하니, 풍경은 그저 커다랗게 뚤린 황토빛 공간 위에 그어진 검은 선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내가 공간속에 서있는기는 한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평면적이고 기하학적인 반추상에 가까운 그 풍경속에서 나는 얼어버린 듯, 그대로 나조차 화면이 되어버린듯 멈춰버렸다. 한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 비구상의 화면속에, 추상적인 무대위에 발을들여 놓는 순간, 나따위는 금방 뒤틀리고 일그러질것만 같았고, 현실적인 지각과는 무관한 세계로 끝없이 떨어질것만 같았다. 뭔가 뒤바뀐것만 같았다. 어쩌면 내가 하늘과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바라봄을 당하고 있는건 아닐까. 이번엔 탄성이 아닌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감고 걷기 시작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기꺼이 비틀리고 일그러져도 상관없다는 듯, 그 텅 빈 공간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넘어지더라도 떨어지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라리 아늑할 것 같았다. 그냥 걷고있다는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불면의 시간들 처럼 부유하는 느낌이 아니라 온전히 무게를 느끼는, 내가 나 스스로를 지탱하고 서 있는, 그 느낌이 따스했다. 얼마 걸었을까 다시 눈을뜨고 바라보았다. 머리위와 발 아래로 빈 공간, 그리고 그 경계에 검은나무들이 저 멀리서 나를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수백만의 군중이 엄숙하게 지켜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서야 알것 같았다. 내가 정확히 그 빈 공간의 중심을 향해 걷고 있다는 것을. 아- 이건 너무 인간적인 허영이 아닌가! 나는 탄식했다.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며칠 밤, 대양위를 홀로 표류하며 외로움에 떨어야 했던 이유를, 아무도 없는, 아무도 찾지않는 시간에, 블렌딘파크를 찾은 이유를. 그것은 마치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꼭대기에 올라 서야만 하는 허영심이었고, 산정에 올라갔었노라고 어떻게든 발설하지 않으면 안되는 심약함이었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기 위해, 더 절대적인 고독을 찾아서, 나는 그 망령을 좆아서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발설하지 않을 수 없는 척박한 정상을 맛보기 위해서. 누구도 느껴본 적 없는 장면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 그 허영을 위해! 아- 마치 어린아이처럼 누구에게든 달려가 그것을 고백하고 싶은 그 심약함을, 모두의 머리 위에 서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확인하고자 하는 그 허영을 당장에 내팽개쳐버리고 싶었다. 대체 어디가 더 높은 곳이고 어디가 더 낮은곳이란 말인가. 이곳에서는 하늘과 땅조차 의미없지 않은가. 나는 그 인간성들을 배신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자. 아무에게도 이 장면을 나누어주지 말자.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허영이라는 신에게 바칠 제물로써 바로 그 허영심을 내놓은 것 같았다. 그것도 눈먼자를 상징하는 블렌딘파크에서! 그 엉뚱한 반전이, 그 아이러닉한 결말이 나를 희열에 차오르게 했다. 홀로 충만하다.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나는 지금 충분하다. 차라리 완전하다. 나는 신이나서 미친사람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리고 지금, 그것에 대해 쓴다. 아무도 알지못하는 그 기이한 풍경을 통째로 소유하기 위해서. 이기는- 아니 허영은 나를 절대로, 한번도 놓아준 적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