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에 새로운 공간을 얻었다. 대학교 1학년 때, 故송수남 교수님 댁 이사를 도와드리며 와 본 이후로는 처음이다. 아예 산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아직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얻어진 결과이다. 점심 무렵 간단히 산책을 갔다 오려는 마음에 길을 나섰는데, 둘레길 팻말을 따라 걷다 보니 북한산 중턱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그 참에 정상까지 가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늘진 곳이 아직 얼어있어 둘레길 초입에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대단한 생각을 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나무들 곁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마음은 현재에 머물 때만, 깃털처럼 가볍다. 과거로든 미래로든, 마음이 시간의 축 위에 놓이면 금세 물에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져 버리고 만다. 무거운 마음은 몸도 무겁게 가라앉힌다. 과거가 주는 무게감과 미래로부터 오는 무게감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과거의 기억이란, 현재의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지나간 사건들이지만,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선택하려는 일의 합당한 이유를 과거의 자신을 근거로 찾아 명분으로 삼고자 하기에, 세상 모든 일을 논리적인 인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과거의 무게에 짓눌리기 쉽다. 한편 미래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마음을 짓누른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여러 선택지 중 가장 나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여러 갈래 중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가려내기 위해 또 고민한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환영일 뿐이고,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가상일 뿐이다. 사람이 과거로부터 온 미련과 후회, 죄책감에 시달리며, 미래에 다가올 최선의 선택을 위해 대부분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일이다.
산책은 과거와 미래에 엉겨 붙어 팽팽해진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나무와 새, 물을 바라봄으로써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사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 혹은 회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결론은, 자연과 가까운 이곳으로 이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
* 뜬금없는 생각
현생 인류 이전의 초고대 문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문명은 인간의 형태가 아닌 다른 종에 의해 달성되었을 것이다. 발달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인간의 형태일 것이라 믿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이듯, 지구상에 있었던 다른 문명이 유인원의 형태를 가졌으리라는 것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상상이라 생각된다. 그 초고대 생명체가 현-인류가 끝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생명-개조, 영생의 방법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했으리라 가정하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무쌍한 지구의 생태 환경에 완벽히 적응할 수 있는 생명-형태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형태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세포의 형태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세포 단위의 생명이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완결된 '첨단'의 생명-형태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