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0, 2017

올빅에는 삼 일째 비가 내리고 있다. 낮 동안은 잠잠하더니, 해가 지고 나자 바람이 세차게 불어 창밖이 시끄럽다. 멀리 보이는 산에서는 전에는 없던 물줄기가 바위를 타고 내려온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 법.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날도 있었고 나쁜 날도 있었다. 과연 나는, 좋은 것만 취하려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일까. 공교롭게도 오늘 읽은 장자 제물론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있음有에서 생겨나고, 있음有은 없음無에서 생겨났다. 유有를 있게한 무無는, 유有가 없으면 불가능한 무無이기에 이것을 초극하기 위해서는 없음의 없음無無이 있어야 하고, 없음의 없음無無은 없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또 한 번 초극하기 위해 없음의 없음의 없음無無無을 가정해야 한다는... 말장난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나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좋지 않음'을 느끼고싶지 않기 위해 떠나왔지만, 당시 '좋음'은 그 '좋지 않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좋음'이고, 나쁨으로부터 격리된 현재의 좋음은 좋기 위해 또 다른 '나쁨'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 문득문득 내가 이곳에서 무얼 하고있는 것일까-하는 자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내 생에 이러한 생활형태를 가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공동생활을 위한 규범은 있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은 자유인 곳. 생활비에 대한 걱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덜 한 곳. 누구도 내가 무얼 하는지 간섭하지 않고, 누구도 내 작품을 평가하지 않는 곳. 마치 누군가 나를 책상에 앉혀두고 덜렁 흰 종이를 주고는 아무 것이나 그려봐라 하고는 나가버린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돌아와 내가 그린 것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도 해주지 않는 그런 이상한 기분 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애초에 그런 상황에 던져지는 것과 비슷할런지도 모르겠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이 물론 일생에 마주쳐야 하는 어려움의 대부분이지만, 그 이외의 성취에 대해서는 사실 누구도 뭐라 할 자격이 없다. 다들 자신이 만들어 낸 기준을 향해 달려가고 넘어지고 좌절한다. 

오늘 하루 종일 콘테 그림을 그렸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전에 그리던 그림을 구상해 보려 해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멋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만 잔뜩 있고,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실질적인 계획들은 있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진다. 이 마음을 내려놓아야 좋은 작업이 나올까.

오늘은 이만 쓰기로 한다.