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9, 2017

일기를 저녁 늦게 쓰려다보니 졸려서 중간에 포기하고 잠드는 일이 잦았다. 조금 일찍 창밖이 어두워지면 쓰기로 한다. 그러다보니, 전날 저녁에 있었던 일들은 본의 아니게 기록에 남지 않는다.

어젯밤에는 필립이 독일에서 가져온 보드카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어제도 오늘처럼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다들 집 안에만 머물다 보니 무료함을 느끼던 중이었다. 그렇게 필립Philipp과 나이Naï, 셋이서 조용한 거실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눴다. 기억에 남는 건, 필립이 기억하고 있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벽이 무너지던 날 가족과 함께 장벽 너머 동베를린 지역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서로 꽃을 주고받던 모습이 생생하고 했다. 통일 이전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들었다. 내 생에도 그런 역사적인 사건을 목격하게 될까? 옛날 얘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말할 기운이 없었고 또 영어에 자신감이 조금 떨어진 상태여서 말하기를 주저했다. 조금 후에는 레지던시를 관리하는 한스 씨와 그의 부인 시모네 씨가 그 자리에 가세했다. 한스 씨는 올빅 사람들에 대한 얘기와 그동안 레지던시를 거쳐 간 작가들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벌써 떠나는 날 서로 어색하게 여러 번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한 모금 두 모금 알콜로 몸을 덥혀가며 조촐한 대화를 자정까지 이어갔다. 

오늘은, 메센에 입주한 지 일주일 째 되는 날. 특별한 일 없이 조용히 하루를 보냈다. 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이 되니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오늘 한 일들은 대게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한 일이었다. 날씨 때문에 우울하다기보다는, 여기의 생활이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했던 것 같다. 오늘보다 어제 더 생기가 넘쳤고, 어제보다 그제 더 많은 호기심을 가졌었다. 석 달 동안 이곳에 머물면 과연 나는 얼마나 변해있을까? 변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변하지 않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 모든 것을 흘러가는 그대로 맡길 것이다.

오전에는 잠시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와 글을 썼고, 점심에는 어제 먹다 남은 카레를 먹었다. 낮에는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오는 기차에서 보았던 눈 덮인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천천히 검은색을 칠해 나간다. 해 질 녘에는 비를 맞으며 낚시를 하러 혼자 나갔는데, 몇 번 신나게 바늘을 던지다가 그만 바위 절벽 아래 밧줄에 걸리고 말았다. 이미 깊숙이 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바늘을 풀기 위해 절벽 아래로 내려갈 용기는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바위는 미끄러웠고, 물은 어제보다 더 짙은 검은색이었다. 낚싯줄을 힘껏 잡아당겨 바늘을 끊어내고 허탈하게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잊지 말고 한스의 낚싯바늘을 사서 돌려놔야겠다. 

빗줄기가 더욱 강해졌다. 각자의 방에서 무얼 하는지, 커다란 집이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계속 그림을 그리던 중 필립이 무언가 물어보러 작업실에 왔다. 뭔가 작업 중이라길래 필립의 작업실로 놀러 갔다. 필립은 지난번 산행 때 얘기했던 사진들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공중에 이런저런 물건을 매달고 회전시켜 장노출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굳이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으면서도 하고자 하는 것을 망설임 없이 실천에 옮기는 그의 추진력이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대단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말 즐기는 듯 보여 보기 좋았다. 과연 나는 정말 그림 그리기를 즐기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