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8, 2017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역시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는 우스꽝스러운 꿈이었다. 꿈속에서 굉장히 먼 거리를 빠르게 뛰어다녔는데, 그 때문인지 자고 일어났지만,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마도 어제 비를 맞고 돌아다닌 영향도 있을 것이다. 겨우 일어나 씻고 작업실로 내려왔다. 

정문 현관 앞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한 개비를 다 태울 때쯤, 이곳에 함께 머무는 또 다른 작가 샌드라가 문을 열고 나왔다. 덴마크에서 온 친구인데 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많은 것에 궁금증이 많고, 나이는 많지 않아 보이는데, 이곳저곳을 다니며 경험을 많이 쌓은 친구 같았다. 이 친구에게는 조금 독특한 '넉살'이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마치 방송 진행자 같은 표정과 손짓를 지어 보이며, 유창하게 뭔가를 말하는데, 독특한 억양 때문에 알아듣기 쉽지 않다. 담배를 무척 자주 피우러 나가고, 주로 밤에 작업하는 편이라, 가까이하면 왠지 원치 않는 습관이 물들까 봐 나도 모르게 조금 거리를 두던 중이었다. 샌드라는 늘 비니를 머리에 쓰고, 진녹색의 긴 코트를 입고 있다. 어쩌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컨템포러리 아트'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강박을 가진 그런, 속 빈 강정 같은 친구가 아닐까 하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이 친구는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뛰쳐나온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을 속단하지 말자. 더 적극적으로 궁금해하고, 대화를 나눠보자. 다시 한번 다짐한다. 

샌드라는, 오늘 덴마크로 떠난다고 했다. 덴마크에 갔다가 다시 핀란드로 가서 해야 할 작업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에는 오슬로의 예술대학원에서 연락이 와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나는 그저 '오, 그러냐' 하는 성의 없는 추임새 대신, 이것저것 물어보기로 했다. 산드라는 그동안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돈에 쪼들리며 여기저기 오가며 작업해왔기에, 이제 어느 한 곳에 머물며, 좋은 환경에서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있냐고 물으니, 자신이 만들고 있는 에칭 작품집에 관해 이야기했다. 유럽 이곳 저곳을 다니며 수집했던 것들을 에칭으로 옮겨 그리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안정적으로 작업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조금은 쑥쓰러운 듯 이야기 했다.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너에게 행복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샌드라는, 자신에게 행복이란,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무얼 할까 고민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 계획과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 샌드라에게 행복과 만족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제 필립의 대답에 이어, 참으로 명쾌하고 현명한 대답이었다. 만족스러운 대화였다.

다시 기분 좋게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 구상을 했다. 어제 산책길에 보았던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언덕에 올라가서 바라보았던 안개가 자욱하게 낀 피오르의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계속해서 풍경에 대해 생각한다. 사실, 그 이외에 다른 것을 그릴 엄두가 나지 않는달까. 그만큼 이곳 환경이 주는 영향이 크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동안 풍경화에 대해서 다소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저 보고 그리는 것일 뿐, 그 안에 어떤 마음을 담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해보지 않았달까... 며칠 풍경을 붙잡고 있자니,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보였다. 단지 손의 표현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뿐. 풍경은 주로 다루기 쉬운 콘테로 작업하고 있지만, 담채로도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생과 연습이 필요하겠다.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아 배가 고팠지만, 요리 거리가 다 떨어진 상태였다. 카레를 해 먹기로 하고, 식료품점에서 쌀과 당근, 양파와 감자, 그리고 카레 가루(처럼 생긴) 것을 샀다. 카레 가루가 어디있냐고 직원에게 물었는데 갑자기 서너명이 달려와 찾는 것을 도와주어 깜짝 놀랐다. 쇼핑을 마치고 나니 갑자기 식욕이 올라 곧장 주방으로 올라가 요리를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샌드라가 덴마크로 곧 떠날 참이라며 들어와 황급히 이것저것 챙겨서 나갔다. 한동안 못 볼 것을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에 잘 다녀오라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카레는,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는 달랐지만, 적어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니 필립이 낚시를 하러 가자고 한다. 정말 에너지가 많은 친구이다. 

작업실로 돌아와 어제 산책길에 찍었던 바위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콘테로, 바위의 음영을 똑같이 따라 그리려고 하니, 영 갑갑했다. 한 이십 년 전(이십 년 전이라니!) 미술학원 다닐 때, 헌책방에서 구해 온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의 사진을 보며 이것저것 따라 그리던 때 생각이 났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즐거웠다. 적어도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그때와 지금,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그런 부분일 것이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으로부터 새로운 이미지를 보게 된다는 것. 

해 질 녘에 되어가자 필립이 낚시를 하러 가겠다고 한다. 소화도 시킬 겸 따라나서기로 한다. 한스씨의 낚싯대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들고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로 나가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아마 필립이 말한 행복이 아닐까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을 그저 할 수 있기에 느낄 수 있는 행복 말이다. 집 앞에 커다란 바위 언덕을 돌아 내려가면 작은 오두막이 있고, 그 옆으로 널찍한 바위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낚싯대를 던졌다. 물론 낚싯대를 멀리 던지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그저 낚싯줄이 감긴 작은 도구였을 뿐인데, 어떻게 줄을 풀어내는지 몰라 한참을 씨름했다. 제법 멀리 찌를 날려 보낼 수 있게 되자, 제법 낚시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 십여 분 낚싯대를 던졌지만, 물론 아무소득이 없었다. 필립은 아직도 낚싯줄을 푸는 법을 몰라 심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사십이 넘은 친구가, 신이 나서 낚시를 가자고 해 놓고는, 몇 번 던져보지도 않고 도구 탓을 하고, 이런저런 불평을 하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삼십 분도 채 안돼서 낚시를 포기하고 돌아왔다. 필립은 크게 실망한 눈치였지만, 나는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바위 그림을 이어갔다. 완성도 하기 전에 조금 질려버려서 그만두었다. 늘 쓰던 잉크가 그리웠다. 잉크로 다시 다른 바위 그림을 그리다가 또 그만두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에, 마음이 산만한 듯 느껴졌다. 또다시 마음이 조급해지려 한다. 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쩌면 오늘의, 이곳에서의 과제가 아닐까. 

일기를 쓰고, 다시 집중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