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어느 밤, 우리는 여수로 떠났다. 바다를 보러가자! 는 한마디 말이 우리를 움직였다. 몇 시간 뒤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 보다도, 파주에서 여수까지 400km 가까이 달려야하는 이 충동과 무모함 자체를 우리는 더 반가워 했다. 그녀는 나에 비해 결단력이 있지만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떠나길 좋아하지만 많이 망설이는 편이다. 이렇게 다른 성향인데도 오늘처럼 마음이 맞아 떨어지면 우리는 정말 거침이 없다. 여수에 가서 돌산 갓김치를 먹어보자- 는 다소 황당한 목적 이외에 다른 어떤 계획도 없었기에 여행이라는 말 보다는 ‘도주'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쫒아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엇 하나에도 좀처럼 집중할 수 없는 지리멸렬과 그로인한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우리의 적이라면 적이었다. 네 시간 여, 긴 시간 동안 떠나가며 우리는 쉼 없이 대화를 나눴다. 각자 읽고 있던 책에 대해서, 불순한 세계에 대해, 사람들의 위선에 대해, 종교와 예술에 대해 어느때 보다도 더 즐겁게 얘기했다. 다른 의견이 있어도 조화롭게 서로 이야기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우리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여수를 한참 앞에 두고 우리는 지리산 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호젓이 화엄사 경내를 산책하는 것을 상상했지만 무리한 탓인지 정오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떳다. 날씨는 우중충했고 화엄사에는 화엄華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호객꾼들 뿐이어서 적잖이 실망했다. 지리산 노고단에 가려는 것도 포기하고 우리는 다시 여수로 향했다. 여수로 가는 목전에서 다시 멈추어 순천에 들렀다. 오늘처럼 스산한 날씨에는 늪지 구경이 제격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비싼 표값을 치르고 들어간 생태공원에는 아이처럼 이것봐라 저것봐라 소리지르는 어른들로 가득했고 우리는 우산을 챙겨나오지 않아 비를 쫄딱 맞고 말았다. 다시 힘을 내어 여수로 가기로 한다. 여수 시내로 들어오자 산등성이를 굽이 돌아 갈 때마다 바다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친 김에 끝까지 가보자 하여 육로로 연결된 최남단 돌산도로 향한다. 바다 위에 불쑥불쑥 솟아있는 섬을 돌고 돌아 향일암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비도 오는데다가 월요일 저녁이어서 우리 이외에는 관광객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힘이 들었지만 잠시 내려 남해를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 안개가 들어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바다를 면 한 해안가인데도 수면이 호수처럼 잠잠하여 마치 연주자도 관객도 다 떠난 공연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손님들을 기다리다 지쳐 하나 둘 문을 닫는 가게들 때문에 풍경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완벽하게 맑은 하늘 아래로 탁 트인 바다 풍경, 멀리서 불어오는 짭짤한 바다 내음, 그것들을 온 몸으로 느끼며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는 모습. 아마 그런 장면이 처음에 떠날 때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기대했던 장면 그대로에 쏙 들어가 있으면 그대로 좋기도 하겠지만, 예상치 못한 이 우울한 풍경도 그대로 우리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찾아오는 서로의 우울에 대해, 당황해 하며 애써 기분을 전환시키려 한다거나 탓하지 말자-는 다짐을 얼마 전에 했던 터라, 여수 밤 바다의 차갑고 비릿한 풍경도 괜찮았다. 옷깃을 여미고 우리는 향일암 아래 가장 풍경이 좋은 가게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아홉시도 안되어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