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7, 2017

조금 늦게 일어났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이다. 매일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꿈을 꾼다. 전보다 많은 시간을 나에게 집중하며 지내고 있지만, 아직 많은 한국에 남기고 온 많은 것들에 대해 부담감을 가진 듯하다. 몸이 무거웠다. 뜨거운 물로 경직된 몸을 이완시키고 작업실로 내려오니 어제보다 조금 늦은 아홉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어제와는 또 달랐다.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데다가 산허리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있었다. 거기에 철강공장에서 올라온 희뿌연 수증기가 더해져, 온 세상이 젖은 이불에 둘러쌓인듯 축축하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젯밤에는 젖은 나무와 이끼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더니, 오늘은 바닷물 냄새가 풍겨왔다. 

산책을 가면 좋을 것 같았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러 갔다가 필립을 만났다. 늘 뭔가에 들떠있는 표정의 필립은, 상기된 표정으로 하이킹을 가자고 했다. 그제야 무심결에 약속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그래, 그러자.’고 말했다. 막상 다시 작업실로 내려와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그대로 차분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기도 했다. 장자를 읽었다. 제물론 2편, ’이것’과 ‘저것’에 대한 이야기.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필립이 분주하게 옷을 차려입고 와 방 문을 두드린다. 한 두시간만 운동 삼아 나갔다 오자는 심산으로, 옷을 챙겨입고 나섰다. 

지난번 산행과는 달리, 필립의 발걸음이 빨랐다. 조금 전까지 짜증 나는 일이 있어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했다. 그 역시 자신이 있었던 세계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필립은 끊임없이 중간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산에서 물이 흘러내려 절벽에 매달린 채 얼어버린, 허연 고드름을 열심히 찍었다.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짓눌려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깨진 잿빛 암석과, 자신의 차가움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얼어붙은 하얀 얼음의 대비가 눈길을 끌었다. 어떤 곳에는 아침부터 내린 부슬비가 제법 큰 물줄기가 되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필립은 자신이 찍는 사진에 대해 이야기했다. 깊은 밤 산에서 찍은 장노출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사진처럼, 밤인데도 거대한 암석이 붉고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감탄했지만, 왠지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탄이 아닌 것처럼 힘이 없었다. 나는 전보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내가 신경 쓰였는지, 필립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학교생활 동안 전통적인 기법들을 더 많이 배웠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미술대학 교육에 대해, 교수법에 대해, 분위기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종종 무의식적으로 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내가 처해 있던 분위기를 안좋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좋지 않은 말버릇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점차 높아지고, 길은 더욱 질퍽거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도 강해져 방수가 안 되는 내 점퍼가 다 젖어버렸다. 나는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그런 얘기를 망설임 없이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필립은 그대로 좀 더 올라가기로 하고 나는 다시 산에서 내려와 작업실로 향했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혹은 어떤 목적이 너무나도 분명히 나를 잡아끌면, 나는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중간중간 멈춰서 풍경을 바라보고, 뭔가 유의미한 것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좋은 쪽으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비에 젖어 무거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허기가 져서 마지막 남은 토마토소스로 요리를 시작 했다. 요리하다 연인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다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화를 내고, 미안해하고, 다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늘 그랬듯이. 오전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있었던가 보다. 나는 그저 피하고 싶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다시 과거에 고정시키려 하는 모든 것들을 떨쳐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번에 먼지를 털어버리듯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잘 알고 있다. 알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다툰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그림을 그렸다. 다행인 것은, 그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것이다. 콘테를 종이에 안착시키며, 아침에 읽었던 장자의 말을 떠올려 본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 그러므로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를 말한다. 양극이 동시에 머무는데, 그것을 어떻게 일치시키며, 또한 조화시킨단 말인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은 장자를 처음 읽었던 10대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예전보다는 더 가깝게 와 닿는다. 적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만큼은 이제 정확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